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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에서 느껴보는 醫藥文化 - 34안상우 박사 한국한의학연구원 동의보감사업단 예방백신 접종이 점차 확대됨에 따라 기나긴 코로나 감염병과의 동거도 이제 머지않아 끝자락이 보일듯하다. 질병관리청에서 70~80세 이상 어르신들에게 먼저 접종케 하도록 우선순위를 정해 나이가 많을수록 접종비율이 높은데, 오랫동안 장유(長幼)를 따지는 유교 전통의 예법에 익숙해서인지 그 어느 누구도 이 방침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서구사회나 문화가 이질적인 다른 나라의 경우에도 똑 같은 기준을 적용하는지는 알지 못하나 날마다 감염에 대한 우려와 공포심을 이겨내야 하는 처지에서 연장자를 우대하는 미풍양속을 지킨다는 점에 은근히 자긍심마저 느끼게 된다. 매천 황현, 56세에 자결하며 絶命詩 남겨 세계적인 대유행을 맞아 부랴부랴 개발된 백신들을 긴급사용 허가된 터인지라 위험을 무릎 쓰고 주사를 맞기에 주저하는 경우가 더러 있다고 한다. 초·중교 이후로 몇 십 년 동안 예방접종을 받아본 지도 까마득한데, 어느덧 해당자가 되었다는 통지를 받았다. 걱정스런 마음을 달래주려는 지인들이, 접종 후 사망사례가 늘고 있다며, 유서를 써 놓았냐며 농담을 건넨다. 백세시대라 하지만 예측하기 어려운 것이 인생사요, 환갑을 넘긴 뒤로는 여생(餘生)이라 불렀던 것을 상기하면 그럴 만도 하다 싶다. 딱히 무엇을 남겨야 할지도 막연하지만, 정신없이 살다가 어이없이 생을 마감하는 것을 원하진 않을 것이다. 해서 옛적 선인 가운데 죽음을 미리 직시한 분들은 어떤 말을 남겼나 궁금해 졌다. 대한제국기 우국지사이자 문장가였던 매천(梅泉) 황현(黃玹, 1845~1910)은 1910년 7월 한일합병 소식을 전해 듣고서 망해가는 나라에서 글 배운 지식인으로서 자괴감을 달랠 길 없어 56세의 나이로 자결을 결행하였다. 그는 목숨을 끊기에 앞서 4편의 절절한 유작시를 절명시(絶命詩)란 제목으로 남겼다. 망해가는 고국을 바라보면서, 조선의 선비로서 비루하게만 느껴지는 생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려 무진 애썼던 듯하다. “난리 통에 휩쓸려 다니며 백발이 다 되도록, 목숨을 버리려다 멈춘 적 그 몇 번이던가(亂離滾到白頭年, 幾合捐生却未然)”, 그 가운데 한귀는 하도 절창이라 지금도 여전히 살아있는 사람들의 입에서 회자되고 있다. “가을밤 등불 아래 책을 덮고서 천고의 옛일을 마음속에 새겨보니, 인간으로 태어나 배운 사람 노릇하기 어렵기만 하도다(秋燈掩卷懷千古, 難作人間識字人).” 다산 정약용, 회갑 즈음에 自撰墓誌銘 남겨 몇 해 전 남도답사 길에 우연히 마주친 『매천시집』은 서울이나 대도시가 아닌 전남고흥 사는 박형득이 펴낸 책인데, 보성벌교의 박수용상점에서 1933년에 발행한 지방판이다. 편집자는 발문에서 “간절하게 선생의 풍모를 사모한 나머지 금품을 모아(연금·捐金) 전에 간행한 판본에 시 수십 편을 덧붙여 널리 펴내서 사해동지(四海同志)들과 더불어 나누어 보고 다시 선생의 시문을 염송하고자….”라고 발행취지를 밝혔다. 또한 같은 글에서 불후의 명작에 배인 선생의 재주를 옮겨 전할 뿐만 아니라 천년에 드리울 절의를 지켜 사표(師表)가 되신 선생을 우러르고자 함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조선 후기 대학자 다산 정약용(丁若鏞, 1762~ 1836)은 유배에서 풀려나 고향집으로 돌아온 다음, 회갑을 맞이하던 때를 즈음해서 자찬묘지명(自撰墓誌銘)을 써서 남겼다. 아마도 살아서 생전에 파란만장했던 일평생을 자신의 손으로 오롯이 정리하고 싶으셨나 보다. 묘지명이란 죽은 사람의 인품과 공로를 글로 새기어 후세에 영원히 전한다는 뜻에서 짓는 글이다. 보통 정방형의 돌 한편에 성씨와 고향, 관력(官歷) 등을 기록하고 다른 한편에는 망자를 칭송하는 시문을 새겨 무덤 속에 넣어준다. 다산이 직접 지은 자신의 묘지명, 그 시작은 다음과 같다. “열수(洌水) 정용(丁鏞)의 묘이다. 본 이름은 약용(若鏞), 자는 미용(美庸), 또 다른 자는 송보(頌甫), 호는 사암(俟菴), 당호는 여유당(與猶堂)인데 ‘겨울 내를 건너듯, 이웃을 두려워하듯’이란 뜻에서 지었다. 어려서 영특해 문자를 알았고, 10세 때부터 과예(科藝)를 공부하기 시작했으며, 집에 계신 아버지로부터 경사(經史)와 고문(古文)을 배우고 시율(詩律)을 잘 지었다. … (중략) ….” 젊은 선비 다산을 총애했던 정조의 급서(急逝)로 정세가 급변하자, 1801년 서학을 숭상했다는 빌미로 맏형인 정약종은 사사(賜死)되고, 중형인 정약전은 신지도로, 다산은 경상도 장기 땅으로 유배되었다. 다산은 장향(瘴鄕)으로 알려졌던 그곳에서 몇 달을 지내면서 『기해방례변(己亥邦禮辨)』을 저술했고 떠나오기 직전, 평소 뒷일을 돌봐주던 아전을 위해 『촌병혹치(村病或治)』란 간략한 구급방서를 적어 주기도 했다. 뒤이어 황사영 백서 사건으로 취조를 받고, 혐의가 없음이 밝혀졌으나 다시 강진으로 유배되었다. 강진 읍내 주막집 방 한 칸을 빌려 지내다가 1808년 다산초당을 짓고 이거한 뒤에야 비로소 저술에 몰두할 수 있었으며, 그의 대표 저작들은 거의 이 시기의 산물이라 전한다. 그는 또한 오늘날 전염병백신의 원조격인 종두법에 대해 자세히 연구한 의학자로 종두전문서 『종두요지(種痘要旨)』를 저술하였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학문적 성취가 당대에 인정받기가 힘들다는 것을 알고 “알아주는 이는 적고, 꾸짖는 자는 많으니, 천명이 허락해 주지 않는다면 불에 태워버려도 괜찮다”고 하였으며, “백세(百世) 후를 기다리겠다”며 후일을 기약했다. 그의 아호 가운데 하나인 사암(俟菴)에는 당대 인식에 대한 비관과 후세에 대한 절절한 기대가 내포되어 있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죽기 직전까지 『동의수세보원』의 원고를 쉼 없이 수정하고 있던 동무 이제마의 치열한 삶의 자세를 돌이켜보게 되며, 그 역시 자신이 이룩한 사상의학이 백년 뒤에나 빛을 보게 되리라고 예측하였다. 죽음이 인생의 마침표가 아니라면? 70~80년대를 대표하는 작가 최인호는 암으로 투병하면서, 책상머리에 염분이 엉길 정도로 하염없는 눈물을 쏟아내면서도 마지막 순간까지 신이 주신 재주를 발휘하여 글쓰기를 지속하였다. 시인 이상은 폐결핵으로 선혈을 토하면서도 자신의 내면을 냉정하고 명징하게 바라보려 애썼으며, 천상병은 죽음을 앞에 두고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나는 날이라며, 동심처럼 해맑은 마음으로 이 풍진 세상을 바라보았다. 걸레스님 중광은 한바탕 잘 놀다간다며 허허허 큰소리로 웃음을 주고 떠나갔다. 죽음이 인생의 마침표가 아니라면, 아니 마치고 싶지 않다면, 다음 생이 아니라 죽음 다음의 일을 대비하는 것이 또 다른 삶의 연장이지 아닐까 싶다. 자신만은 영원히 살 것처럼 동분서주하며 지내다가 예기치 않은 사고나 질병으로 삶이 좌절되거나 죽음과 맞닥트려야 한다면 이 또한 바라는 바는 아닐 것이다. 호국의 달 6월, 지루하게 이어지는 방역 상황 덕분에 진정 가치 있는 삶이 무엇인가에 대해 한번쯤 생각해 보는 시간이 허락된다면 망외의 보람을 거둘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
고전에서 느껴보는 醫藥文化 - 33안상우 박사 한국한의학연구원 동의보감사업단 올해도 역시 가두에서 연등행렬을 지켜보긴 어려울 듯하다. 그 옛날 삼국시대에 불법도 서쪽으로부터 동국에 전해졌고 마마나 홍진 역시 서쪽의 중국으로부터 전염되었기에 서신(西神)이라 불리기도 하였다. 이번에 도래한 서신은 그 어느 때보다 혹심하여 시방세계가 온통 골머리를 앓고 있다. 달포 전에 우연히 들린 덕유산 자락 산속 암자에는 아예 신도들의 발걸음이 끊겨 폐사와 다름없어 보일 정도였다. 어김없이 다가온 석탄일, 잠시나마 부처님의 광대무변한 자비심을 느껴보고 싶은 심정이나 냉혹한 방역실정은 마냥 집밖으로 나서는 걸 주저하게 만드는 실정이다. 허송암 원장, 숨은 명의들의 비전 경험방 수집 그래서 연전에 구해 둔 채 내박쳐 둔 자료 가운데 근현대 한의학인물로 재가불자회 회장을 역임한 허송암(許松菴) 선생의 유사(遺事) 몇 가지를 전하며, 답답함이나 달래고자 한다. 그에 대한 행적은 몇 권의 저작물 이외에는 자세히 전해지지 않는다. 다만 허송암은 말년에 이르기까지 은평구 미아리 소재 허송암한의원을 운영하면서 한의계 활동에도 열심이었다. 그는 개인적으로 수많은 처세훈과 양생명을 남겼는데, 이러한 행적은 평소 불제자로서 진료에 임하는 자세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일찍이 의우들과 함께 한방연구를 위해 월례회와 친목단체인 행림계를 조직하여 활약하였다. 이를 모태로 1958년 전국한방의학종합연구회를 결성하여 동료한의사들과 함께 『(한방경험)학낭(鶴囊)』이라는 임상경험집을 펴내고 민간에 흩어져 있는 숨은 명의들의 비전 경험방을 수집하는데 노력을 기울인 바 있다. 또한 1969년에는 임홍근(林弘根, 1926~1969)이 펴낸 한의학술잡지 『홍익의등(弘益醫燈)』에 허송암이 찬사를 쓰고 축시도 실어 지역한의사회 활동에도 적극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뇌막염, 경기, 위장병 치료에 뛰어났다 한편 신문연재 역대명의의안(313호, 2018.04.21.일자)에는 허송암이 위궤양 환자를 치료한 의안이 실려 있다. 위궤양과 위산과다로 인한 위통증에 백복령, 백편두, 황기, 인삼 등을 주재로 보중익기탕을 변형한 백렴탕(白蘞湯)을 투약하여 탁효를 거둔 실제 경험의안인데, 위병을 비롯한 내과질환에 특기가 있었음을 전하고 있다(『한의사치험보감』, 치험보감편찬부, 한국서원, 1975.). 김남일의 안어(按語)에 따르면, 허송암은 일제 강점기에 동경물리학교에서 공부한 후 전라남도 방역과에 근무하면서 출산 후유증으로 다리를 못 쓰는 어떤 부인을 양방에서 전혀 치료하지 못하는 것을 한약 3일분으로 치료해내는 것을 보고 감명 받아 한의사가 되겠다고 마음먹었다. 일제 시기 그는 백규환(白奎桓) 선생에게 『동의보감』과 『의학입문』을 지도받았으며, 광복이후 침구사로 활동하다가 한의사제도가 시행되자 한의사검정고시에 합격하여 한의사가 되었다. 허송암은 뇌막염, 경기, 위장병 등에 뛰어났다고 전한다. 마침 오래 된 <불교계> 잡지에 허송암 선생이 기고한 시 한편을 찾았기에 여기 옮겨 적는다. 의약을 알고자 하는 마음이 곧 부처의 마음 젊은 시절 한때 승적(僧籍)에 올랐다가 환속한 고은의 연작시 『만인보(萬人譜)』 안에는 불교적 생멸관이 단적으로 담겨져 있는 담시가 한편 들어 있어 한번 읽고 되새겨볼만 하다. 시인의 고향에 살아계신 종조부는 노년에 풍기가 들어 머리를 도리질하고 다닌다. 대소가 식구들이 모두 피해 다니는 신세가 되고 보니 우물가에 가서 수면에 비친 자신의 형상과 자문자답해야하는 처지이다. 『동의보감』 내경편 첫머리에 실려 있는 ‘사대성형(四大成形)’조에서 불경을 인용하여 “釋氏論, 曰地水火風, 和合成形”했다고 한 명제가 시골구석 촌노의 병든 육신에 그대로 현현되어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불교의학서 『간이방』에서는 다음과 같은 말로 의사와 불심을 비유하였다. “의약은 훌륭하고 정교한 방편이 되나니, 차별 없이 모든 인간을 구해야 한다. 그런 즉, 의약을 알고자 하는 마음이 곧 부처의 마음이다.” -
고전에서 느껴보는 醫藥文化 - 32안상우 박사 한국한의학연구원 동의보감사업단 길고 짧은 인생행로에 누구나 한번쯤은 신병으로 누워 지낼 수밖에 없을 때가 있을 것이다. 대략 350년 전쯤인 1678년에 원치 않은 질병으로 집안에 갇혀 지낼 수밖에 없었던 36세의 한 젊은 선비가 평소 자신이 관심을 두었던 이런저런 얘기들을 적어놓은 글이 있다. 그 선비는 홍만종(洪萬宗, 1643~1725)이고 그 글은 보름 동안에 걸쳐 지어졌다 해서 순오지(旬五志) 혹은 십오지(十五志)라는 이름으로 전한다. 지은이가 붙여 놓은 서문에는 자신이 병으로 누워 지내면서 평소 글하는 선비들로부터 전해 들었던 갖가지 말들(詞家雜說)과 민가에 떠도는 속담(閭巷俚語) 등을 기록하여 병석에서의 지루한 시간을 이겨내고 근심을 잊고자 하였다고 밝혔다. 마침 읽고 외우기(讀誦)의 선수로 이름난 백곡(柏谷) 김득신(金得臣, 1604~1684)이 서문을 지어 붙였는데, 조선 후기에 풍속화가로 잘 알려진 긍재(兢齋) 김득신(金得臣, 1754~1824)과는 전혀 다른 시대에 살았던 동명이인이다. 아무튼 김득신의 서문에 따르면, 저자 홍만종은 어린 시절부터 도가의 장생불사하는 선술을 몹시 좋아했다고 적었다. 또한 유불도에 두루 밝고 우리나라 역사와 예술, 문장과 음악에 관한 글을 모아두고 심지어 이름 있는 명사들의 별호(別號)와 시골의 사투리(方言)에 이르기까지 낱낱이 찾아보고 기록해 두었다고 밝혀놓았다. 홍만종의 ‘旬五志’, 민가에 떠도는 속담들 기록 이런 설명에 과히 어긋나지 않게, 본문은 조선의 개국으로부터 시작하고 있다. 『동사(東史)』와 『위서(魏書)』를 동원하여 단군 탄생과 조선건국 신화가 적혀 있는데, 태백산 박달나무 아래서 한 마리의 곰이 하느님(天神)에게 사람이 되게 해 줄 것을 애원하여, 신령한 약(靈藥)을 먹고 갑자기 여자로 돌변하였다고 적혀있다. 우리가 읽은 일연 스님의 『삼국유사(三國遺事)』에서는 영약이 바로 달래와 쑥이라고 했으니 계절은 이즈음처럼 봄이었을 것이고 들판에 새로 돋은 봄나물이야말로 겨우내 웅크려 지낼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에게는 마치 하늘이 내려준 신비로운 약처럼 귀한 선물로 느껴졌을 것이다. 필자는 종종 한의학역사박물관을 찾아온 관람객들에게 이 이야기를 우리나라 의약의 시원으로 설명하곤 한다. 내친 김에 책속에 담긴 의약 관련 내용을 몇 가지 들춰보기로 하자. 신라말엽 풍수지리로 유명한 도선스님이 당나라의 선승들과 나눈 산천비보(山川裨補)설은 동국산수에 3800군데 점을 찍어 삼국 분열을 막고 국운을 일으켜야 한다고 설명한다. “인간이 급한 병이 생기면 혈맥을 찾아서 침도 놓고 또는 뜸질도 해야만 병을 고치게 된다. 만약에 그렇게 하지 않으면 반드시 죽음을 면치 못한다.” 인간의 몸에 기와 혈이 흐르는 경맥이 있듯이 산천에도 요혈이 있어 소통이 원활해야만 국사가 풀린다는 얘기인데, 자연환경과 인간사회의 조화가 국가의 운명을 좌우할 수 있다는 깨우침을 준다. “자신의 병을 고치려거든 마음을 반드시 바르게 해야” 본문 중반을 넘어서자 저자 자신의 처지를 의식한 듯, 많은 부분에서 수신양생에 관한 내용이 주류를 이룬다. 스스로 병 고치는 비결로써, “만일 자신의 병을 고치려거든 먼저 마음을 다스리고, 또한 그 마음을 반드시 바르게 해야 한다”고 했다. 이러한 치심법은 퇴계 이황을 필두로 조선 선비들에게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저자는 자신의 택당 이식으로부터 받은 수련법 100여 가지를 골라 전한다고 밝혀놓았다. 그 방법은 조식법(調息法), 탄진법(呑津法), 도인법(導引法), 보화탕(保和湯) 등인데, 이는 필시 세종대 간행된 『의방유취』 양성문이나 『활인심법』 등을 통해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저자인 홍만종은 젊은 나이에 아버지가 옥사에 연루되어 외직으로 축출되었다가 사망하자 이에 충격을 받아 몸이 병약해진 나머지 환로에 뜻을 버리고 문학과 단학수련에만 관심을 보이게 되었다고 한다. 이듬해부터 어지럼병을 얻어 내내 고생하였으며, 와병 중 도교에 심취하게 되어 1666년 『해동이적(海東異蹟)』을 집필하였다. ‘詩話叢林’, ‘東國地志略’ 등 명저 다수 남겨 병으로 두문불출하며 이식, 김득신, 홍석기 등의 문우(文友)들과 시문을 나누던 그는 1673년 시평론집인 『소화시평(小華詩評)』을 저술하였다. 33세 되던 숙종 원년(1675) 진사과에 급제하였지만 벼슬길에 나서지 못하고 서호(西湖, 지금의 서울 마포 일대)에 머물며 『순오지(旬五志)』를 지었다. 그는 일반적인 시문보다는 역사·지리·설화·시화 등 남들이 돌아보지 않는 분야에 관심을 기울여 1705년에는 우리나라 역사를 간추려 엮은 『동국역대총목(東國歷代總目)』을 엮었으며, 70세가 되던 1712년에는 역대 시화를 집대성한 『시화총림(詩話叢林)』을 편찬하였다. 이 외에도 『동국악보(東國樂譜)』 · 『명엽지해(蓂葉志諧)』 · 『동국지지략(東國地志略)』 등 주옥같은 명저를 남겼다. 영조 원년(1725) 83세까지 천수를 누렸으니, 평생 갖가지 지병으로 시달린 것을 감안하면 당시로선 보기 드물게 장수를 누린 셈이다. 아마도 젊어서 일찌감치 출세욕을 버리고 양생술을 연마한 덕이 아니었을까 싶다. 이 책은 보름동안 병석에서 누워 지내면서 울적한 마음을 달래고 스스로 위안을 얻고자 지어졌다고 한다. 벌써 일년 반 가까이 지루하게 이어지는 역병의 유행에 우리 자신을 위한 글쓰기로 자득의 묘를 발휘해보면 어떨까 싶다. -
고전에서 느껴보는 醫藥文化 - 31안상우 박사 한국한의학연구원 동의보감사업단 일제강점기인 1936년 구황실 전의장(典醫長)을 지낸 서병효(徐丙孝, 1858~1939)가 자신의 진료소인 동남약방(潼南藥房)에서 펴낸 『경험고방요초(經驗古方要抄)』, 이 책은 정조때 수의(首醫)를 지낸 강명길(康命吉, 1737~1801)이 왕실에서 펴낸 『제중신편(濟衆新編)』을 토대로 저자인 서병효의 임상경험을 가미하여 지은 온전한 의약방서이다. 하지만 묘하게도 저자 서문과 함께 한국화단에서 서양화의 개척자로 잘 알려진 인물의 글이 첫 머리에 붙어있다. 서문을 쓴 동우(東愚) 김관호(金觀鎬, 1890~ 1959)는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로 이름난 고희동(高羲東)과 함께 초창기 서양화단에 쌍벽을 이루는 인물이다. 그는 원래 평양 출신이지만 서울에서 고등학교를 마치고 1909년(융희3) 일본으로 건너가 학업을 계속하였으며, 1911년 도쿄미술학교 재학 중 일찍부터 두각을 나타냈으며, 수석으로 졸업할 정도였다. 1916년 일본 문부성에서 주최한 제10회 미술전람회에 졸업 작품으로 제출한 ‘해질녘[夕陽]’이 특선으로 입선하면서 화단의 주목을 이끌었다. 이 작품은 한국인이 그린 최초의 누드화여서 미술사적으로 의미가 있으며, 당시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고 알려져 있다. 김관호 서양화가, 『經驗古方要抄』 서문 저술 그는 또한 1916년 12월 평양 일대의 풍경을 다룬 작품 약 50여 점을 선보이며, 처음 개인전시회를 열었는데, 이 유화 개인전은 우리나라 근대 미술사상 최초의 개인전 으로 기록되었다. 그는 평양과 서울을 오가면서 작품 활동을 벌였으며, 이후 1920년대에 각종 공모전에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아울러 최초의 종합문예동인지인 『창조(創造)』의 동인으로 활동하였으며, 1924년에는 문예지 『영대(靈臺)』의 창간동인으로 참여하여 회화와 문필을 겸비하였다. 그러던 그가 1927년 무렵부터는 활동을 중단하고 평양에 머물며 문예와 화단에서 모두 물러났다. 때문에 그가 어떤 계기로 서병효와 절친한 사이가 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며, 이미 의료계와 서양화단에서 유명인사로 통하던 두 사람의 만남은 특별해 보인다. 이상하게도 이 무렵 서병효도 교육과 단체 활동이 뜸해지면서 서울 운니동에서 개인의원을 개원하고 진료를 통해 명성을 얻게 된다. 이 책의 저자 서문은 1931년에 작성된 것이지만 김관호의 서문은 1936년 발행 당시에 붙여진 것으로 보인다. 나의 벗 ‘侍郞’, 전의장으로 봉직한 서병효 지칭 김관호는 서문에서 여러모로 그의 인품과 학문적인 열성을 찬양했지만, 무엇보다도 장중경 상한치법과 『의학입문』의 상한치료법에 장기가 있었다고 전한다. 나아가 국왕께서 돌아가시기 직전 유명을 남길 때에도 여러 번 편작과 같은 신기한 효험을 보였기에 포상을 받아 돌아왔다는 말도 특기하였다. 이로 보아 저자와 김관호는 매우 가까운 처지에서 평소 서로의 일상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또한 서문에서 저자를 ‘나의 벗 시랑(余友侍郞)’이라고 적어 매우 친근하게 지냈음을 알 수 있는데, 여기서 서병효를 ‘시랑(侍郞)’이라고 지칭한 것은 아마도 서병효가 구황실의 시종원에 속한 전의장으로서 봉직했기 때문에 이렇게 부른 것이리라. 하지만 1858년생인 서병효와 1890년생인 화가 김관호, 두 사람의 나이가 30여 살이 넘게 차이가 나는데 어떻게 벗으로 부르며 통교(通交)할 수 있었는지 의구심이 든다. 그래서 관련 기록을 이리저리 뒤졌으나 30년대 이후 화단활동을 접어버린 김관호의 기록은 상세하게 전하지 않는다. 또 하나 학창시절부터 젊은 나이에 촉망받는 서양화가로 활동했던 김관호의 작품 가운데 말년 작은 서예작품만 전한다. 서양화를 도입한 사람과 전통 서예작품을 남긴 두 사람이 동일인인지도 확신할 수 없어 미술사학을 전공한 이들에게 문의했으나 대답이 확실하지 않다. 어찌된 일인지 막연하던 중, 서병효에 대한 논문(박훈평, 서병효 연구에 대한 예비적 고찰, 2020.)을 읽어보니 이 책의 서문을 쓴 동우 김관호는 대한제국의 궁내부 사무관 등의 관직을 지내며 저자와 친교를 맺은 것으로 추정하였다. 그는 무관출신이었으나 1907년 이후 궁내부에 근무한 이력이 『대한제국관원이력서』에 기록되어 있으므로 이렇게 추정한 것으로 보인다. 서병효·김관호, 근대 한의학 교육과 한국서양화 개척에 앞장 선 선구자 관력이나 연배로 보아서는 가장 근사해 보이기는 하지만 아호로 적힌 ‘東愚’가 확인되지 않는다. 앞서 관원이력서에는 아호가 기재되어 있지 않고 미술사학에서는 서양화가로 알려진 김관호의 호가 동우이며, 말년의 서예작품 또한 그의 것이라고 확인해 주었다. 어느 쪽이던 어디선가 잘못된 정보가 눌러 붙은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한일합병에 이어 일제총독부 통치가 강화되면서 대외활동을 접을 수밖에 없었기에 관련 자료가 미비하게 된 탓으로 보인다. 1999년 평양 문화예술종합출판사에서 발행한 『조선력대미술가편람』에 따르면, 김관호는 거족적인 1919년 3.1만세운동 이후로 일제의 가혹한 탄압과 민족문화 말살정책에 항거하는 표시로 붓대를 꺾어버리고 미술창작을 단념하였고 후계 육성만을 지속하였다고 전한다. 서병효는 순흥군 서기로 일하던 아들 서정린(徐廷麟, 1876~1911)이 한일합방이 되면서, 울분을 참지 못하고 병들어 죽게 되자 영주의 뒤새에 귀운정을 마련하고 낙향하였다. 하지만 그는 국권피탈 이후에도 끝까지 고종과 순종의 건강을 돌보는데 진력을 다하였다. 서병효와 김관호, 근대 한의학 교육과 한국서양화 개척에 앞장 선 두 사람의 선구자를 위해서라도 하루빨리 그 족적이 확연하게 밝혀져야 할 것이며, 우리가 풀어가야 할 근대사의 과제이다. -
고전에서 느껴보는 醫藥文化 - 30안상우 박사 한국한의학연구원 동의보감사업단 새해가 문을 연지 얼마 되지 않아 번지기 시작했던 돌림병이 지루하게 이어져 어느덧 한 돌을 지나는 마당에 서있다. 오래 전에 뒤적이다 박쳐둔 고서 하나를 다시 펼쳐본다. 표지의 제첨부에는 멋들어진 행서체로 쓴 『경험고방요초(經驗古方要抄)』라는 서명이 적혀있다. 구불구불한 획들에서 조선을 대표하는 글씨 원교(圓嶠) 이광사(李匡師)의 필의를 떠올리게 된다. 저자는 서병효(徐丙孝, 1857~1939)라는 근대한의학자로 광무 연간에 의관이 되어 시종원의 전의장(典醫長)을 지냈으며, 대한의사총합소(大韓醫士總合所)의 평의장을 지냈다. 또한 한일합병 이후에는 동서의학연구회나 한성의학강습소에서 활동하면서 일제치하 단절된 한의학교육과 한의학부흥운동에 기여한 인물이다. 저자의 서문은 미처 한쪽이 되지 않는 짧은 분량이고 내용도 단순해 보인다. 하지만 이 책을 한눈에 살펴보기에는 지침서가 많지 않은 터인지라 자세히 뜯어볼 수밖에 없었다. 혹시나 해서 오래 전에 쓴 글을 찾아보니 다행히 개략을 살펴놓은 내용이 남아 있었다(醫界와 畵壇의 어울림, 『經驗古方要抄』, 고의서산책, 민족의학신문, 2009.7.6.일자). 또 김남일이 지은 『근현대한의학인물실록』에 저자(전통의학의 부흥을 위해 노력한 한의학자, 서병효)에 대해 소개가 들어있어 다소 보탬이 되었지만 둘 다 오래 전에 쓴 글이고 더러 미진한 점이 눈에 띄어 예전에 썼던 글을 보완할 겸 미처 못다한 얘기를 풀어보기로 하였다. “증상을 논함에는 內傷과 外感을 나누어야 하니” “일찍이 듣건대, ‘병은 모두 상한(傷寒)에서 일어나고 치료는 장중경(張仲景)보다 정밀한 것이 없다’고 하였으니, (상한론)113방은 물에 수원(水源)이 있는 것과 같이, 한토하삼, 화해온보(汗吐下滲, 和解溫補)를 총결하여 변화시키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선언하였다. 저자인 서병효가 직접 작성한 '경험고방요초서(經驗古方要抄序)'에서 그의 의학사상과 주안점을 읽어 내보도록 하자. 아래는 원문을 다시 새겨본 내용으로 이전에 알려진 내용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서두에서부터 직설화법으로 일관되게 전개된 ‘백병상한설(百病傷寒說)’이라 할 수 있는데, 그는 첫 문장에서부터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 문장이 너무 압축된 형태로 기술하다보니 다소 해석의 표현이 바뀔 수도 있겠지만, 아래 마치 법조문의 부칙처럼 대비된 문장의 의미를 살펴보면 저자가 상한의 제반치법을 음양표리허실의 강령으로 개괄하고 이런 의미에서 모든 잡병증을 상한치법의 범주에서 논할 수 있다고 강조하고 있음을 살펴볼 수 있다. 곧 “○(상한론치법) 397법은 옷에 깃이 있는 것과 같으니, 음양표리허실에 지나지 않을 따름이다”라고 하였다. 이어서 “○ 그러므로 모든 병은 상한(傷寒)의 무리이다. 병에 대하여 증상을 논함에는 반드시 먼저 내상(內傷)과 외감(外感)을 나누어야 하니 의학의 큰 대강을 분명하게 함이다. 외상(外傷)으로 인한 한열(寒熱)은 쉬거나 그치는 적이 없고 내상(內傷)으로 인한 한열은 때로 일어났다 때로 그쳤다 한다. 외상에는 손등(手背)에서 열이 나고 손바닥(手心)은 뜨겁지 않으며, 내상에는 손바닥에서 열이 나고 손등에서는 열이 나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질병, 음식으로 먼저 다스린 후 약에 의지 위의 글에서 첫 단락은 ‘故百病皆類傷寒’이란 글을 푼 것인데, “모든 병은 유상한(類傷寒)이다”라고 옮길 수도 있겠지만 정상한증과 감별해야 하는 유상한증과 개념상 혼란이 야기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유상한증이란 병증명을 피하기 위해 좀 더 풀어서 해석하는 방편을 택하였다. 이어지는 구절에서도 기존의 해석과는 조금 달리 보았는데, “상한육경형증(傷寒六經形症)에 이르러서는 고서(古書)에 의거하여 기록하였으니, 지혜가 있는 사람이라면 헤아려 사용할 것이다. 그러나 음양(陰陽) 병증이 전경(傳經)하며 변이(變移)하고 거꾸로 뒤집히는 즈음에는 비록 의학에 뛰어난 사람이라 하더라도 손을 쓰기 어려우니, 하물며 의학을 (제대로)공부하지 않은 사람이야!”라고 말하였다. 이상이 저자 서병효가 주장한 ‘백병상한설’의 요지이다. 아울러 이 책에는 별도의 목차가 구성되어 있진 않다. 하지만 본문 상단의 여백에는 각 병증각문이 시작되는 첫 구절 위에 해당 부분의 제목을 눈에 잘 띄도록 적시해 놓았다. 따라서 독자는 손으로 장을 넘겨가면서 빠른 시간에 원하는 부분을 찾아볼 수 있는 것도 이 책만의 특장이라 할 수 있다. 한편 이 책의 전반적인 체제는 강명길이 지은 『제중신편』의 구성과 흡사하다는 것이 중론이다. 다만 처방은 상당 부분 선별하여 발췌했기에 전체적인 분량은 매우 축소되어 있는 양상을 띠고 있다. 다만 앞서 제시된 백병상한설에 이어 두 가지 측면에서 기성 방서와는 차별점이 있다. 그중 하나는 ‘식치 우선’이다. 역시 서문에 말하기를, “의서에 이르기를, ‘임금과 부모에게 질병이 있으면 먼저 음식으로 다스려 본 다음에 바야흐로 가히 약에 의지할 수 있다’ 하였고, 전(傳)에서 “부모가 질병이 있을 때, 용렬한 의원(庸醫)에게 (치료를)맡기는 것은 불효”라고 하였으니, 방약을 쓸 때 어찌 삼가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음양표리(陰陽表裏)를 논하지 않고서도 이로움만 있고 해가 없이 효과를 드러낼 수 있는 약들을 옛 의방서(古方)에 의거하여 기록하였다”고 하였다. 『經驗古方要抄』, 민중에게 최소한의 자활책 제시 또 하나는 향약단방을 채록한 것이다. 자서에서 “『의학입문』에서 단행(單行)해야 한다는 약과 한 숟가락만 써야 한다는 말을 살폈다. 또한 구급(救急), 해독(解毒)에 쓰이는 단방(單方)을 베껴두고 쉽게 알 수 있고 쉽게 얻을 수 있는 약들을 널리 채집하고 간략하게 모아서 한데 합해 하나로 엮어 우리 가족들과 여러 친우들에게 알려주고자 한다”라고 밝혔으니 그가 이른바 일초일약(一草一藥)하는 향약정신에 입각하여 단방을 많이 채록해 두고 누구나 손쉽게 쓸 수 있기를 바란 점이다. 이 점은 전에도 여러 차례 말한 바 있거니와, 조선 초기 『향약제생집성방(鄕藥濟生集成方)』에서 내세운 ‘쉽게 얻을 수 있는 약물, 이미 경험한 의술(易得之物, 已驗之術)’로 대표할 수 있는 점이 향약의학의 가장 큰 특징이다. 따라서 이 책에서 보이는 ‘易知易得之藥을 博採集略’했다는 기본정신은 조선시대 의학사를 관통하는 향약의학의 기조와 분명하게 궤를 같이 한다고 할 수 있다. 특히 권미에 실려 있는 단방편은 전반부 각 병증 치료편에서 한문투 원문을 표점조차 없이 그대로 실은데 비하여, 한글로 된 구결을 사이사이에 넣어 좀 더 읽기 쉽게 배려한 점을 볼 수 있어 이 책의 독자층을 미루어 상정해 볼 수 있다. 즉, 이 책은 저자가 전업의원의 전문가 진단을 전제로 서술한 것이 아니라 가정에서 누구나 사용해 볼 수 있도록 일반 독자를 의식해 저술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구황실에서 3품관인 전의장까지 오른 고위직 의관 출신이 왜 이런 대중용 의약서적을 펴내게 되었을까? 저자 서문이나 본문 속에서는 저간의 사정을 짐작하기 어렵다. 하지만 식민지 수탈과 무리한 전쟁으로 인한 피해를 고스란히 떠안아 초근목피로 연명해야 했던 조선 민중들에게 애시당초 보호막을 기대하기 어려웠으며, 그들에게 최소한의 자활책이란 아쉽게도 이런 방식의 의약지식에서 구할 도리밖에 없었던 것이리라. -
고전에서 느껴보는 醫藥文化 - 29안상우 박사 한국한의학연구원 동의보감사업단 한의학, 전염병 극복의 역사 코로나 감염 상황이 한참 치성해져 3차 대유행으로 치닫고 있었을 때, 원격 화상회의 방식으로 진행된 제31회 한국의사학회 정기학술대회는 매우 엄중한 방역상황을 고려할 때 열의가 없었다면 불가능했기에 가까스로 치러진 대회였다. 더구나 동시기에 비해 상황이 한결 나았던 춘계대회조차도 열리지 못한 형편이었으니 말이다. 시국이 시국이니 만큼 학술대회 주제도 시의적인 여건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애초 학술대회 주제로 예정했던 것은 ‘한의학, 전염병을 마주하다’였다. 기조발표는 연세대 이현숙 교수의 ‘동아시아 전염병의 유행과 벽온방의 발달’로 문을 열었다. 이어 주제발표에서는 ‘한국 전염병 치료 인물사를 논함’(경희대 김남일 교수), 그리고 ‘사암침법의 전염병 치료’(사암침법학회 정유옹 원장)라는 주제로 특화된 발표를 이어 가기로 준비하였다. 그런데 정작 대회에 임박해 자료집을 만드느라 분주했던 즈음, 이미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개최한 테마전 주제가 ‘조선, 역병에 맞서다’였음을 상기하였고, 다른 한편 전염병이든 역병이든 그와 맞서야할 의학의 역할이 길가다 우연히 마주친 것처럼 느슨한 표현을 써서는 긴박한 현실상황을 반영하기엔 미흡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해서 한동안 머리를 부여잡은 끝에 오늘 이글의 주제로 삼은 것과 동일한 ‘한의학, 전염병 극복의 역사’로 바꾸게 되었다. 세조, 조선시대 방역전문서 『창진집(瘡疹集)』 간행 이와 같이 대회 직전에 주제를 바꾼 것은 발표내용도 있지만, 평소 전통의학 문헌의 태반이 역병과 돌림병을 치료하느라 만든 방역전문서요, 가장 흔한 종류 역시, 마진이나 두창, 콜레라, 장티푸스, 학질, 폐결핵 같은 전염성 질환에 대한 치료방책을 논한 것이기 때문이다. 수적인 측면에서 뿐만 아니라 현존하는 『향약집성방』이나 『의방유취』 같은 거대방서나 의학전서류를 제외한다면, 단일 전문의학서로는 ‘구급방’, ‘태산집’과 더불어 ‘창진방’ 같은 방역의서를 가장 많이 간행하였고 비중 또한 높다. 현재 기록된 바로는 세종대에 이미 위에 기록한 ‘구급방’, ‘태산집’, ‘창진방’이 간행되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고 세조대에 이르러 『의방유취』 교정 과정에서 도출된 것으로 보이는 『창진집(瘡疹集)』이 실물로 전존하고 있다. 필자는 오래 전 박사과정에서 『의방유취』를 주제로 연구를 진행하면서 당시 발견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이 세조대 『창진집』을 정밀 분석하고, 『의방유취』 와 상세 대조 분석한 바가 있었다. 구급방, 태산집, 창진방 등 의료구제책의 표상 그 결과 놀랍게도 『의방유취』의 소아 진두문의 내용과 세조대 임원준이 펴낸 『창진집』의 내용이 체제만 달리했을 뿐 거의 모든 본문의 내용이 여기서 도출되었음을 발견하였다. 이 과정은 소략하게나마 당시 본인이 연재하던 칼럼(고의서산책 39회, 의방유취 편찬의 열쇠-『瘡疹集』, 2000.7.24.일자)에 소개한 바 있으나 정작 이 획기적인 발견은 타인의 논고에 편입되어 도용되는 바람에 뇌리 한 편에 상처로 남고 말았다. 필자는 그 후로도 본문을 번역하는 한편 많은 시간을 들여 당시로선 아무 누구도 돌아보지 않았던 한국의 고대 전염병 치료에 대한 탐색을 거듭했었다. 하지만 오늘과 같이 역병이 온 세상을 덮치리라 상상이나 했겠는가. 그래서 코로나 감염을 계기로 그때 흥분과 열정에 넘쳐 들여다보았던 『창진집』을 다시한번 살펴보기로 하였다. 이 조선시대 방역전문서를 간행한 세조는 드라마나 사극에서는 정치적 야심이 많아 조카를 폐위시켜 죽이고 왕위를 찬탈한 비정한 인물로 그려져 있다. 하지만 수양대군시절부터 세종임금 아래서 의서를 강독할 정도로 의약지식에 해박하였으며, 즉위 후 얼마 되지 않아 습독청에 의서습독관(醫書習讀官)을 두었고 부왕대에 이미 완성한 『의방유취』를 다시 꺼내 오류를 교정하는 작업을 지시하였으며, 당시 예문관지제교로 있던 임원준과 이조참의 이극감을 불러 바로 이 책 『창진집』을 펴내게 하였다. 이예손의 교정을 마치고 서문이 붙여진 것은 1457년 4월 하순이니 이 책은 거의 세조의 등극과 함께 개시한 대민구제책의 첫 성과라 할 수 있다. 뒤이어 세조 8년에는 의서습독관에 대한 권징(勸懲) 조건을 정할 때 아예 이 책을 습독의서의 하나로 정하였으니 세조가 얼마나 이 책에 관심을 기울였는지 짐작할 만하다. 그 후로도 1471년(성종2) 의원취재(醫員取才) 고강서(考講書) 가운데 하나로 이 책을 채택했으며, 중종조에 이르러서는 당대의 명신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 1478~1543)이 백성들의 풍속을 교화시키기 위한 교육서로 『오륜행실도(五倫行實圖)』를 언해하여 펴낼 때, 그 전범으로서 세종대에 펴낸 구급방, 태산집, 창진방 간행을 사례로 들면서 한글로 이 책들을 다시 펴낸 사실을 서문에 남겼다. 이 때 펴낸 책들은 아쉽게도 지금 전하지 않으나, 훗날 선조 말년에 이르러 허준에 의해 다시 언해본 구급방과 태산집요, 두창집요 등이 간행되는 것으로 보아 이 3가지 분야의 전문의서는 조선 초기로부터 역대 조정에서 대민 의료구제책의 표상처럼 작동한 것으로 보인다. 이 책의 구성에 대하여 간략하게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상중하 3권으로 구성된 이 책은 서문에 이어 본문에는 상권에 두창과 마진에 대한 역대 의가들의 병인, 병기, 분류, 증상과 치법 등을 논한 제가론(諸家論)이 실려 있고 중권과 하권에 단계별 치법과 치료처방이 수록되어 있는데, 변이증상에 따라 차례대로 예방(豫防), 발출(發出), 화해(和解), 구함(救陷), 소독(消毒), 호안(護眼), 최건(催乾), 멸반(滅瘢), 그리고 통치지제(通治之劑)와 금기로 나뉘어져 있다. 코로나 사태, 전통의학의 치료경험을 도외시 게다가 여기 실린 치료대책 안에는 고려시대 현존 최대 분량의 향약의서인 『비예백요방(備豫百要方)』에 수록된 소아 완두창 치료법과 부록으로 고려~조선초기로 이어지는 시기 ‘본조경험방(本朝經驗方)’이라는 이름의 창진 치료 의안(醫案) 17조목이 실려 있어 의학사적으로 엄청난 가치가 온존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누군가 요즘 전 세계에 유행한 코로나 펜데믹 사태를 두고 말한다. 왕정시대에도 예기치 않은 돌발 상황을 맞이해서는 항시 과거의 통치사적과 사례를 상고하여 의사결정을 했는데, 현 사태를 맞이해서 전통의학의 치료경험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것은 무슨 이유에서인가. 백신이나 치료대책도 문제려니와 자가 격리와 오랫동안에 걸친 활동제한으로 갖가지 불안심리가 조장되고 공포감이 유발되고 있다. 직능에 따라 동참하여 함께 이기는 지혜가 필요한 시점이다. 어차피 이 전쟁 아닌 전쟁의 최종 승리자는 정부 당국이나 방역일선의 의료진만이 아니라 갖가지 피해와 제약을 감수하며, 묵묵히 참고 이겨낸 국민 모두의 몫으로 돌아갈 일이다. -
고전에서 느껴보는 醫藥文化 - 28안상우 박사 한국한의학연구원 동의보감사업단 지난 9월 개최한 ‘2020 동의보감 국제 컨퍼런스’에서는 여러모로 흥미로운 주제들이 많이 발표되었다. 신문지상을 통해 발표 개요가 보도되었으니 새삼 다시 옮길 필요는 없을지라도 그 가운데 ‘잉글랜드 주요 도서관 소장 한의고문헌 조사’에 관한 발표는 서양에 조선의료풍속을 전하는 귀한 그림이 소개되어 있어 좀 더 부연 설명을 덧붙일 필요가 있어 보이기에 이 자리를 빌려 몇 자 적어보기로 했다. 이번 발표는 사실 오래 전부터 기획되었다고 할 수 있는데, 발표자인 김현구 선생은 공중보건한의사 신분으로 한의학연구원에 처음 발을 디딘 이후 필자가 주도한 문헌연구팀에서 수련을 하는 한편 경희대와의 대학원 학연협동과정에 진학해 의사학 전공으로 연구와 학업을 병행해 왔던 터였다. 이후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영국 옥스퍼드대로 유학길에 오르면서 의료인류학을 연구하고 있다. 이에 가끔씩 안부를 전해오던 차에 연구교류 차원에서 현지에 산재된 한국의학의 흔적이나 동의보감을 비롯한 조선의학문헌의 소재를 파악하고자 현지조사를 당부한 바 있었다. 해외 유명 도서관들 한의약 고문헌자료 등 다수 수장 하지만 연초부터 불어 닥친 코로나 감염증 대유행의 여파로 왕래가 두절되고 해외조사가 불가능해짐에 따라 이미 기획되었던 동의보감 국제컨퍼런스를 비롯한 각종 국내외 행사가 공전될 위기에 놓였다. 이에 이런 초유의 상황을 극복할 대안으로 고안했던 것이 해외에 체류 중인 한국인 연구자나 현지에서 활동하는 국내외 전문가를 섭외하여 화상발표를 위촉하는 방법이었다. 여러 가지 측면에서 매우 제한적이고 번거로움이 뒤따르는 일이었지만 다행이도 상당수의 발표자들이 흔쾌히 응해주었고 이 조사 발표도 그 가운데 하나로 추천되었다. 아래는 본 발표의 요지를 간추린 것이다. 이번 발표에서 한의문헌자료를 수장한 기관으로 영국국립도서관(British Library), 케임브리지대 도서관 및 니덤연구소 도서관, 런던 동양·아프리카대학(SOAS) 도서관, 웰컴도서관(Wellcome Library), 옥스퍼드대 인류학박물관 등을 조사하였다. 이번 조사에서는 안타깝게도 현지 방역조치로 인해 대부분 실제조사가 어려워 매우 제한적인 정보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지만, 몇 가지 매우 소중한 자료를 확보할 수 있었다. 우선 동의보감이나 제중신편과 같은 우리가 익히 아는 의서 말고도 16세기에 간행된 신편의학정전, 경사증류대전본초, 의림촬요와 같은 희귀의서와 동인십이경혈도, 의가비결(이상 영국국립도서관 자료), 조선판 의학입문, 방약합편, 보유신편과 각종 필사본류(이상 니덤연구소 도서관), 중국에서 간행된 동의보감(1763년)과 제중신편(1817년, 이상 SOAS 도서관)의 존재가 조사에 의해 드러났다. 이렇듯 해외에 산재되어 있는 문헌자료 이외에도 19세기 후반에 수집된 약 수저 추정품과 인삼 실물(이상 옥스퍼드대 박물관) 등이 의미 있는 유물이라 할 수 있다. 영국 웰컴도서관, 침 놓는 장면의 의료풍속화 소장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눈길을 끄는 것은 18세기 후반에 조선에서 그려진 그림으로 추정되는 의료풍속화 한 점이다. 다리를 다친 환자에게 침을 놓는 장면(화제: 病脚解針)을 그린 이 그림은 현재 런던에 소재한 웰컴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데, 이곳은 제약기업이 후원하여 설립한 전문적인 의학사박물관과 도서관을 운영하는 곳으로 세계의 전문가들에게 이미 오래 전부터 정평이 나있는 명소이다. 이 그림은 한의약 관련 소재를 다룬 조선풍속화라 우선 흥미를 갖고 접근하였는데, 이미지 속 도서(圖署)를 상세히 대조하여 판독한 결과 조선시대 말엽에 활동한 풍속화가 기산(箕山) 김준근(金俊根, 생몰년 미상)의 작품으로 판정할 수 있었다. 그는 19세기 개항기에 서양선교사나 유람객들을 상대로 활약하면서 「기산풍속도」 첩을 남겼고 우리나라 최초의 천로역정(「텬로력뎡」) 번역서에 삽화를 그리는 등 국내보다는 유럽에 주로 명성을 떨쳤던 화가이다. 하지만 화가 김준근의 생애와 이력에 대한 기록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다만 그가 19세기 말 부산·원산 등의 개항지에서 풍속화를 그려 주로 서양인들에게 판매하였다는 사실만이 알려져 있다. 그가 그린 풍속화가 독일 베를린과 함부르크 민족학박물관을 비롯해 프랑스 파리 기메박물관, 미국 스미소니언 기록보존소나 영국·덴마크·네덜란드·오스트리아·러시아·캐나다·일본 등 전 세계 유수 박물관에 1500여 점이 남아 있고, 당시 조선을 방문한 서양인들의 각종 여행기에 삽화로 사용되면서, 조선의 풍속을 세계에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오늘날 주목을 받고 있다. 특히 1884~1885년까지 조선에서 거주했던 칼스(W. R. Cales, 1848~1929)의 『조선풍물지(Life in Corea)』나 게일의 『텬로력뎡』(1895년 간행) 등에는 김준근의 그림이 삽화로 들어가 있어 매우 유명하다. 더욱이 책 서문에는 원산에서 제작했음을 기록하고 있으며, 전해지는 그림 중에 원산에서 제작했다고 밝힌 것이 많아 김준근이 주로 원산에서 활동했음을 알 수 있다. 현재 제작 연대가 확인된 김준근의 작품들을 통해 그가 1880년대부터 1890년대까지 대략 10여 년 동안 원산, 초량 등 개항장에서 활약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고 하며, 제작시기를 알 수 없는 그림들 역시 이 시기에 그려졌을 가능성이 크고 늦어도 1910년 이후로 하한연대가 내려가지 않는다고 한다. 이러한 기산 풍속화의 특징은 농사와 누에치기나 베 짜는 모습, 혼례, 선비들이 기생과 노는 모습 등 18세기 풍속화에서 보이는 전통적인 주제의 그림이 다수 전한다. 이와 함께 19세기 말의 시대성을 반영하는 새로운 주제의 그림들이 등장하는데, 즉 수공으로 물건을 제작하고 물건을 파는 장면 등이 이전보다 종류나 수량 면에서 확대되고 형벌·제례·장례 장면 등 예전에는 찾아볼 수 없는 소재들이 등장한다. 기산풍속화는 민족지적 성격을 띠고 있어 당시 민족학이나 민속학에 흥미를 가진, 미지의 나라 조선의 풍속에 호기심을 갖고 알고자 하는 서양인들로부터 관심을 이끌었다고 알려져 있다(이상 민족문화대백과 참조). 의약 소재도 조선의 풍습과 함께 서양에 전파돼 따라서 그가 개항기 전후로 조선의 풍습이나 문화를 지구반대편 서양에 알린 전파자로서 잘 알려져 있었지만 정작 의약에 관한 소재를 다룬 것은 보지 못했었는데, 이번에 처음 선보인 것이다. 필자 또한 오래 전부터 기산을 비롯한 풍속화 속에 그려진 조선시대 의약관련 풍모를 찾아보려 애써왔던 터였기에 더욱 반갑기 그지없었다. 그림에는 갓을 쓴 장년의 의원이 두발을 질끈 동여맨 나이어린 총각의 다리에 침을 놓는 장면이 그려져 있다. 버선발인 병자는 바지를 무릎 위로 걷어 왼쪽 다리를 드러낸 채 의원의 손길에 몸을 맡기고 있다. 이를 악물고 아픔을 참아내며 두려움을 이겨내려고 애쓰는 표정이다. 짐짓 의연한 척 하고 있지만 두 팔을 웅크리고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려 외면하고 있는 모습에서 병자의 심리 상태를 읽어낼 수 있다. 이에 비해 의원은 익숙한 투로 가벼운 손놀림을 보이며, 호침으로 족삼리혈 쯤으로 여겨지는 부위를 찔러 수기조작을 시행하고 있다. 약간 미소를 띠고 있는 그의 모습에서 너무 걱정하지 말라는 듯 언질이 주어졌음을 감지할 수 있다. 바닥에는 병자의 풀어헤친 버선 댓님이 놓여 있고 의원이 앉아있는 발치에는 침통으로 보이는 물건이 놓여있는데, 사혈침이나 절개도 같이 좀 더 크고 굵은 침이 삐죽이 머리를 내밀고 있다. 배경이 그려져 있지 않고 두 주인공만 확대된 이 그림을 통해 우리는 백수십 년 전 조선의원이 침 치료하는 시술현장에 가까이 다가선 듯 착각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
고전에서 느껴보는 醫藥文化 - 27안상우 박사 한국한의학연구원 동의보감사업단 긴 장마 끝에 청명한 가을을 맞이하게 되었다. 예로부터 우리 민족은 봄부터 이어진 신고의 나날을 견딘 끝에 수확하는 기쁨을 돌아가신 조상들의 음덕으로 여기고 모두 함께 나누고자 추석에 성대한 명절상 차림을 준비했다. 하지만 올 추석에는 유례가 드물게 오래 지속된 역병 탓에 고향방문이나 성묘도 미뤄야 할 참이니 답답하기 그지없다. 올 봄에 처음 건너와서 본격적으로 유행하기 시작한지 반년을 넘기도록 쉽사리 수그러들 줄 모르는 기세에 이제 해를 넘기게 될 것이라는 예측이 우세하다. 상황이 이러다보니 감염을 막는 일도 시급하려니와 생업에 지장을 받고 집밖 출입마저 자유롭지 못해 우울해진 사람들의 심리상태가 불안하기 짝이 없다. 마침 필자가 맡은 이번 학기 강의주제가 한국의 의안(醫案)을 발굴하는 연구에 대한 것이어서 여러 문헌을 찾아보다가 삼국시대에 있었던 희한한 우울증 치료 사례를 기록한 기사를 읽게 되어 독자들과 함께 살펴보고자 한다. 삼국사기 열전(列傳)편, “龍齒湯을 써야한다” 김부식(金富軾, 1075~1151)이 지은 『삼국사기』에 사마천(司馬遷)이 지은 『사기』처럼 열전(列傳)편을 두었는데, 우리가 잘 아는 김유신을 필두로 을지문덕, 거칠부, 이사부, 장보고 같은 위업을 남긴 장수와, 박제상, 계백 같은 충신, 강수, 최치원, 설총 같은 문장가와 학자, 백결선생이나 김생, 솔거와 같은 예술가, 게다가 후삼국시대의 주역으로 패권을 다투었던 연개소문, 궁예, 견훤과 같은 패왕들에 이르기까지 50여 사람이 등장한다. 다만 아쉬운 것은 『사기』 편작창공열전에서처럼 의가류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렇지만 이 열전 가운데 녹진(祿眞)조에는 기막힌 의안(醫案)이 하나 등장한다. 그 개략은 다음과 같다. “녹진은 23살에 벼슬길에 올라 내외의 여러 관직을 거친 끝에 집사시랑(執事侍郞, 侍中의 차석급)에 올랐다. 헌덕왕은 대를 이을 아들이 없어 아우인 수종을 세자로 삼고 궁에 들게 하였다. 이 무렵 각간 충공이 상대등이 되어 정사를 논하다가 병에 걸리게 되었다. 관의(官醫, 원문에서는 國醫라 하였음)를 불러 진맥을 했더니, 심장에 병이 들었으므로 용치탕(龍齒湯)을 써야한다고 하였다.” 얘기를 좀 풀어서 해보자면, 아마도 당시 벼슬을 논하는 일(인사전형)을 진행하다가 주위로부터 여러 청탁과 외압을 받아 걱정이 많았을 충공은 장기간 휴가를 얻어 문을 걸어 잠그고 두문불출하게 되었던 것이다. 녹진이 찾아가 문안을 여쭈는데, “상공이 아침 일찍부터 저녁 늦게까지 쉬지 않고 정사를 돌보다가 풍로(風露)에 촉상하여 영위(榮衛)의 조화를 잃고 지체(四肢)의 편함을 잃었기 때문이 아닙니까”하고 물었다. 龍齒는 진경 작용 뛰어나 鬼魅같은 병증 사용 충공이 어찌된 연유인지는 모르나 정신이 혼미하고 답답하고 불안할 따름이라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녹진은 “상공의 병환은 약이나 침만으로 다스려지지 않고 지극한 말과 고매한 담론(至言高論)으로 단번에 깨칠 수 있습니다”라고 하면서 목수가 집을 지을 때, 각기 크고 작은 재목에 따라 도리나 서까래로 나눠쓰듯이 나라의 인재도 재주와 능력에 따라 역할과 직임을 나누어 써야 한다고 충언을 하였다. 이에 깨우침을 얻은 충공은 어의의 왕진을 사양하고 곧바로 입궁하여 국왕을 알현하고서 직언을 올린 다음 다시금 정사를 돌보기 시작하였다. 충공이 우울증에 시달린 원인은 아마도 살아있는 권력인 국왕과 후계자로 지명된 세자의 주변 세력으로부터 야기된 복잡한 갈등관계로 빚어진 것이리라. 결국 국왕에게 간언을 올리고 세자를 설득하여 당면문제를 정면 돌파하고 나서야 마음의 병을 내려놓을 수 있었던 셈이다. 용치탕(龍齒湯)은 심허증을 다스리는 처방으로 여기서 용치란 용의 뼈라고 알려진 용골의 일종이다. 고생대 맘모스나 포유동물의 오래 된 화석 파편으로 탄산칼슘이 주성분을 이룬다. 『동의보감』 탕액편에 용골은 오장의 사기를 몰아내고 정신을 안정시켜주며, 설사나 몽설, 출혈, 과도한 한출을 수렴하고 빈뇨를 다스리는데 쓰인다고 적혀있다. 기원이 석회화된 동물의 뼈인지라 불에 달구어 곱게 가루 내어 채질해서 써야 하는데, 그중에서도 용치(龍齒)는 진경, 안혼(安魂)하는 작용이 뛰어나, 전간(癲癎)이나 경광(驚狂), 귀매(鬼魅) 같은 심각한 병증에 사용한다고 했다. 이 시대의 心醫가 절실하게 필요한 시점 한편 『의방유취』 오장문에서 이 용치탕을 찾아볼 수 있는데, 심허(心虛)로 인한 경계(驚悸), 수와불안(睡臥不安)하는 증상에 쓴다고 하였다. 처방 구성에는 용치와 인삼이 주재이고 작약, 담죽여, 당귀, 반하곡, 복신, 강활, 목향, 모근 같은 약재가 들어간다. 10가지 약재를 가루 장만하여 은을 달인 물에 생강과 함께 넣어 달여 먹는다. 고관귀족이 아니면 아무나 쓸 수 없는 처방일터인데, 적응증으로 보아 각간 충공의 증상이 어떠했을 지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감염병 예방차원에서 밀접접촉을 피하기 위해 장기간 사회적 거리두기와 외부활동이 제한되다보니 남녀노소 계층을 가리지 않고 사회 전반에 걸쳐 집단우울심리가 만연하고 있는 실정이다. 마냥 집안에 틀어박혀 참고 견디라는 것은 애초 무리생활을 전제로 문명을 발전시켜온 인류에겐 질병감염에 못지않은 끔직한 형벌로 느껴질 수도 있겠다 싶다. 국민 우울감을 일거에 해소시킬 수 있는 용치탕 같은 명약, 녹진과 같이 말 못하고 고통 받는 심중을 어루만져줄 이 시대의 심의(心醫)가 절실하게 필요한 시점이다. -
고전에서 느껴보는 醫藥文化 - 26안상우 박사 한국한의학연구원 동의보감사업단 아직 바이러스 감염병 유행이 종식되지도 않았는데, 지루한 장맛비에 태풍까지 더해져, 온 국토가 침수되고 산사태가 빈발하여 인명이 희생되는 일이 이어지고 있다. 연중 지속된 역병에다 사상 초유의 기록적인 폭우로 인해 첨단을 달리던 과학문명도 제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온종일 이어지는 재난특보와 수해상황을 지켜보다 옛 사람의 문집 속에서 수재에 관한 몇 편 글에 주목하게 된다. 『심재집(心齋集)』(5권2책)은 조선 후기 이곤수(李昆壽)의 시문집인데, 1967년에 이르러서야 손자인 이경의(景儀)가 편집하여, 간행한 것이다. 그래서 겉모양은 도포를 입은 선비인데, 본문은 단장한 새색시처럼 깨끗하고 산뜻한 표정이다. 저자는 조선 후기 매산 홍직필과 노사 기정진에게 배운 성리학자이기에 수많은 시문과 경의문답 등으로 가득 차 있다. 하지만 필자가 눈길을 둔 글은 권3 잡저(雜著)에 수록된 「치홍수론(治洪水論)」과 「도산도수론(導山導水論)」, 그리고 권4 통문(通文)에 실려 있는 「압록원방천조주역사행나걸시문(鴨綠院防川造舟役事行儺乞施文)」등이다. 물의 자연스런 성질을 파악하는 것이 선결요점 온통 뉴스를 장식하고 있는 관심사가 홍수와 수해인지라 먼저 홍수론을 읽어보니,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혀있다. “洪이란 글자는 가로지른다(橫)는 뜻과 같다. 물이 옆으로 흐르거나 거꾸로 나오는 것(橫流而逆行)을 홍수라고 한다. 홍수는 큰물(홍수洚水)을 말하니 물이 가로질러 역행해서 홍수가 나면 난리가 일어나니 다스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다스린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고 자문한다. 그에 대한 답은 역시 물의 자연스런 성질을 파악하는 것이 선결요점이다. “물의 성질은 본디 아래로 흘러내려가는 것이니 내려 보내는 것이 본성을 따르는 것이다. 본성에 따르면 다스려지고 이를 무시하면 어지러워진다.” 그가 진단한 홍수의 원인과 치법은 다음과 같다. “하류가 좁게 막혀있어(壅塞) 본성을 따르지 않아 어지럽게 된 것이니 치수란 하류의 옹색한 곳을 터주고 물의 본성에 따라 이끌어주면 그만인 것이다.”라고 하였다. 토기가 왕성한데 수로가 미진하면 물이 범람하고 옆으로 흘러나오게 된다고 했으니 인간이 자신의 편의만을 위해 산길을 끊고 물길을 막아 도로를 만들고 물이 모이는 곳에 제방을 막아 아래로 흘러갈 물을 가두어 두었으니 범람을 자초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물이 바다로 흘러 내려갈 길로 이끌어야 하듯이 세상일의 흐름도 이와 같아 자연스러움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 글의 요지이다. 옛 사람의 지혜, 치산치수론 여전히 유용한 사실 우리 의학에서도 이와 비슷한 논의가 있으니 허준이 펴낸 『찬도방론맥결집성』에 다음과 같은 말이 적혀 있다. “홍(맥)이란 물과 같으니 혈과 기가 몸 안에서 흐르는 것과 다르지 않다. 물이 물길을 따라 흐르지 않고 역행하여 홍수가 되는 것이니 오직 기혈은 평상을 유지하여 사나워지지 않도록 해야 하는데, 사열(邪熱)이 편성(偏盛)하게 되면 영위가 갈 길을 찾지 못해 기가 막히고 혈이 흘러넘치게 되는 것이다(氣壅而血溢). 그러므로 그 맥동이 깊이 누르거나 들어 올리거나 모두 극대하여 피부에 살짝 갖다 대기만 해도 물이 뒤섞인 느낌이 드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앞의 글에 이어 「도산도수론(導山導水論)」에서는 물을 다스리는 치수법이 도수론이라면 산도 역시 이끌 수 있다는 도산론(導山論)을 주장하고 있다. “물이란 움직임이 있어 흘러갈 수 있으니 동쪽으로 길을 터주면 동쪽으로 흘러가고 서쪽으로 물길을 트면 서편으로 흐름이 일어나는 것이다. 산은 움직임이 없어 옮겨갈 수 없으니 동쪽 산을 서쪽으로 옮길 수 없다. 그러므로 이끌어 옮길 수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으로 산을 이끌 수 있단 말인가. 산에는 근맥(根脈)과 조리(條理)가 있어 물길에 원맥(源脈)과 주리(湊理)가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길로 말미암아 이끌 수가 있는 것이다. 반드시 산을 옮기고 물길을 바꾸는 것을 말함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산자락을 마구 깎아 길을 내고 물을 막아 가두는 것이 개발의 상징이자 발전상으로 내세우던 현대문명이 자연이변 앞에서 속수무책인 것을 보면 옛 사람의 지혜가 담겨있는 치산치수론이 여전히 유용한 논의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압록원방천조주역사행나걸시문(鴨綠院防川造舟役事行儺乞施文)」은 저자가 사는 고장 앞을 흐르는 압록원 방천을 막아 홍수의 피해를 줄이는 한편 통행의 편의를 제공하기 위해 배를 건조하자는 내용으로 발의한 통문이다. 기와 혈 다스려 영위가 잘 순환될 수 있게 양생에 주의 압록원은 전라도 곡성현에 있는 나루터로 물이 푸르고 물고기가 흔해서 오리와 철새가 많이 날아들어 압록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지만 원래는 섬진강과 보성강의 푸른 물줄기가 합류되는 지점이라 합록(合綠)이라는 이름이었다고 한다. 오래 전부터 마을을 이루고 살았던 고장인데, 주변에 높은 산과 깊은 골짜기가 많아 물이 불어 넘치고 길이 끊기는 일이 많았던 모양이다. 제방을 쌓아 강물이 넘치는 것을 막고 배를 만들어 촌민들이 물고기를 팔아 소금을 사갈 수 있도록 나루터를 조성하고 배를 고쳐서 오고갈 수 있도록 길을 터주자는 건의문이다. 물길을 터주는 일이나 제방을 쌓는 일이나 구명선을 준비하는 것과 같은 재난대비책은 큰일이 닥치기 전에 준비해 두어야만 하는 일들이다. 내 몸 안의 기와 혈을 다스려 영위가 잘 순환될 수 있도록 양생에 주의를 기울이고 건강을 관리하는 일은 누구나 각자 힘써 행해야할 스스로의 재난대비책이라 할 것이다. -
고전에서 느껴보는 醫藥文化 - 25안상우 박사 한국한의학연구원 동의보감사업단 연초부터 유행하기 시작한 우한폐렴이 전 세계로 확산되면서 코로나 감염병으로 규정되더니 한해의 절반이 지나도록 그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필자도 역시 대외활동이 여의치 못해 올해 연구 사업이 몇 달째 진척이 더디고 공전을 거듭하고 있어 답답한 심정을 금할 길이 없다. 예전에 비해 생각지도 않게 많은 시간을 연구실에 갇혀 지내거나 책상 앞에 머무르다 보니 평소 눈길이 가지 않던 이런 저런 책들을 찾아보면서 울적한 심사를 달래곤 한다. 우연히 들춘 『손암집(損菴集)』은 1749년(영조 25)에 처음 간행된 고본인데, 오랜 세월에 책장은 습기를 머금어 들러붙어 있고 원형이정으로 꾸며진 4책 가운데, 마지막 1책만이 겨우 생존해 초췌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 책은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학자인 조근(趙根, 1631, 인조 9∼1690, 숙종 16)의 문집으로 그는 효종대 삼전도에서 후금(後金)에게 당한 치욕을 설욕하고자 북벌을 주장하며 정국을 이끌었던 우암 송시열(宋時烈)의 문인이기도 하다. 이미 발표한 바 있듯이 우암 송시열은 장암 정호, 주촌 신만 등의 제자와 함께 비밀리에 군사를 양성할 계책을 세우는 한편, 팔도의 명의들을 모아 전쟁과 기근에 대비한 『삼방(三方)』을 편찬하게 하였다. 다행히 이 책의 요체를 뽑아 만든『삼방촬요(三方撮要)』가 발견되어 2017년 연구원에서 국역본을 발행한 바 있다. 「풍계쇄언」, 전염병과 대기근 처참한 광경 기록 이런 연유로 우암과 문하 제자들의 기록을 범상하게 넘겨보지 못하게 되었는데, 이 문집 『손암집』의 마지막 권 잡록(雜錄)에는 여러 유사(遺事)와 일화를 적어놓은「풍계쇄언楓溪瑣言」이란 필기가 들어 있었다. 내용의 대부분은 신해년(辛亥 1671, 현종12)을 앞뒤로 경향각지에서 발생한 여역(厲疫), 즉 전염병의 유행과 대기근으로 인한 처참한 광경을 경험하고 기록한 것이었다. “신해년 봄 도성의 백성들이 크게 굶주려 한성부와 훈련원에 동서소(東西所, 동서진휼소)를 설치하고 죽을 나눠주었다(진휼청 당상 민정중이 주관하였다). 또 선혜청에 한 곳을 더 두어 상평청 당상 김만기로 하여금 주관하게 하였다.” 여기까진 역사시대에 흔히 볼 수 있었을 풍경으로 보이고 그다지 긴급해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어지는 다음 글을 읽다보면 어느덧 절박하기 그지없던 당시 정황에 전율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 뒤로 굶주린 백성[饑民]들이 날로 늘어나고 역병에 서로 감염되어[熏染成癘] 죽게 된 자가 날마다 수백 명을 헤아려 수레에 시체를 실어 성 밖으로 나르느라 길목이 막힐 지경이 되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경술년에 시작된 역병과 기근, 인명 피해 부지기수 이에 상황이 악화되자 서쪽으로 진휼소를 홍제원(弘濟院)으로 옮기고 동쪽으로는 흥인문(지금의 동대문) 밖으로 옮겼다(아마도 지금의 한약상가 인근의 보제원 진제장일 것으로 보인다). 또 강도(江都, 강화부)에서 쌀 1만여 석을 날라 오고 호남과 관서 지방 창곡(倉穀)을 배로 옮겨 용산에 쌓아두고 도성의 백성들에게 골고루 나눠주었다. 이때 조근은 비국(備局, 비변사) 낭청(郎廳, 비변사·선혜청·준천사·오군영 등의 실무담당 종6품 관직)으로서 이 일을 겸직하게 되었다고 술회하였으니 직접 이 참상을 목도하고 겪은 바를 기록한 것이 분명하다. 이때 성안의 사람들을 가구별로 대중소로 구분해서 진휼미를 지급하였는데, 훈련도감과 어영청(御營廳)의 군병들로 하여금 각각 담당 관서에서 명부를 작성하여 일일이 집집마다 보내주고 한군데도 빠짐이 없도록 하였다. 이에 도성 안 오부(五部)의 방민(坊民)을 조사해 보니 294호 3만251명이었으며, 재상과 궁가(宮家, 왕실과 종친), 부유한 자들은 대상에 넣지 않았다고 밝혔다. 이 해의 기근은 조선팔도가 모두 같았으나 경기지방과 경상, 전라 양남지방이 더욱 심했다고 한다. 도성에선 3개소에서 만여 사람에게 지급했고 호남에선 22만1800여 명, 영남에선 19만9천여 명을 구했지만 그 와중에 죽은 자도 부지기수이고 살아남은 자도 역시 겨우 목숨만 이어갈 정도였다. 심한 경우, 지방에선 이것마저도 원활치 않았던 듯 염병에 걸려 죽은 자식을 삶아먹거나 실성하여 자식을 죽이는 경우가 있었다고 하니 얼마나 끔찍한 상황이었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왕조실록』을 비롯한 역사기록을 참고해 보면, 이때의 기근과 역병의 참혹함은 전 해인 경술년(1670)에 이미 시작하여 각도마다 전염된 자가 1000여 명에 달했으며, 죽은 자도 수백 명을 헤아렸다. 또 해를 넘기자 우역(牛疫)이 병발하였고 폭설과 사발만한 우박이 쏟아져 동사자가 수백 명이요, 소와 말을 비롯해 개, 돼지에 이르기까지 모두 감염되어 쓰러졌다고 기록하였다. 결국 도마다 병에 걸려 죽은 자가 만여 명씩이요, 굶주려 죽을 받아먹은 자가 각도에 20만여 명을 헤아렸다고 하니 지금 현시대에 봉착한 코로나 감염사태는 비관할 정도로 최악의 상황은 아닌 셈이다. 역병의 유행과 기근, 그 어떤 재해보다 훨씬 참혹 그해 겨울, 한해를 거의 다 보낸 섣달 20일에 영의정 허적(許積)이 병을 이유로 파직을 간청했으며, 임금은 “짐이 (사방을 둘러보니) 마을마다 집집마다 황량하기 그지없어 의약이 미비된 것이 심히 염려되니 안심할 수 있게 들여오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이듬해 여름철까지 3년간에 걸쳐 끈질기게 조선 사람들을 괴롭혔던 역질이 주춤해 질 때까지 염병에 걸려 고생하고 죽은 자가 부지기수일 것이며, 굶주리고 유리걸식하게 된 양민을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과거 역사를 돌이켜 보건대, 역병의 유행과 기근, 그것은 오히려 전쟁이나 그 어떤 재해보다 훨씬 더 참혹한 것이었다. 또 돌림병의 유행에 의약을 구비하여 생명을 구제하고 생업을 잃고서 침식을 걱정해야 하는 백성들의 민생을 염려하여 부세를 감면해주고 재난을 넘겨줄 구호책을 마련하는 것은 위정자와 목민관들에게 맡겨진 당연한 책무이자 도리로 인식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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