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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02월 03일 (화)

醫史學으로 읽는 近現代 韓醫學 (539)

醫史學으로 읽는 近現代 韓醫學 (539)

이명래고약과 근현대 한의학 역사 이야기
“미래 한의학 외과술의 새로운 가능성의 문을 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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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일 교수 경희대 한의대 의사학교실


 

‘이명래고약’이라는 말을 들으면 50대 중반 이상의 사람들은 추억이 떠오를 것이다. 필자도 어린 시절 피부에 종기가 없어지지 않아 이 고약을 발라서 치료했던 기억이 있다. 어림잡아도 한 10번은 되었던 것 같다. 아마 이 글을 읽는 50대 중반 이후의 한의사들은 대부분 비슷한 기억을 갖고 있을 듯하다.


이명래고약은 근현대 한의학 역사의 핵심 아이콘의 하나였다는 점에 대해서 부정하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이 고약은 독특한 탄생 배경과 확산 동인, 사멸 과정이라는 독특한 역사적 승강부침을 통해 ‘과거 역사적 추억’이라는 국민적 공통 기억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한의신문 1991년 6월10일자에 ‘杏林街’라는 코너가 운영되어 한의사와 인터뷰를 한 기사가 나온다. 여기에 李光眞 명래한의원 원장과의 인터뷰 기사가 나온다. 인터뷰 내용을 보니 이명래고약을 만들어서 전국적으로 유명했던 이명래고약집의 가업을 계승한 이명래 원장의 둘째 사위로서 명래한의원의 이광진 원장을 소개한 기사였다.


이광진 원장은 보성전문 법학과를 졸업한 후 이명래 원장(1890〜1952, 해방 이후 미군정기에 醫生면허증 취득하여 한의사로 활동)의 둘째 사위로 들어가 경희대 한의대를 6기로 입학하여 1957년 졸업 후에 명래한의원에서 한의사로 활동하면서 이명래고약을 위주로 한 외과술로 한의술을 펼쳤다. 이광진 원장은 1996년 세상을 떠났고 이후 이광진 원장의 사위인 임재형 원장(경희대 한의대 21기)이 명래한의원을 이어받아 진료하였고, 2011년 한의원은 문을 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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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래 원장의 사위 이광진 원장의 기사가 나오는 한의신문 1991년 6월10일자 기사.

 이명래 선생은 1890년 출생 후 천주교박해가 불어닥치자 명동성당의 한 외국인 신부의 주선으로 충남 아산군 인주면 공세리에 있는 한 성당 부근으로 아버지를 따라서 이주하게 되었다. 여기에서 공세리의 성당에 있는 성 신부라고 불린 프랑스인 선교사를 만나게 되는데, 이 신부는 자연과학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었으며 한의학에 대해서도 상당한 지식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이 프랑스 신부는 한문으로 된 의서와 라틴어로 된 의서를 지니고 다니면서 의료로 선교 활동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명래 선생이 성 신부를 만나서 프랑스 신부의 고약의 원천 제조법을 전수받게 되어 1906년 무렵이 되어 직접 고약을 직접 조제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성 신부의 한의학을 기반으로 하는 고약의 조제법과 치료법은 매우 뛰어나 수많은 부스럼환자들을 완쾌시켰고, 이러한 조제법과 치료법은 이명래 선생에게 그대로 전수된 것이다.


훗날 이 고약을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에서 ‘이명래고약’이라고 이름붙이고 생산, 판매해서 문전성시를 이루게 된 것이다. 필자도 어린 시절 약국에 가서 이명래고약을 샀던 기억이 있었다. 한번은 초등학교 시절 시중에 떠도는 가짜 이명래고약을 모르고 사서 친구 형님 심부름으로 사다 주었다가 효과가 없어서 그 형님이 외과 수술 받았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던 기억도 있다. 그 때 진짜배기 이명래고약이 과연 효과가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가짜배기를 만들어 판매한 어른들을 속으로 원망하기도 했다.


추억의 타래 속에 고이 간직되어 있는 이명래고약을 사본 경험도 50년도 더 지난 옛 기억으로만 남아 있다. 그러나 근현대 한의학의 역사 속에 숨어 있는 보배로운 기억은 오늘도 고약이라는 미래 한의학 외과술의 새로운 가능성의 문을 두드리는 힘찬 손짓으로 연결시켜주고 있다. 언젠가는 다시 열릴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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