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호철 교수
경희대 한의과대학 본초학교실
[편집자주]
본란에서는 김호철 교수(경희대 한의대 본초학교실)의 ‘과학으로 보는 한약 이야기’를 통해 임상 현장에서 자주 제기되는 한약의 궁금증과 문제들을 하나씩 짚어가며, 최신 연구 결과와 한의학적 해석을 결합해 쉽게 설명할 계획이다. 이 과정에서 독자들이 기존의 한약 지식을 새롭게 바라보고, 실제 진료 현장에서 유용하게 활용할 만한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대황, 단순한 사하약을 넘어
한의학에서 대황(大黃)을 떠올리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는 역시 사하, 즉 변비 치료일 것이다. 그러나 대황이라는 약재는 단순히 변비를 치료하는 약물이라는 좁은 개념을 훨씬 뛰어넘는다. 대황은 사하라는 효능만 제외하면 청열약으로 분류될 수 있을 만큼 청열사화(淸熱瀉火), 청습열(淸濕熱), 청열량혈(淸熱凉血), 청열해독(淸熱解毒) 등의 효능을 가지고 있다. 또 활혈거어(活血祛瘀) 효능도 강하다.
실제로 대황목단피탕, 인진호탕, 도인승기탕 등은 모두 사하보다는 청열과 활혈의 효능을 중심으로 활용된 예이다. 그래서 임상에서 대황을 제대로 활용하기 위해서는 사하약이라는 고정관념을 벗어나 청열, 활혈, 해독 등 다양한 효능을 충분히 이해하고 활용해야 한다.
대황이 임상에서 흥미로운 점은 똑같은 약재임에도 불구하고 환자의 체질, 사용한 대황의 종류, 그리고 끓이는 시간과 포제법에 따라 효능이 현저히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 현상을 탐구해보면 과학적 원리와 전통적 지혜가 정교하게 어우러져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왜 어떤 사람은 대황이 듣고, 어떤 사람은 듣지 않을까
– 사하 작용의 열쇠는 장내 미생물
대황은 누구에게나 변통을 터뜨리는 사하약으로 알려져 있지만, 임상에서는 예상과 다른 일이 종종 벌어진다. 같은 대황을 복용해도, 어떤 사람은 단번에 사하작용이 나타나는 반면, 어떤 사람은 아무런 변화가 없다며 “약발이 안 먹힌다”고 호소한다.
이런 차이는 흔히 체질 탓으로 돌려지지만, 최근 연구들은 보다 구체적인 생물학적 설명을 제시한다. 결정적 변수는 장내 미생물의 구성, 그중에서도 대황 속 센노사이드를 활성화시키는 세균이 얼마나 존재하느냐에 달려 있다.
대황의 주성분인 센노사이드 A와 B는 위와 소장에서 흡수되지 않고 대장까지 살아서 도달해야 진짜 약으로 전환되는 프리드러그(pro-drug)이다. 이 분자는 장내 미생물이 가진 베타글루코시다아제와 환원효소의 도움을 받아야 비로소 레인 안트론(rhein anthrone)이라는 활성 대사체로 바뀌며, 이때부터 수분 분비 증가와 장 연동운동 촉진을 통해 사하 작용이 시작된다.
따라서 장내 미생물층이 풍부하고, 특히 센노사이드를 분해할 수 있는 특정 균주와 효소 활성이 충분한 사람은 대황 복용 후 비교적 빠른 배변 효과를 경험할 수 있다. 반면 항생제 복용, 스트레스, 식이 습관의 문제, 또는 해당 균이 부족한 경우에는 이 전환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아무런 효과가 없을 수 있다. 이 같은 반응 차이는 단순한 장 건강의 문제라기보다, 개인의 장내 세균 생태계와 반응 민감도의 복합적 결과다.
또한 흔히 간과되지만, 대장내시경이나 건강검진 전 시행하는 장 세척 이후에도 대황의 효과는 현저히 감소한다. 인위적으로 장을 비운 이후에는 장내 미생물의 대부분이 일시적으로 씻겨나가기 때문에, 아무리 대황을 복용해도 그것을 약으로 바꾸어 줄 ‘효소 공장’이 사라진 상태이기 때문이다. 검사 직후 대황을 복용했는데도 아무 반응이 없었다는 사례는 이런 배경에서 설명된다.
이 같은 개인차의 생물학적 근거를 밝힌 대표적인 연구가 바로 일본의 고바시(Kobashi) 연구진의 실험이다. 그들은 사람의 장내에서 분리한 수많은 균주 중, 오직 Bifidobacterium dentium과 B. adolescentis만이 센노사이드를 효과적으로 절단해 활성 대사체를 생성할 수 있음을 밝혀냈다.
이 균주들이 존재할 때는 센노사이드 함량이 감소하고, 레인 안트론 농도와 배변 빈도가 눈에 띄게 증가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센노사이드는 거의 변화 없이 배설됐다.
결국, 체질이라는 말로 뭉뚱그려졌던 사하 반응의 유무는 사실상 보이지 않는 체질, 즉 개인의 장내 미생물 생태계에 의해 결정된다. 대황은 누구나 복용할 수 있지만, 그것을 약으로 바꿔줄 세균이 없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이는 약의 효과가 미생물이라는 생물학적 조건 위에 놓여 있음을 보여준다.
왜 대황은 바로 듣지 않을까?
– 사하 작용까지 걸리는 시간의 과학
대황을 먹으면 곧바로 배변이 시작될 것처럼 기대하는 경우가 많지만, 실제로는 복용 후 수 시간의 지연이 일반적이다. 어떤 사람은 6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또 어떤 사람은 다음 날 아침이 되어서야 그 효과를 체감한다.
그 이유는 앞서 언급했듯, 대황의 센노사이드는 즉시 작용하는 자극제가 아니라, 대장에 도달한 뒤 장내 미생물의 효소 작용을 통해 비로소 활성화되는 프리드러그이기 때문이다. 복용, 소화기관 통과, 대장 도달, 미생물 분해, 활성 대사체 전환, 약리 작용 발현이라는 단계를 거쳐야 하기 때문에, 평균 6~12시간, 짧아도 4시간 이상이 걸리는 것이 자연스럽다.
이런 이유로 대황은 저녁에 먹고 다음 날 아침 효과를 본다는 방식으로 흔히 사용된다. 만약 복용 후 즉각적인 반응이 없다 하더라도, 그것은 약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몸 안에서 약으로 바뀌는 시간이 필요한 것일 뿐이다.
게다가 이 시간은 사람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장의 운동성이 느리거나, 장내 미생물층이 약해진 사람, 예를 들어 항생제 복용 중이거나 장청소를 받은 경우는 대황을 복용해도 사하 작용이 거의 나타나지 않거나, 반응 시간이 매우 늦어질 수 있다. 실제로 장내 미생물이 거의 사라진 상태에서는 센노사이드가 전환되지 못해 그대로 배설되기도 한다.
결국 대황의 사하 작용은 약초 단독의 효과가 아니라, 장내 미생물과의 협업을 통해 완성되는 생물학적 과정이다. 이 지연은 실패가 아니라 과정이며, 우리 몸 안에서 약이 천천히 만들어지는 시간이다. 대황은 단순한 자극제가 아니라, 몸속 생태계와 소통하며 작용하는 복합적인 한약재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다음 연재 예고
– 대황,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 품종·전탕·포제가 바꾸는 약효의 방향
이 글에서 살펴본 것처럼, 대황은 단순한 사하약이 아니라 사람마다 다르게 반응하는 섬세한 한약재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2부에서는 같은 ‘대황’이라는 이름을 가졌지만, 실제로는 전혀 다른 약효를 내는 금문대황계와 종대황계의 결정적 차이, 그리고 끓이는 시간과 포제 방식에 따라 완전히 다른 약으로 바뀌는 대황의 변신 메커니즘을 자세히 다룰 예정입니다.
대황을 단순히 ‘센노사이드가 들어 있는 약’으로 보는 관점에서 벗어나, 품종, 조제, 포제를 통합적으로 이해하는 한의학적 통찰과 과학적 근거를 함께 소개드리겠습니다.
하나의 한약재, 그러나 전혀 다른 쓰임. 2부에서 그 다채로운 얼굴을 확인해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