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용원 대표변호사
•법률사무소 동촌(東村)
•前 청주지검장
•대한한의사협회 자문변호사
검사는 사건기록을 먼저 만납니다. 변호사는 사람을 먼저 만납니다.
조금은 낯선 말처럼 들릴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27년 동안 검사로 일하다가 1년 6개월 전부터 변호사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두 직업을 모두 경험해 보니, 같은 형사사건을 다루면서도 출발점이 꽤 다르다는 것을 느낍니다.
검찰청에 사건이 접수되면 차장검사가 사건을 검사들에게 배당합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두툼한 사건기록이 주임검사실에 도착합니다. 고소장, 피의자신문조서, 참고인 진술서, 경찰 의견서…. 기록은 대개 시간과 장소, 행위가 잘 정리되어 있습니다. 다만, 표정은 없습니다.
주임검사는 기록을 일독합니다. 다 읽고 나면 마음속에 일응의 판단이 자리 잡습니다. 혐의 없음, 기소유예, 벌금, 정식 기소, 혹은 구속영장 청구. 물론 쉽게 판단이 안서는 사건도 많습니다. 그럴 때는 기록을 다시 읽습니다.
필요하다고 판단하면 고소인이나 피의자를 불러 직접 물어보게 됩니다. 검사가 사건관계인을 처음 만나는 시점이 바로 그때입니다. 검사는 기록을 통해 사건을 이해하고, 그 다음에 사람을 만나는 것이지요.
그런데 변호사가 되니 순서가 바뀌었습니다. 사람이 먼저 찾아옵니다. 문을 열고 들어와 어색하게 인사를 건네는 의뢰인, 손에 쥔 휴대전화, 잠시 멈추는 숨, 그리고 “사실은요…”로 시작되는 이야기.

기록이 아니라 얼굴과 목소리, 눈빛과 한숨을 통해 사건을 접하게 됩니다. 활자에는 없는 장면들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그날은 어머님 요양원에 다녀오는 길이었습니다.”, “회사에서 정리해고를 통보한 날이라 분위기가 안 좋았습니다.” 이야기를 듣다보면 측은지심이 발동합니다.
형사사건에서 “기록을 먼저 읽느냐, 사람을 먼저 만나느냐”는 절차상의 차이 이상입니다. 출발점의 차이가 관점의 차이를 만듭니다.
기록을 먼저 읽으면 선입관이 생기기도 합니다. 귀를 열어두지 않으면 피의자의 ‘해명’이 ‘변명’으로만 들리기도 합니다. 반대로 기록보다 사람을 먼저 접하니 기록 밖의 사연, 활자 사이의 공백이 채워집니다.
검사님이나 판사님에게 기록 너머의 진실이 잘 전달되어 조금은 따뜻한 결론이 내려졌을 때 변호사로서 큰 보람을 느낍니다.
세상사도 비슷합니다. 하나의 백색광이 프리즘을 통과하면 여러 색으로 나뉘듯 세상일도 ‘관점’에 따라 다른 양상을 띱니다. 원기둥을 위에서 보면 원(圓)이고, 옆에서 보면 사각형입니다.
바닥에 숫자 6을 써 놓고 마주 선 두 사람이 바라보면 한 사람에게는 6이고 다른 사람에게는 9입니다. 각자의 자리에서는 모두 옳습니다. 자리를 바꿔 서 보기 전까지는 상대의 확신이 왜 그렇게 단단한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세상은 입체인데 우리는 종종 평면만 보고 그것이 전부인 것으로 오해합니다. 한 발만 옮겨 봐도 다른 것이 보이는데, 우리는 그 한 발을 아끼고 있는 건 아닐까요. 혹시 내가 본 한 장면을 진실의 전부로 여기고, 상대방과 다투고 있는 것은 아닌지 가끔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차 한 잔을 앞에 두고, 오늘 만나는 사람의 사연을 조금 더 들어보는 하루를 만들어보면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