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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12월 18일 (목)

일본의 간담을 서늘케 한 65세의 백발 투사, 강우규

일본의 간담을 서늘케 한 65세의 백발 투사, 강우규

한의사로 활동하며 재산 모아 민족 계몽운동에 앞장
3.1운동 이후 최초의 의열투쟁…사이토 조선총독에게 큰 경고
희망 잃은 민중들에게 무장투쟁이라는 새로운 민족운동 방향 제시

강우규 그래픽 .jpg

 

[편집자주]  본란에서는 2022년 8월15일 광복 77주년을 맞아 독립운동 한의사들의 삶을 조명하고 의미를 되새겨 본다.


“미운 마음은 없습니다. 입장을 바꿔보면 강우규는 우국지사였습니다.”

 

수십 년에 걸친 재일 사학자들의 노력으로 밝혀진 총독부 증언록에 따르면, 지바 경기도 경찰부장은 강우규 의사에 대해 이같이 평가한 것으로 확인됐다. 독립운동가를 검거했던 일본 경찰 관계자조차 일종의 경외감을 느꼈다는 고백인 것이다.

 

또한 대판매일신문 1919년 9월3일자 11면에 따르면 일제는 서울역에서 사이토 조선 총독을 저격한 강우규 의사 의거를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안중근 의사 의거 이후 중대사건으로 보도하기도 했다.

 

이처럼 강우규의 의거는 3.1운동 이후 최초의 의열투쟁으로서 조선총독으로 부임하는 사이토에게 큰 경고가 됐음은 물론, 국내외 한인들의 민족의식 고취에 크게 기여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총독 암살에는 실패했지만 그 곳에 모인 일제관리 등 37명에게 중경상을 입히는 등 3.1운동 이후 희망을 잃은 국내외 민중들에게 ‘무장투쟁’이라는 새로운 민족운동의 방향을 제시했다.

 

특히 그는 재판과정과 수형생활, 처형과정에서도 당당한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재판과정 자체가 운동의 연속선상으로 후대에까지 큰 감동을 주고 있다. 그는 사형 집행 당시 ‘감상’을 묻는 일제 검사의 질문에 “단두대 위에 홀로 서니 봄바람이 감도는구나, 몸은 있어도 나라가 없으니 어찌 감상이 없으리오”라는 말을 남기며 마지막까지 기개를 굽히지 않았다고 한다.

 

◇생애 초기

강우규는 1855년 7월 평안남도 덕천군에서 가난한 농가 4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본관은 진주, 호는 왈우(曰愚)이다.


그는 훤칠하고 당당한 체구에 큰 절의가 있었으며 집안이 매우 가난했지만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고 한다. 어려서부터 한학과 한의학을 공부해 한의사로 활동하며 생계를 꾸려 나간 것으로 보인다. 이후 함경남도 일대에서 한약방을 운영하며 상당한 재산이 모이자 사립학교와 교회 등을 세워 민족 계몽운동에 앞장섰다.

 

1909년에 단천 출신의 유명한 독립운동가인 이동휘 선생을 만나 55세의 나이에 민족의식에 눈을 떴다.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선생은 50대 초로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1911년 북간도 두도구(頭道溝)로 이주해 독립운동에 여생을 바칠 것을 결심한다. 이 시기에 박은식, 이동휘, 계봉우 등 많은 애국지사들과 만나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1차 세계대전 발발 후 연해주 일대에서 한국인들의 독립운동이 어렵게 되자 선생은 길림성 요하현으로 이주해 터를 잡고 이곳을 ‘신흥동(新興洞)’이라 명명했다. 선생의 노력으로 신흥동은 불과 1년여 만에 100여 호가 넘는 한인마을로 성장, 만주 각지의 독립운동을 연결하는 거점이 됐다.

 

1917년 봄 신흥동에 광동학교(光東學校)를 설립하고 교장으로 취임해 민족교육을 실시했다. 이외에도 30년간 홍원에 영명학교와 교회, 러시아 이만(Iman)에 협성학교(協成學校)와 조선민회(朝鮮民會), 만주 요하현 신흥동에 조선민회, 블라디보스토크에 교회와 노인단, ‘밋가루시카’ 등 학교 6개, 교회 3개, 민회 2개를 설립하여 전도와 민족교육에 힘썼다.


◇사이토 총독 저격 사건

이후 강우규는 국내정세를 파악하기 위해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新韓村)으로 건너갔다. 그곳에서 그는 이승교 등 환영식 소식과 함께 2대 총독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가 곧 경질될 것이라는 소식을 들었다. 이 소식을 들은 그는 신임총독을 처단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먼저 자신이 살던 신흥동 근처 청룡(靑龍)에서 러시아인에게 영국제 수류탄 1개를 구입했다. 

 

1919년 9월2일. 서울역(당시 남대문역) 앞은 새로 부임해 오는 사이토 마코토 조선 총독을 맞이하는 환영행사를 위해 1천여 명의 사람들이 운집해 있었다.총독 도착 예정시간은 오후 3시였으니 두 시간이나 넘게 기다려야 했다.

 

강우규는 폭탄을 명주 수건에 싸서 허리에 단단히 붙잡아 맨 뒤, 그 위에 저고리와 두루마기를 입어 손을 넣으면 쉽게 폭탄을 꺼낼 수 있게 만들었다. 그리고 허형과 함께 남대문 밖 중국 요리점에서 점심을 같이한 뒤, 단신으로 미리 보아 둔 거사 위치로 향했다. 마침내 사이토 일행이 오후 5시 남대문역에 도착했고, 그는 환영 행사를 마치고 막 관저로 떠나는 사이토의 마차를 향해 폭탄을 힘껏 던졌다. 이로 인해 광장은 아수라장이 됐다.

 

현장에서는 37명의 중경상자가 나올 정도였으나 사이토는 해군 군복을 입은 덕에 파편이 혁대에 부딪혀 군복을 태우는 데 그쳤다. 폭탄이 조금만 더 앞으로 가서 떨어졌더라면 사이토는 무사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 후 중상자 중 장기 손상과 패혈증 등으로 경기도 순사 스에히로를 비롯한 3명이 사망했다.


◇생애 후기

선생은 재차 거사를 계획하다 의거 16일 만인 9월 17일 서울 가회동 하숙집에서 한국인 순사 김태석에게 잡혔다.

 

1920년 2월 25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사형을 선고 받았고, 이후 경성복심법원에 항소했다. 그의 항소는 같이 거사에 연루돼 고생하는 동지 최자남·허형·김종호 등을 변호하기 위해서였고, 나아가 의거의 진정한 뜻을 널리 알리기 위한 것이었다.

 

4월 26일 경성복심법원에서도 사형을 선고 받아 경성고등법원에 상고했으나, 5월 27일 기각되어 사형이 확정됐다.

 

강우규 의사의 모습이 신문을 통해 알려지자 일제와 국내외 독립운동가들은 물론 많은 사람들이 놀랐다고 한다. 의거의 주인공이 64세 백발노인이었기 때문이다. 강우규의 의거는 우리 의열투쟁사에서 최고령으로 기록되고 있다.

 

“내가 죽는다고 조금도 어쩌지 말라. 내 평생 나라를 위해 한 일이 아무 것도 없음이 도리어 부끄럽다. 내가 자나 깨나 잊을 수 없는 것은 우리 청년들의 교육이다. 내가 죽어서 청년들의 가슴에 조그마한 충격이라도 줄 수 있다면 그것은 내가 소원하는 일이다.” 1920년 11월 강우규 의사가 서대문형무소에서 사형되기 전 아들 중건에게 남긴 유언이다.

 

정부는 독립운동의 큰 줄기를 이루는 구국 의열 투쟁의 효시가 된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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