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李瀷의 醫論
李瀷(1681〜1763)은 이황의 철학사상을 계승한 남인계열의 학자이다. 理氣二元論的 세계관으로 天圓地方說을 비판하고 地轉說을 비판할 만큼 신진 사조에 개방적이었고, 당쟁에 대해서 비판적이었으며, 民本과 愛民의 정치를 주장하였다.
李瀷의 저술 『星湖僿說』16권 人事門에 ‘醫’라는 제목의 아래와 같은 글이 있다.
“시속의 말에, ‘병이 사람을 죽이지 못하고 약이 사람을 살리지 못한다.’ 했다. 그러나 실상은 병이 사람을 죽이고 약이 사람을 살리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삼가하라는 경계와 의약으로 치료하는 처방이 어디로 좇아 나가겠는가? 무릇 서울에는 의원과 처방이 수없이 모인 곳이다. 병이 들면 곧 의원을 찾고 의원을 찾으면 곧 약을 쓰게 되는데, 차도가 없으면 병으로 돌리고 차도가 있으면 의술로 돌리므로, 그 차도가 있을 때에는 이 약이 아니었다면 벌써 죽었으리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시골의 실정을 체험해 보면 병의 경중을 막론하고 거의 약을 쓰지 않고 방치해 둘 뿐이다. 응당 살아날 사람도 약을 쓰지 않았기 때문에 죽었다고 생각하는 자가 많다. 그러나 서울에 장수하는 자가 많은 것이 아니고 시골에 단명한 자가 많은 것이 아니다. 그 가운데에는 방치해 둔 자가 건강하고 치료에 힘쓴 자가 죽는 일이 있으니, 이는 의원이 이익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가끔 명을 재촉하게 하는 일도 있으므로 치료하지 않는 것이 중간 의원은 된다는 것이다. 이는 다름이 아니다. 병에 깊고 얕음이 있고 약에 우열(優劣)이 있으며, 의술(醫術)이 그 요점을 잃는 때문이다. 열기(熱氣)가 극도에 이르면 한기(寒氣)와 같고 한기가 극도에 이르면 열기와 같으니, 이를 알지 못하고 함부로 약을 쓰면 도리어 사람을 죽이는 것이다. 그 요점을 아는 자의 말에, ‘애당초의 화제(和劑)는 그 처방이 세 가지에 지나지 않았다. 기(氣)에는 사군자탕(四君子湯)을 쓰고, 혈(血)에는 사물탕(四物湯)을 쓰며, 담(痰)에는 이진탕(二陳湯)을 썼는데, 모두 한 처방에 네 가지 약이 들어 있다.
그런데 후인들이 군ㆍ신ㆍ좌ㆍ사(君臣佐使) 법을 가감하여 경하고 중한 허다한 약재만을 썼을 뿐, 진찰을 정밀히 하지 않고 약쓰는 것을 살피지 않아, 약재를 조합하는 것은 많고 가리는 것은 적으며 근본을 버리고 겉을 다스리므로 8~9할(割)은 허망된 것이다. 넓은 산야(山野)에서 토끼 한 마리를 잡으려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하였다. 나는 서적들이 많아지므로 유도(儒道)가 쇠퇴하고 의서(醫書)가 번잡해져서 방술이 미혹되었다고 생각한다. 정밀히 살피고 가리지 못하고는 의술이 무익(無益)하다고 하는 것은, 물이 불을 이기지 못한다는 말과 똑같은 것이다.”(한국고전종합DB의 번역문 全載)
李瀷의 ‘醫’라는 글의 내용을 정리할 수 있다.
먼저, 의학 수준을 가늠하고 있다. “병에 깊고 얕음이 있고 약에 우열(優劣)이 있으며, 의술(醫術)이 그 요점을 잃는 때문이다.”, “8~9할(割)은 허망된 것이다.”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의술의 수준이 치료에 있어서 중요한 포인트임을 밝히고 있다. 이익이 생존했던 조선 후기에는 이양법 등 생산력의 증강으로 서민들의 경제력이 상승된 시기이다. 이에 따라 이 무렵 의학 시장은 팽창되어 의학에 입문하는 사람들이 다양해지면서 의술의 수준이 들쑥날쑥하게 되는 과도기적 상황이 발생하게 된다.
둘째, 儒道와 醫學의 성쇠를 같은 궤의 틀에서 논하고 있다. “나는 서적들이 많아지므로 유도(儒道)가 쇠퇴하고 의서(醫書)가 번잡해져서 방술이 미혹되었다고 생각한다.”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李瀷은 儒道와 醫學을 같은 궤에서 성쇠가 이루어진다고 인식하고 있다. 즉 유도가 서적들이 많아져서 즉 잡설들이 많아짐으로서 쇠퇴하게 되었고, 의학은 의서가 번잡해서져서 방술 즉 처방하는 기술이 미혹되게 되었다는 것이다.
<- 이익이 지은 성호사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