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남일 교수
경희대 한의대 의사학교실
1980년 3월22일 공포된 개정 약사법 시행규칙 제11조 1항 7호인 “약국에는 재래식한약장 이외의 약장을 두어 이를 청결히 관리할 것”을 1993년 1월30일 보사부가 약사법 시행규칙 개정 법률안 입법예고를 통해 삭제를 기도하면서 시작된 제1차 한약분쟁은 한의계에 큰 상처를 남기는 시발이 됐다.
이 조항의 삭제는 약사의 한약 취급을 공인하는 개악으로 간주한 한의계는 강력 반발했다. 한의사협회는 1993년 3월17일 제38회 정기총회에서 집행부를 불신하고 회장 허창회, 부회장 서효석·박순희의 새로운 집행부를 구성했다. 4월2일에는 롯데호텔에서 공청회를 개최했고, 국민건강 및 한의학수호위원회(국한위)를 결성했다.
5월20일 전국한의과대학교수협의회 소속 교수들은 국회 앞에서 약사법 관련 항의집회를 개최했다. 6월1일에는 보사부 내 한방의료 담당관실이 발족했으며, 6월10일 MBC-TV 시사토론에는 허창회 회장, 홍원식 경희대 한의대 교수가 출연해 약사의 한약조제 부당성을 지적하는 한편 23일 한의대생 학부모 김모씨는 안필준 보사부장관 등 전·현직 고위간부 6명을 직무유기로 고발했다.
7월5일 23인의 사회 각계 인사들로 구성된 약사법 개정추진위원회가 열렸으나 합의 도출에 실패했고, 7월17일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등 시민단체들이 약사법 개정을 위한 토론회를 개최했다. 9월8일에는 한의학 살리기 범한의계 궐기대회가 여의도 광장에서 열렸는데, 5000여 한의사와 한의 가족, 대한한약협회, 전국한의과대학교수협의회 교수, 전국한의대학부모협의회 회원, 의료사고가족협의회 회원 등 1만여명이 참여한 초대형 궐기대회였다. 1993년 9월14일 약사법 개정안이 입법예고됐다. 그러나 한의사, 약사 양 단체 모두 그 내용에 반발했으며, 20일 약사법 개정에 대한 경실련 합의안이 발표됐다.
1994년 3월24일 제39회 한의사협회 정기총회에서 약사법 시행령 및 시행세칙 개정 대책을 집행부에 위임했다. 1994년 5월16일 보사부가 약사법 시행령 및 시행규칙을 발표했는데, 한약사제도의 신설, 한약사 필수과목으로 본초학 등 20개 과목, 약사의 한약조제시험 과목 등이 골자였다.
1995년 9월16일 한약학과 설립 촉구 및 한조시 관련 비상결의대회가 과천종합청사 앞 운동장에서 열렸다. 다시 2차 한약분쟁이 촉발된 것이다.
12월17일 제1차 한조시가 실시됐다. 제2차 한조시는 1996년 4월19일 공고되어 5월19일 실시해 2만3360명이 합격했다. 수일 전인 5월3일 한약조제약사 대량배출 음모 분쇄를 위한 전국한의사 비상총회가 과천종합청사 앞에서 열려 300여명이 집단 삭발했다. 6월23일 3차 한조시가 실시돼 1566명의 합격자가 나왔다.
한약분쟁이 격화됨에 따라 사회 각층의 성명서가 발표됐다. 1996년 6월22일 대한불교 조계종 중앙종회가 ‘한의약분쟁에 대한 우리의 입장’을 발표했고, 7월2일에는 전국불교운동연합, 실천불교 전국승가회, 전국승가대학인연합, 대한불교청년회에서 ‘한약분쟁에 대한 우리의 입장’, 7월3일 참여민주사회시민연대에서 ‘한의대생 집단제적 위기사태에 대한 성명서’, 7월6일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가 ‘한약조제시험 부정의혹과 한의대생 제적 사태에 관하여’를 발표하였다. 7월22일 제180회 임시국회에서 김홍신 보건복지위원과 이수인 교육위원의 발의로 실시된 ‘전국 4000여 한의대생의 집단제적사태를 피하기 위한 국회의원 서명운동’에 여야 국회의원 131명이 서명했다.
1996년 9월6일 민족의학사수를 위한 범한의계 공동투쟁본부가 집회를 개최하고, 명동성당에서의 철야농성이 시작됐다. 전국의 한의대생 가운데 미등록 제적이 된 학생은 120명에 달하게 되었고, 본과 4학년 학생들은 한의사국가고시의 거부를 결정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