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의학사에서 조선 후기 국왕들의 치병 기록은 단순한 질병 치료를 넘어 당대 한의학 학술 이론의 수용과 실천 양상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승정원일기』 영조 15년(1739) 11월 27일의 입진 기록은 영조와 약방 삼제조, 그리고 御醫들이 나눈 대화를 통해 氣와 血, 陰과 陽을 바라보는 조선 의관들의 정교한 변증론치를 생생하게 전한다.
이날 연석의 핵심 화두는 영조의 탕약 선택이었다. 어의들의 맥진이 겨울철의 정상적인 沈脈을 두고 엇갈린 견해를 보이자, 도제조 김흥경은 편차를 바로잡을 탕제를 물었다.
이에 영조는 스스로 醒心散과 滋陰降火湯의 복용 가능성을 타진했다. 성심산은 心火를 내리고 담을 삭이는 응급 처방이며, 자음강화탕은 陰虛로 인해 虛火가 위로 치솟을 때 腎水를 자양하고 화를 가라앉히는 대표적인 養陰降火의 방제다. 영조는 과거 경술년(1730) 어지럼증과 痰癖 증세로 이를 복용했던 경험에 기대어 허화의 제어를 염두에 둔 것이다.
그러나 수의 김응삼을 비롯한 어의들의 시각은 달랐다. 성심산은 일시적인 대증 처방에 불과하고, 자음강화탕 역시 찬 성질의 지모와 황백 등이 들어 있어 노경에 접어든 임금의 脾胃를 상하게 할 우려가 있었다. 여기서 김응삼은 補中益氣湯과 滋陰健脾湯을 대비해 거론한다. 李東垣의 脾胃論을 대표하는 보중익기탕은 중초의 비위 기운을 올려 升陽益氣하는 溫補의 묘약이며, 朱丹溪 계열의 자음강화탕은 음을 길러 下降시키는 약제다. 온보와 청량, 승양과 강심이라는 서로 상반된 두 축의 병리가 충돌하는 지점이다.
어의들은 이 양극단의 대립 속에서 절묘한 절충안으로 자음건비탕을 강력히 건의했다. 당시 영조는 춘추가 40대 중반을 넘어서며 기혈이 모두 쇠약해진 데다, 어지럼증과 痰飮이 겹친 상태였다. 자음강화탕의 寒凉함도, 보중익기탕의 지나친 升發과 건조함도 완전한 해법이 될 수 없었던 것이다. 백출, 진피, 반하로 비위를 건실하게 하여 담을 삭이고, 숙지황, 당귀, 백작약으로 혈과 음을 자양하는 자음건비탕이야말로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기와 혈을 아울러 보하는” 중용의 방책이었다.
‘동의보감’의 외형편 두문에 나오는 자음건비탕.
여기에 김응삼은 담음을 열고 정신을 맑게 하는 석창포 3푼을 가미하여 만전을 기할 것을 청했고, 영조는 이를 흔쾌히 윤허하여 5첩을 지어 올리도록 명했다. 『古今醫鑑』에서 정리한 자음건비탕이 조선 어의들에 의해 임상 현장에서 얼마나 유연하고 엄밀하게 취사선택되었는지를 증명하는 대목이다.
동시에 연석에서는 왕세자(훗날 사도세자)를 위해 腎水를 보하는 六味元의 복용 여부와 무[菁]의 금기 문제를 세밀하게 논구했다.
이처럼 1739년 초겨울 시민당에서 펼쳐진 문답은 단순한 진료가 아니었다. 이동원의 溫補脾胃와 주단계의 滋陰降火라는 한의학의 두 거대한 조류를 주체적으로 조율하며, 군주와 세자의 체질에 최적의 처방을 찾아낸 조선 한의학 변증의 수준 높은 실천을 보여준다.
이동원의 온보비위와 주단계의 자음강화라는 동아시아 한의학의 양대 조류를 맹목적으로 추종하지 않고, 환자의 연령과 맥후, 계절적 맥락에 맞추어 주체적으로 조화시켰다.
중국의 이론을 흡수하면서도 임상 실정에 맞게 체화하여 독자적인 변증 체계를 구축해 낸 조선 의학의 학술적 깊이와 실용적 진면목이 이 기록 속에 담담히 묻어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