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학의 발전은 정부의 의지에 달려 있다”
任元濬의 醫學便宜論

[한의신문] 1任元濬(1423~1500)은 萬百姓들에게 도움이 되는 醫書 編纂에 매진한 儒醫로 평가된다. 그는 1456년 을과로 급제해 집현전부교리가 됐고, 이후에 호조·예조·병조·형조 등 4조의 참판, 예조판서와 의정부좌·우참찬 등을 역임했다.
그는 風水地理와 卜筮, 醫學 등에 뛰어났고, 특히 그의 뛰어난 의술로 인해 이미 名醫로 언급되고 있다. 世祖가 心醫, 食醫, 藥醫, 昏醫, 狂醫, 妄醫, 詐醫, 殺醫 등 8종의 의사를 품평한 ‘醫藥論’을 지어 任元濬에게 주해를 부탁해 반포한 것을 볼 때 세조가 그의 의학적 능력을 깊이 신임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몇 개의 醫書의 편찬에 관여했다. 특히 『瘡疹集』은 그의 역작이라 할 것이다.
『조선왕조실록』 단종 1권 즉위년 5월25일 조문에서 다음과 같은 대목을 발견하게 된다(http://sillok.history.go.kr/main/main.do에서 따옴. 넘버링은 필자가 설명의 편의를 위해 임의대로 붙임).
“行副司正 任元濬이 의학의 便宜를 조목조목 진달했다.
① 두세 문신으로 하여금 의학의 가르침을 나누어 맡게 하되 英敏한 무리들을 택하여 방서와 경문을 읽게 하고, 또 內醫 등으로 하여금 읽게 하여 四孟月에 재주를 시험하여 黜陟에 빙거하소서.
② 여러 도의 좌우 界首官이 의국을 설치하여 약을 제조하여서 팔게 하소서.
③ 唐藥을 덜 쓰고 새로 鄕藥을 써서 혜택을 베푸소서.
④ 다시 鍼灸專門의 법을 세워서 항상 익히게 하여 침과 약을 아울러 쓰소서.”
任元濬이 의학의 便宜에 대해 의견을 올린 것은 조선의 개국 초기부터 이뤄진 의학의 학술 진흥의 흐름을 이어서 백성들에게 구체적으로 도움이 되는 방안을 만들어내겠다는 실천적 측면이 강하다. 아무래도 이러한 의견은 실천방안이 구체적으로 제시될 필요가 있다고 보았기 때문에 조목으로 정리해서 내놓은 것이리라.
이 네 가지 의견을 따져볼 필요가 있다.

①의 의견은 의술의 수준을 학술적 바탕을 갖춘 학문적 경지로 격상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의학에 테크닉적으로만 뛰어난 것으로 뛰어난 의사라고 말할 수 없으며, 뛰어난 의사라면 이를 뒷받침하는 학술적 논리도 가지고 있어야 하고 또 이를 학리적으로 승화시켜 학식으로 쌓아갈 수 있는 능력도 키워주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인 것이다. 아울러 “內醫 등으로 하여금 읽게 하여 四孟月에 재주를 시험하여 黜陟에 빙거하소서”는 평가제도를 적용시켜 학문에 매진하도록 독려하자는 것이다.
②는 백성들에게 의학의 혜택이 충분히 베풀어지도록 국가에서 나서자는 것이다. 계수관이란 조선 초기에 있었던 지방제도의 한 형태로, 행정구역을 의미하는 대읍 혹은 그곳의 수령을 지칭한다.
③은 중국 중심의 약물 지식과 약물 공급체계로부터 벗어나 조선 독자적인 약물 지식과 약물 공급체계를 갖춰 의학의 독립체계를 이루어보자는 자주성에 대한 선포이다. 이러한 노력들은 고려시대 향약의학의 번성과 조선 세종시기 『鄕藥集成方』, 『醫方類聚』 등 서적들의 출판과 향약의 장려책 등으로 충분히 분위기 고양은 이루어진 상태였지만 이를 실현해내기 위한 사회경제적 환경의 조성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상황이었던 것이다. 임원준은 이것이 중앙정부의 강력한 의지가 수반된 정책적 결단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음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④는 침구학의 부흥에 정부 차원에서 나서야 한다는 것을 강변하고 있는 것이다. 鍼灸學 專門醫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이전 세종시기에 黃子厚(1363~1440)에 의해 제기돼 시행되기도 했지만 이 시기보다 더 강력한 의지가 필요하다고 본 것이었다.
김남일 교수·경희대 한의대 의사학교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