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순한 배려가 아닌 모든 환자의 평등한 건강권을 보장하는 일”
홍진단의 성수소자 한의의료 지원(中)
권주희 한의사
(홍진단 회원)
“성소수자가 한의원을 왜 불편해하죠?”
성소수자 친화적인 한의원을 이야기할 때 가장 많이 듣는 말이다. 여성의학과나 비뇨기과처럼 성생활을 공개하는 곳도 아니기 때문에 흔히 한의원에서는 성적지향이 크게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성소수자 환자의 경험은 다르다. 진료 과정에서 자신의 상황을 솔직히 말하지 못하거나 신체 노출을 꺼려서 치료를 피하는 일이 빈번하다. 예를 들어, 커밍아웃으로 인한 스트레스의 원인을 직장 문제로 돌려서 말하거나, 트랜지션을 위해 복용 중인 호르몬제를 언급하지 않은 채 단순히 한약 복용을 거부하는 경우도 있다. 한의사로선 환자의 상태를 정확히 파악하기 위한 필수 정보를 놓칠 수도 있다는 뜻이다.
2023년 서울 퀴어퍼레이드 후 진행한 '성소수자 친화적 한의원 만들기' 워크샵
또한 성소수자는 사회적 차별로 인한 정신건강 문제, 고용상의 불안정 등으로 인해 시스젠더 이성애자보다 상대적으로 건강이 취약한 경우가 많다. 국가인권위원회의 <트랜스젠더 혐오차별 실태조사(2020)>에 따르면 응답자의 57.1%가 우울증, 24.4%가 공황장애를 진단받거나 치료받은 경험이 있다고 답했다. 성소수자가 안심하고 의료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단순한 배려가 아니다. 성적지향과 무관하게 모든 환자의 평등한 건강권을 보장하는 일이다.
무지개 깃발을 넘어서
성소수자 친화적인 공간이라고 하면 흔히 무지개 깃발이 걸린 대기실이나 성별 항목에 남성, 여성 외에 추가된 ‘기타' 항목을 떠올린다. 이런 장치는 좋은 출발점이다. 그러나 여기에 머문다면 성소수자를 단순히 더 신경 써야 하는 특수집단으로만 바라보게 된다. 한의원에 내재한 차별적 구조는 그대로 놔둔 채 ‘환영한다'라는 말만 내 거는 셈이다.
진정으로 성소수자 친화적인 한의원을 만들려면 내부로 초점을 돌려야 한다. 한의원이라는 공간, 한의사의 태도, 한의학이라는 학문 모두에 내재한 ‘시스-이성애규범성(cisheteronormativity)’를 바꾸는 일이 필요하다.
홍진단 성소수자 진료소에서 무지개 핀을 착용하고 진료하는 재하 한의사
이 용어는 낯설게 느껴질 수 있으나 사실 누구나 아는 개념이다. ‘성별에는 남성과 여성만 존재한다’, 그리고 ‘남성과 여성 간의 연애 및 결혼 관계만이 정상이다'라고 여기는 개념을 말한다. 이런 사고가 사회 전반의 규범과 제도에 스며들어 당연한 기본값이 되고, 게이·레즈비언·무성애자·트랜스젠더 등 다양한 성소수자의 삶은 지워지고 드러날 경우 혐오와 폭력에 직면한다.
성소수자를 배제하는 관념은 한의원에도 숨어 있다. 환자의 성별을 추정해서 ‘어머님, 아버님'이라고 부르거나, 난임 치료를 이성 부부 중심으로 설계하는 것이 예시이다. 한의학이라는 학문 안에도 성별 이분법과 이성애적 전제가 내재한다. 음양론을 단순화해 ‘남자는 양, 여자는 음’으로 설명하거나, 여성에게 이성애적 부부 관계를 전제로 임신과 출산을 물어보는 것도 그러하다.
심지어 어떤 한의학 입문 교재는 트랜스젠더 환자를 음양이 뒤바뀐 병리적 존재로 서술하기도 한다. 한의학 속에서는 성소수자가 존재하지 않거나 기피의 대상으로 여겨지며, 이런 언어는 결국 성소수자 환자에게 배제의 신호로 작용한다.
따라서 한의원을 진정한 성소수자 친화적인 공간으로 변화시키려면 단순히 무지개 깃발을 거는 수준을 넘어, 학문과 제도 속에 스며든 시스-이성애규범성을 직면하고 뒤흔드는 과정이 필요하다.
모두의 화장실, 강동성심병원 LGBTQ+ 센터
나의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실천
그렇다면 성소수자 친화적인 한의원을 어떻게 만들 수 있을까. 2023년 서울 퀴어퍼레이드를 마친 뒤 한의대생과 한의사가 모여 성소수자 친화적인 의료기관에 관한 워크샵을 진행했고, 2024년 홍진단 컨퍼런스에서도 같은 논의를 이어갔다. 그 과정에서 브레인스토밍한 실천 방법은 크게 세 가지로 정리될 수 있다.
첫째, 성소수자의 존재를 가시화하는 일. 남성과 여성, 이성애자가 기본값으로 여겨지는 의료 환경에서 성소수자의 존재를 인지한다는 신호를 보내는 것이다. 대기실에 성소수자 관련 서적을 비치하는 것이 그 예이다.
둘째, 성소수자도 안전하게 머물 수 있는 한의원을 만드는 일. 혐오나 폭력을 걱정하지 않고 자신의 모습 그대로 존재할 수 있는 공간을 구축하는 것이다. 환자의 개인정보를 철저히 보호하고 외모로 성별을 추측하지 않도록 직원 교육을 하는 것이 대표적이다.
성소수자과 연대하는 마음을 보여주는 무지개 핀과 스티커
셋째, 이성애주의적 제도와 규범의 변화를 촉구하는 일. 진료차트 프로그램에 고정된 이름, 성별란을 유동적으로 바꿀 수 있는 권한을 요청하는 것이 그 예이다. 개인의 노력만으로는 한계가 있으므로 홍진단과 같은 단체와 함께 변화를 요구하는 것도 필요하다.
이 외에 함께 논의한 실천 방법은 △성별과 무관하게 누구든 쓸 수 있는 1인 화장실 혹은 성별중립화장실 확보 △진료 과목에 성소수자 진료 명시 △대기실이나 진료실에 무지개 깃발 배치 △접수증 성별 항목에 남성, 여성 외에 ‘기타' 추가 △외모로 성별이나 성적지향 추측 지양하기 △성별, 성적지향, 성소수자 진료에 대한 적절한 직원 교육 △환자 호명 시 이름 대신 번호표를 사용해 개인정보 보호 강화하기 △모든 환자를 “ㅇㅇ님”으로 부르고 어머님, 아버님 같은 성별 추측 호칭을 지양하기 등이다.
이와 함께 △환자가 원하는 경우 연인, 가족과 같이 진료 상담 받기 △대화 시 포괄적 용어 사용 (예: 여자/남자친구→애인, 아내/남편→배우자) △성소수자 치료에 관한 한의학적 연구 활성화 △성별에 기반한 한의학 지식 재검토 △퀴어퍼레이드 등 성소수자 행사 의료지원 및 후원 △성소수자 직원의 차별 제보 방법 및 대응 계획 설립 △성별, 성적지향 등과 무관하게 직원 복지 제공 등이 실천할 수 있는 방법들이다.
인천퀴어퍼레이드 참여자들이 공유한 한의학에 대한 궁금증과 의료 경험
단순히 체크리스트의 항목을 다 충족한다고 해서 성소수자 친화적인 한의원이 되는 것은 아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한의사의 내면, 그리고 진료 과정 및 의료제도에 스며든 시스-이성애규범성를 직면하고 뒤흔드는 작업이다. 환자를 이분법적인 성별이나 고정된 성적지향에 가두지 않고 고유한 존재로 마주하는 것이야말로 성소수자 친화적인 진료의 출발점이다.
한의학의 변화와 성장을 위해 한의사뿐만 아니라 한의대생, 연구자, 봉직의, 수련의 등 다양한 구성원들이 각자의 위치에서 해야 하는 것 또는 할 수 있는 것들을 실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결국 우리가 만든 작은 변화들이 모여 평등하고 건강한 미래를 만들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