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의신문=민보영 기자] 일제강점기 시절 일제 총독에게 폭탄을 던지고, 군의로 활동하거나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하는 등 독립운동에 참여한 한의사의 활약이 지난달 31일 지상파를 탔다.
KBS 1TV 다큐멘터리 프로그램 다큐세상의 ‘독립운동의 숨은 영웅들, 한의사’ 편은 이날 일제에 맞서 독립운동에 헌신한 강우규·신홍균·허발 선생 등 한의사 3인의 삶을 추적하고 업적을 기리는 내용을 방영했다.
고향과 만주에서 한의사로 활동한 강우규 선생은 한일합방 이후 망명한 중국 길림성 유하현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2대 국무총리를 지낸 이동휘를 만난 뒤 독립운동을 결심했다. 이후 100여 가구가 사는 벽촌을 한인마을로 개척하고 광동학교를 세우며 헌신했다.
1919년 9월에는 65세의 고령에도 불구, 서울역에서 제3대 조선총독인 사이토 마코토에게 폭탄을 투척해 제2의 3·1운동을 일으키자는 목소리에 도화선을 그었다. 이후 그의 행적이 알려져 사형을 받게 됐을 때에도 그는 아들에게 “내가 죽어서 청년들의 가슴에 조그마한 충격이라도 줄 수 있다면 그것은 내가 소원하는 일이다”라는 의연한 유언을 남겼다. 강우규 선생은 의거 100주년인 지난해 전쟁기념관 3월 호국인물로 선정됐다.
강우규 선생의 공적에 대해 러시아 우스리스크의 이바짐 고려인 민족문화자치회 부회장은 “모든 한국인들이 고향인 한반도를 해방시키는 꿈을 꿨다. 홍범도·이상설·최재형·안중근·강우규 등 많은 혁명가들이 한국의 해방을 위해 연해주에서 목숨을 바쳤다”며 “강우규는 조선총독부 총독으로 부임해 온 사이토 마코토를 저격해서 실패했지만 그는 안중근의 공로와 같은 것을 이뤘다”고 평가했다.
이와 함께 독립군 3대 대첩 중 대전자령 전투에서 한의사인 신홍균 선생은 군의관으로 활동했던 인물이다.
1911년 일제의 탄압을 피해 중국 봉천성 장백현에 정착한 신홍균 선생은 한의원을 경영하면서 독립운동가이자 신종교 ‘원종’ 창립자인 김중건 선생과 인연을 맺는다. 이후 신홍균 선생은 ‘신흘’로 개명하고 군의관으로 대전자령 전투에 참여했다. 전투 중 폭우로 식량이 부족해지자 신홍균 선생은 매복한 지역에서 서식하는 식용 버섯을 발견해 군량으로 제공, 이 버섯을 먹고 버틴 독립군 500여 명과 중국인들은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전투를 마친 신홍균 선생은 중국 무단장시로 옮건 거처에서 어려운 이웃을 치료하고 도우며 지냈지만, 해방 후 가족과 고국에 돌아가지 못한 채 1948년 작고했다. 신홍균 선생의 후손인 한의사 신민식 원장은 “전투에 참여한 부상당한 동료와 독립군들을 치료하는 마음의 결국 긍휼지심”이라며 “그 마음으로 후손들도 환자를 치료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봉사하는 마음으로 살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저항 시인 이육사의 외삼촌이자 한의사였던 허발 선생은 당시 의병장으로 명망이 높았던 왕산 허위 선생을 도와 독립운동에 헌신하면서 독립자금과 군자금을 조달했다.
허위 선생이 순국한 후 만주로 망명한 허발 선생은 자신의 한의원을 독립군 기지로 활용하고, 만주의 한인 교포들에게 군사 훈련을 하는 등 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당시 신문인 매일신보 1921년 5월 13일자에는 허위 선생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독립운동 지원을 위한 채권으로 자금을 조달했다는 내용이 보도되기도 했다.
허발의 딸이 낸 회고록을 보면 자신의 아버지 한의원이 독립운동가 이시영 선생 등 독립운동가들이 다녀가고, 회의를 하거나 연락을 하는 기지 역할을 하기도 했다.
허발의 독립운동은 사촌 이육사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이육사 선생의 후손 이승환 씨는 “이육사 선생이 쓴 ‘수부선행(水浮船行)’은 독립운동을 하는 자신과 자신을 지원하는 외삼촌의 관계를 배와 물에 비유해 적은 글귀”라고 설명했다.
◇日, 민족정신 깃든 한의학 말살 정책 시행
한의사들이 이 같은 투항에 나선 건 일제의 한의학 말살 정책과 관련이 있다고 방송은 설명했다.
일제는 우리민족의 정신과 문화를 말살하기 위해 1906년 대한제국 관립병원인 광제원에서 진료하는 한의사들을 축출하고 전권을 장악했다. 1913년 11월에는 조선총독령 제2호를 발표하고 한의사에 한해 5년 동안만 기한이 정해진 면허를 신청할 수 있게 하는 등 한의학을 교묘하게 탄압하기도 했다.
박윤재 경희대 사학과 교수는 “한시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사람들을 위한 면허는 면허를 받자마자 평생 동안 활동할 수 있는 면허와 다르다”며 “1913년 의생규칙이 반포되면서 대략 5800명 정도 한의사가 면허를 받지만 1942년 정도가 되면 면허를 받은 한의사 수가 3600명 정도로 줄어든다. 한의학은 자연스럽게 식민지 시기를 거치면서 도태될 수밖에 없는 법적인 조치가 만들어진 것”이라고 지적했다.
박 교수는 또 “식민지를 거치면서 한의학은 아팠다. 일종의 성장통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며 “아이가 아프면서 커나가듯이 한의학이 식민지 시기에 고통을 극복하면서 성장해 나갔다고 할 수 있다”고 평가했다.
방송에 앞서 대한한의사협회는 “위대한 독립운동가이자 한의사인 강우규, 신홍균, 허발 선생의 충절과 기개, 뜨거운 애국심과 숭고한 희생정신을 되돌아볼 수 있는 다큐멘터리가 방송된다는 것에 큰 기쁨과 자부심을 느낀다”고 의미를 부여하고 “3인의 고귀한 뜻을 이어받아 보건의료계에서 아직도 청산되지 않고 있는 일제의 잔재를 말끔히 씻어내고, 한의학이 중심이 되어 진정한 통합의료를 구현함으로써 진료에 있어서 한의사의 역할에 제약을 없애는데 회무역량을 집중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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