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먼저 소설 같은, 아니 소설과 현실이 섞인 혼돈스러운 이야기로 시작한다. 현재 한의원에서 가장 많이 처방되는 약이 육미지황탕(六味地黃湯) 이다. 중국 송나라 1114년 『소아약증직결 (小兒藥證直訣)』 책에 처음 소개된 한약처방으로 숙지황, 산약, 산수유, 복령, 목단피, 택사 6종의 한약재로 구성되어 있다. 900년 전 한약처방이 현재 한국에서 다빈도 처방 1순위이고, 제약회사에서 한약제제까지 생산되니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어느 날 원장님이 환자로 부터 전화 1통을 받았다. “원장님, 이번에 먹는 한약이 전 보다 효과가 없어요. 혹시 다른 한약을 주셨어요?”, “아니, 전에 지어드린 것과 똑같은 한약입니다.” 원장님 생각이 복잡해진다.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2개월 째 같은 증상으로 똑같은 육미지황탕 원방을 처방했는데? 변증을 잘못할 것인가? 그 사이에 체질이 바뀌었나? 치료도 잘되고 있었다. 환자가 가져온 전탕액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환자에게 증거를 어떻게 내 놓을 것인가?
그런데, 환자에게서 생각지도 못한 의견을 듣는다. 자기가 복용한 한약이 원장님이 처방한 한약인지 궁금하다고 한다. 당연히 육미지황탕이다. 그렇지만 증거를 달라고 한다. 이 전탕액이 육미지황탕의 진위여부를 어떻게 증명하여, 환자에게 증거를 내 놓을 것인가? 한의학적으로 해결이 가능한 일인가? 본초 방제학은 인간의 오감에 의한 맛(五味), 냄새(五臭), 색깔(五色), 음양오행(陰陽五行), 육기(六氣)에 의한 기미론(氣味論) 밖에 없다.
또 6종 한약재는 각 기미 (氣味)가 있는데 함께 전탕한 육미지황탕의 전체 기미는 있는가? 교과서 이론으로는 해결이 안 될 것 같고, 본초학, 방제학 교수님께 전탕액을 맛보게 하여 가부 의견을 들을 것 인가? 아니면 과학적으로 해결하는 방법은 있는가? 원장님은 이래 저래 알아보고는 식약처가 지정한 한약 시험검사기관이 4개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중 한국한의약진흥원 품질인증센터에 육미지황탕이라는 것을 밝히고(밝히지 않으면 접수가 불가능할 것이다), 전탕액에 대한 품질 검사를 의뢰한 결과 로가닌 및 모로니시드 성분이 검출되지 않아 산수유가 들어있을 확률이 없다고 통보가 왔다. 즉 산수유가 빠진 육미지황탕을 환자에게 복용시킨 것이다. 원장님은 정직한 사과와 함께 새 육미지황탕을 조제해 드리고, 직원들에게 철저한 탕전 관리를 당부했다.
한약은 화학물질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을 명확히 각인
세상이 바뀐 것이다. 옛날에는 한약을 첩지에 싸서, 20첩씩 끈에 묶어주면, 환자가 집에 가서 약탕기에 달일 때는, 첩약이 증거이므로 이런 사고가 일어날 수 없었다. 이제는 모두가 구분할 수 없는 까만색의 액제 제형일 뿐이다. 의약품은 화학물질이다. 의약품 관리는 이 화학물질을 관리하는 것이다.
한약재는 형이상학의 기미도 있겠지만 형이하학의 화학물질로 구성되어 있다. 한의원의 한약재는 식약처 품질기준에 맞는 규격 한약재를 구매한다. 대한민국 의약품을 관리하는 법전인 『대한약전』 및 『생약규격집』에 한약재 규격 기준 표시가 있다. 숙지황은 5-히드록시메틸-2-푸르알데히드가 0.1% 이상을 함유하고, 산수유는 로가닌 및 모로니시드가 합하여 1.2% 이상을 함유하고, 목단피는 패오놀 1.0% 이상을 함유해야 규격품으로 인정한다. 그러나 그 외 산약, 복령, 택사에 포함된 화학 물질에 대한 지표 성분 정량은 정하지 않았다.
이들 화학물질들이 한약재를 증명하는 측정 지표 물질이지만 효능을 나타내는 물질은 아니다. 현재는 『대한약전』 기준으로, 단지 이 3가지 화학물질로 육미지황탕을 증명하게 되어 있다. 하지만 학계 보고에 따르면, 각 한약재마다 수십 개의 밝혀진 화학물질이 있고, 이외에 알 수 없는 수 많은 화학물질의 복합체가 육미지황탕이다. 2만5천명의 한의사들이 각자 6종 규격 한약재로 육미지황탕을 끓이면, 성분 프로파일 (profile)은 비슷하겠지만, 각 성분 함유량 기준으로 본다면 2만5천개의 각기 다른 육미지황탕을 환자에게 복용시키는 것이다.
한약을 과학화하겠다는 인식을 가진다면, 한약은 화학물질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을 명확히 각인되어야 한다. 그래서 이해관계가 전혀 없는 제 3자에게 육미지황탕과 쌍화탕 전탕액을 보여주고는, 오른쪽이 육미지황탕이고 왼쪽은 쌍화탕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한약 연구의 시작이고 끝이다.
산수유가 육미지황탕 효능의 다 일까?
현재 화학물질에 대한 분석 방법과 장비는 다양하다. 인기있는 미국 드라마 CSI 과학 수사대에서 미량의 혈흔과 타액, 머리카락 하나라도 있으면, 최첨단 분석과학 장비를 통해 사건을 해결해주는 내용이다. 한약 물질 분석 방법에는 박층 크로마토그래피(TLC), 가스 크로마토그래피(GC), 고성능 액체 크로마토그래피(HPLC), 질량 분석법(MS), 핵자기공명 분광법 (NMR) 등이 있다. 전탕액 1봉지는 아주 다량의 흔적이라 볼 수 있다.
이러한 분석 방법을 통해서, 한약재의 중금속, 농약, 지표물질 검사를 통한 규격 한약재 합격 여부, 전탕 전후 유해물질 잔류량 연구, 한약재 포제(炮製) 연구, 탕전 시 시간, 온도, 압력에 따른 전탕액 연구, 전탕팩 보관 유통 기한 연구 등 한약재와 한약처방 속의 화학물질 변화를 분석하여 결론을 추측한다.
또 더 나아가 한약의 효능을 일으키는 활성 성분 주인공이 누구인지도 이 방법으로 밝혀낸다. 한약재와 한약처방에 포함된 화학물질에 대해서 알고 싶으면, 한국한의학연구원에 발간한 『표준한약처방』이나 전통의학정보포털 ‘오아시스’를 검색하면 쉽게 알 수 있다.
이 소설 같은 이야기, 여기서 끝이 아니다. 원장님은 이번 사건으로 학교시절 건성으로 배운 『일반화학』, 『천연물화학』이 절실히 필요한 지식이라는 것을 깨달아, 한 득도(得道)하셨다. 그리고 2개월 복용하면서 계속 증상이 호전되고 있는 환자가 산수유 하나 빠졌다고, 약효가 떨어졌다는 사실에 의심을 품기 시작하였다. 군신좌사(君臣佐使)가 안 맞아서 그런 것일까? 아니면 산수유가 육미지황탕 효능의 다 일까? 새로운 비방 (祕方)이 탄생하는 순간이다.
(본 글은 저자의 소속기관이나 한의신문 공식 견해가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