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權近의 鄕藥醫學論
權近(1352~1409)은 고려 말에서부터 조선 초기까지 학문으로 이름을 떨친 인물로 의학에도 남다른 업적을 남겼다.
1368년(공민왕 17)에 성균시에 합격한 후로 이듬해 급제하여 춘추관검열, 성균관직강, 예문관응교 등을 역임하였고, 공민왕이 죽은 후로는 鄭夢周, 鄭道傳 등과 함께 排元親明을 주장하여 정치적 색깔을 분명히 하기 시작하였다.
조선 개국 후로는 藝文館大學士, 중추원사 등을 지냈고, 1396년에는 명나라에 다녀오기도 하였다. 그는 당시 조선을 대표하는 학자로서 국제적으로도 이름이 있었다.
그는 『鄕藥濟生集成方』의 序文을 지어 鄕藥醫學을 선양하고자 하였다.
“……우리나라는 중국과 멀리 떨어져서 이 땅에서 생산하지 않는 약은 구하기 어려운 것을 몹시 걱정하였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우리나라 풍속이 흔히 한 가지 풀을 가지고 한 가지 병을 고치는 데 특효를 본다. 그 전에 三和子의 『鄕藥方』이 있었는데, 아주 간단한 요령만 뽑아 놓아서 보는 사람들이 너무 略式으로 된 것이 결점이라 하였는데, 요전에 현 判門下 權仲和가 徐贊이란 사람을 시켜 거기다 여러 방문을 보태게 해서 『簡易方』을 만들었으나, 그 책이 세상에 많이 퍼지지 못하였다.……또 五方은 모두 제각기 타고난 성질이 다르고 천리를 넘어서면 풍속이 같지 않는 법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평시에 음식을 좋아하는 것이 시고 짜고 차고 더운 것이 모두 각각이니, 병이 나서 약을 쓰는 것도 다 다를 것이고, 반드시 중국 방문과 꼭 같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하물며 먼 곳의 물건을 구하여 얻지 못한 채 병은 벌써 깊이 들었는데 혹시 많은 값을 주고 구했다 하여도 그 물건이 오래되어 썩고 좀이 나서 약기운은 다 나갔으니, 그 지방에서 산출하는 물건의 기운이 그대로 있는 것만큼 좋지 못하기 때문에, 鄕藥을 가지고 병을 고치는 것이 반드시 힘은 적게 들고 효력은 빠른 것이다.
이 방문이 생김으로써 백성에게 혜택이 돌아가는 것이 어떻다 하겠는가. 傳에 이르기를, ‘上醫는 나라도 고친다.’ 하였으니 … 정치에 전념한 나머지 더욱 백성을 활발하게 하여 나라의 맥박을 튼튼하게 할 것을 생각하니, 백성을 사랑하는 정사와 나라를 풍족하게 하는 도가 본말이 아울러 시행되고 대소가 모두 구비되어 의약으로 질병을 치료하는 일까지도 정성을 다하였다.
백성을 보호하고 배양하기를 이토록 지극하게 하니, 그 나라를 고치는 일이 크도다. 어진 정사가 한 시대에 덮이고, 은택은 만세에 내려갈 것을 어찌 쉽사리 헤아릴 수 있겠는가.” (한국고전종합DB의 번역을 좇음)
위의 글을 통해 權近의 향약에 대한 관점을 엿볼 수 있다.
첫째, 의학사적 맥락에서 향약의 활용을 정리하고 있다. 『향약제생집성방』이 조선이 건국한 이후 간행된 것을 동아시아 의학사의 전체적인 맥락에서 필연적 귀결임을 강변하고 있는 것이다.
둘째, 한국의학의 독자성을 향약의학에서 찾고 있다. 중국의학과 다르게 한국의학은 독자적인 전통 속에서 번쇄한 치료법보다 간결한 치료체계로 정평이 나 있다는 것으로서 이것은 『향약제생집성방』 서문의 “우리나라 풍속이 흔히 한 가지 풀을 가지고 한 가지 병을 고치는 데 특효를 본다”라는 것을 통해 알 수 있다.
셋째, 향약의술의 爲民的 측면이다. 향약의학은 태생적으로 簡易醫學的 측면이 강한데, 그 중심에는 백성들이 있다. 이것은 제왕은 백성들을 건강하고 부유하게 만들어주어야 할 의무를 가지고 있다는 유교적 국가주의와 일맥상통하는 것으로서 『향약제생집성방』의 완성은 이러한 목표에 한걸음 더 나아가는 것이 되는 것이다.
<-향약제생집성방서가 실려 있는 양촌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