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갑산한의원 이상곤 원장의 조선 왕조와 한의학 10 - 중종(1)
대장금(大長今)은 중종(中宗·488~1544, 재위 1506~1544)이 가장 신뢰하고 의지하면서 내밀한 문제까지 치료를 맡긴 여의(女醫)였다. 유학자의 세상 그 것도 남성위주의 조선사회에서 여의 대장금은 어떻게 중종의 신뢰를 얻었을까. ‘조선왕조실록’은 치료에 관한 세세한 부분은 밝히지 않았으나 대장금이 중종과 얼마나 밀착해 그의 총애를 받았는지에 대해선 기록을 남겼다.
여의가 처음 생겨난 때는 태종 6년 허도가 건의했다. “그윽이 생각건대 부인이 병이 있는데남자의원으로 하여금 진맥하여 치료하게 하면 혹 부끄러움을 머금고 나와서 그 병을 보이기를 즐겨하지 아니하여 사망에 이르게 됩니다. 원하건대 창고(倉庫)나 궁사(宮司)의 동녀(童女) 수십명을 골라 ‘맥경脈經)’과 침구(鍼灸)의 법을 가르쳐서 이들로 하여금 치료하게 하면 거의 전하의 살리기를 좋아하는 덕에 보탬이 될 것입니다.”
女醫의 지위는 역대 왕의 관심도에 따라 부침 심해
태종이 제생원(濟生院)에 명해 동녀에게 의약을 가르치게 한게 여의의 시작이다. 교육을 마쳐도 여의가 되는건 극소수에 불과해 태종 18년 기록에 따르면 7명에 그쳤다. 의녀는 그 능력에 따라 내의녀, 간병의녀, 초학의녀 등 세 등급으로 나뉘었고 수업연한은 3년 이었다. 내의녀는 진료와 치료를 전문으로 한 사람이다. 간병녀는 간병을 주로 담당했는데 여기엔 조산의 역할이 포함됐다. 초학의녀는 간병하지 않고 학업에만 전념했다.
여의의 지위는 역대 왕의 관심도에 따라 부침이 심했다. 전문성을 위주로 진료하는 여의들을 창기(娼妓)와 같은 자리로 끌어내린건 연산군이다. 연회에 내의원 의녀를 부르면서 ‘약방기생’으로 만든 것이다. 이후 사대부의 잔치나 관원들의 유희 대상으로 전락하면서 여의의 제자리 찾기는 큰 어려움을 겪는다.
그런데 의녀에 대한 중종의 대우는 파격적이다. 중종 5년엔 연산군때 생긴 폐습을 없애려고관원의 연회에 의녀를 부르는 것을 엄금하는 법을 만들었다. 이는 아마 중종과 밀접했던 장금의 건의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기강이 한번 무너지면 복구하기 힘든건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한류(韓流)의 중심드라마 ‘대장금’. 조선조 당시 여의에 대한 일반적 시각에서 보면 드라마 내용이 과장되지 않았느냐는 지적이 나왔다. 중종과 장금에 대한 기록은 1515년 중종 10년3월8일에 처음 나타난다. 중종의 계비 장경왕후가 그해 2월25일 원자인 인종을 생산하고 위독해 졌다가 숨을 거둔다.
이때 장금은 인종마저 위독해지는 상황에서 그를 살리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한다. 하지만 관례대로 대간은 장경왕후의 죽음에 대한 책임소재를 밝히며 벌을 주라고 건의한다. “의녀장금의 죄가 의원 하종해보다 더 심하다.” 하지만 중종은 그 건의를 물리친다.
1533년 1월 9일 중종은 종기를 앓아 고생한다. 이때 내의원은 장금에게 치열한 ‘견제구’ 를던진다. 내의원 장순손은 말한다. “대체로 종기를 앓을 때는 젊은여자로 하여금 가까이 모시게 해서는 안됩니다. 종기가 터진 후에도 더욱 부인들을 기피해야 미더운 일입니다”라면서 장금의 접근 자체를 막고 나선다.
그런 견제 때문이었는지 장금의 진료기록은 중종의 죽음 문턱에서야 나타난다. 실록에 장금에 대한 기록이 몇 차례 나타나지만 의료와 관련해 분명한 사실은 중종 39년 10월 26일의기록이다. “상에게 병환이 있었다.” 중종이 미리 문안하지 말라고 한 탓인지 정원이 미안해하면서 문안하고 증세를 묻는다. 중종은 건조한 말투로 대변이 어려워서 처방을 의논 하고있다고만 말한다.
이어서 나온 기록은 놀랍다. 다름아니라 내의원 제조가 묻는 것이다. 내의원 제조는 알다시피 임금의 진료를 담당하는 자리다. 의료 총괄책임자가 임금의 증세를 진료하는게 아니라 되레 문안하는 자리로 역전되면서 장금에게 증세를 물어본 것이다. 중종은 답한다. “내 증세는 여의가 안다.” 여기서 여의는 장금이다.
더욱 놀라운 기록이 이어진다. 당시 중종이 앓은 질병은 산증(疝症)이다. 산증은 하복의 통증이 위로 치받쳐 오르는 것이다. 중종은 자신의 병에 대해 설명한다. “요즈음 날씨가 갑자기 한랭해져서 많은 한기가 배로 들어가서 냉기가 쌓여 대소변이 편안하지 못하다.” “그날밤 장금이 나와서 말하기를 지난 밤 왕이 삼경에 잠이들고 오경에 다시 잠이들고 소변을 보았으나 대변은 삼일째 불통이다.”
밤을 새우며 진료한 사람은 바로 의녀 장금이었던 것이다. 의관들은 증세에 맞춰 여러날에 걸쳐 반총산이란 처방을 투여한다. 하지만 차도가 없자 극적인 처방을 구사한다. 밀정(蜜釘)을 사용한 것이다. 밀정은 밀전도법을 이야기 한다. 관장법을 통해 대변을 배출하는 것이 다. 피마자 기름이나 통유탕 등 대변을 보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하다 직접 관장을하게된 것은 임금과 장금의 관계를 잘 설명해 준다.
산증(疝症) 앓은 중종, 장금이 밀정(蜜釘) 사용 치료
10월 29일실 록은 임금이 대변을 통했다고 기록했다. 장금은 이렇게 가장 내밀한 부분까지 치료하면서 왕을 모신 유일한 의녀였지만 이후 역사 어디에도 그에 관한 기록은 없다.
제주도 의녀들의 기록은 특별히 기록돼 있다. 세종 13년 제주 의녀 효덕은 안질과 치통을 잘치료해 세종이 쌀과 장 등을 하사했다는 기록이 있다. 실록엔 성종 23년에 임금이 치통을앓자 이비인후과의 유명한 의사를 초빙하라는 명을 내린다. 치통치료에 일가견을 지닌 제주 의녀 장덕이 죽은 뒤라 그 제자인 귀금을 불러 자초지종을 물어 본다.
제주도 의녀가 몇 대에 걸쳐 특별한 기술을 갖고 있었다는 얘기다. 조선왕의 평균 수명을 보면 왕노릇이 생명을 단축 한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대체로 왕실에서 자란 사람들은 질병에 자주 걸리고 단명하며 반정을 통해 왕이 되거나 외부에서 갑작스럽게 왕이 된 이들은 질병도 없고 장수하는 경향이 강하다.
중종은 반정으로 왕이 된 대표적인 경우다. 중종은 40세에 이르러서야 종기를 앓아 치료받은 기록이 처음 나타난다. 어깨 부위가 아프고 붓는 종기가 생긴 것이다. 합병증으로 기침과 치통까지 생기면서 치료순서를 고민하다 종기를 먼저 치료하기로 결정하고는 천금루노탕이란 처방을 복용하고 종기를 침으로 터뜨린다.
기침병은 삼소음 처방, 어깨통증은 五木水로 치료
종기는 의외로 곪지않아 태일고, 호박고, 구고고 등 고약을 붙인다. 거머리로 하여금 빨아 먹게 하고서야 종기가 호전된다. 거의 6개월이 지나서야 종기가 나아지면서 의관들에게 상을 준다. 이후 중종은 건강을 회복하고 임종을 맞는 재위 39년 57세 되던 해에 다시 질병을 호소한다. 39년 1월 17일 기록을 보면 치통은 나았지만 잇몸이 아직 아프고 기침병도 생겨 경연(經筵)을 열지 못했다.
기침병을 치료하는 처방은 삼소음이다. 삼소음은 기운을 북돋우는 사군자탕을 기본으로 감기약을 첨가해 위장의 온기를 북돋우면서 가슴을 시원하게 하고 기침을 진정시키는 처방이다. 몇차례 복용 후 기침증세가 호전되자 찬음식을 피해야 재발이 없을 것이라는 건강지침을 준다. 거꾸로 해석하면 중종은 찬음식을 즐겼다는 얘기다.
4월이 되면서 중종이 다시 호소한 증세는 어깨통증이었다. 구고고 등 고약을 붙여 보고 찜질도 하면서 치료하지만 신통찮은 효험으로 고민한다. 중종은 오목수(五木水)로 치료하고자반문한다.
오목수는 5종류의 나무에서 나오는 물을 말한다. 곧 홰나무(槐), 뽕나무(桑), 복 숭아나무(桃), 버드나무(柳), 느릅나무(楡) 혹은 닥나무(楮] 등에서 나오는 수액에 물을 타서 목욕하거나 오목을 끓여 목욕물로 사용하는 처방인데 효험이 좋았던 것 같다.
중종은 덧붙여 오목수로 목욕하면서 쉬고 싶다는 뜻을 은근히 피력한다. 또 다른 기록은 오목수의 효능이 상당히 보편적이었음을 나타낸다. 숙용 김씨가 온천수로 목욕하러 가고자 청하자. “이제 과연 농사철인데 왕자군이 선왕의 후궁을 모시고 왕래하는 것은 옳지 않다. 오목수와 벽해수(碧海水?바닷물로 목욕을 하면 병을 고칠 수 있으니 내려가지 말라”고 이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