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본란에서는 여한의사들이 진료 현장에서 겪는 크고 작은 에피소드를 소개한다.
고희정 대한여한의사회 정보통신이사.
나의 직장은 빠른 걸음으로 집에서 5분 거리에 있는 한의원이다. 평소 아침은 10년차 동료인 직원의 독촉이 없다면 더없이 청아한 가을 하늘과 바람을 몸과 마음속에 그득 담고 동네를 돌아다니며 상가 문을 열고 있는 사장님들과 인사도 하고 아이들 등교를 돕고 느려진 걸음으로 귀가하는 학부모들과 담소를 나누며 시작한다. 서로의 안부를 묻고 우리 동네에 새로운 소식은 없는지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출근길에 활력을 얻는다. 그 힘 덕분일까? 한의원 문을 열 때는 어느 환자가 어떤 불편함으로 제일 먼저 오시나 궁금하고 살짝 설레기도 한다.
1999년 한의사가 된 첫해에는 ‘환자오셨어요’ 하는 소리에 얼마나 긴장했는지 퇴근까지의 하루가 너무 길었고, 다음날 더 아프다고 찾아오면 어쩌나 걱정도 꽤 했었던 것 같다, 그 무시무시한 환자들은 자기 식으로 젊은 원장을 평가도 하고 원장에게 조언도 꽤 많이 해줬는데, 이제는 자식의 어린 자녀를 데리고 친척집에 방문하듯 지나는 길에 들러 인사를 한다. 작은 한의원이라 환자수는 많지 않았겠지만 20년이라는 시간을 펼쳐보니 많은 분들이 떠오른다.
어느 날 점심시간 비닐봉투 가득 도라지를 담아 오신 팔순의 할머니가 생각난다. 자리에 앉기가 무섭게 누군가에 대한 찰진 욕을 30분쯤 하시던 당신은 지치셨는지 잠시 머뭇거리다 “보약이 얼마유?” 하고 물어보셨다. 그 당시 셜록홈스의 직관을 부러워하던 때라 오감을 동원해 어른을 살피는데, 그 분은 자신에게 만원도 쓰기 아까워하시는 그 많은 우리네 어머님 중 한 분이셨다. 평소 원장이 즐겨먹는 대보탕을 한잔 드리고 힘드시면 또 오시라고 말씀드리니, 욕쟁이 할머니는 간데없고 미소 띤 여인이 나를 보고 있었다. 그 날 이후 어르신은 문턱이 높을까 걱정했던 한의원에 가끔 들리셨고, 다음 계절에는 자녀분들이 또 그 다음 계절에는 수험생 손자들이 내원했다. 이제 어르신은 중증 치매로 나를 기억하지 못하시지만, 자녀 손을 잡고 오실 때 면 처음 만났을 때 미소로 인사하신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가고 부모를 잃은 다른 자녀들은 힘이 들고 가슴이 아파 잠을 잘 수가 없어 내원을 한다. 내가 해주는 건 그리 많지 않다. 치료실 환자 곁에서 잠이 들 때까지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거나 눈물을 닦아주고 기분 전환할 수 있도록 여러 이야기들을 나눈다. 환자들이 진심으로 고맙다 말할 때면 과거 몇 번이고 한의사를 그만두고 싶을 때 힘이 되어 주신 스승과 같으신 선배들이 생각난다, 반백의 나이라 철이 드나싶다!
그 중 한 분은 우천 박인상 교수님이다. 이제는 우리 곁에 안 계시지만 지금의 동의과학연구소의 시작이 되어주시고 한의학에 한결같이 성실하셨던 분이다. 치료에 자신이 없어 고개 떨군 내게 “아침 먹었어? 나두 잘 몰러~그런데 이렇게 한번 해봐. 조금 나을거야. 계속 공부해. 그래야 실력이 늘지. 돌팔이라고 누가 비난해도, 무시하지 말고 환자에게 도움이 되는 거면 배워~앞으로는 마음에 병이 있는 환자가 많아 질거야. 시대를 읽을 수 있어야해. 그래야 환자를 치료하지!”하곤 하셨다. 그때 그 말씀을 귀가 아닌 가슴에 담았어야 했는데...한의사로서 오랜 진료에서 나오는 혜안을 가지신 어르신이 그립다. 그래도 제자 분들이 계속해서 연구를 하시고 있어 든든하고 감사하다.
또 다른 인연은 이정변기요법을 근간으로 한의 상담 치료학회의 뿌리를 만들어주신 서대현 원장님을 만나게 된 것이다. 환자인 타인에게 집중하고 그들에게 이로운 행위를 하려고 노력하는 생활이 자연스러워질 때 쯤, 지쳐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서글픈 감정이 들었던 적이 있다. 가끔 전해오는 동료의 부고소식은 더더욱 안타까웠고, 상처받은 나는 누가 치료해주나 의문이 들던 때였다. 이 때 인생 선배로서 서원장님의 간결하지만 정성스러운 말씀과 상담치료학회에서 동료 원장님들의 도움을 받아 스스로를 이해하고 위로받을 수 있었다.
한의사는 진료실 안팎으로 많은 인연을 만날 수 있는 멋진 직업이라 느끼는 요즘 시간의 단련으로 내 나이가 진료하기 딱 좋은 나이구나 느낄 수 있었다. 서툰 글 솜씨로 용기내기에도 좋은 나이일지 모른다.
요즘 세간에 힘이 되기보다 걱정을 안겨주는 소식이 많아. 이런 소식에 눌려 소소한 기쁨을 놓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또 이전에는 나라를 위해 목숨을 건 의병들처럼 한의계의 불꽃이 되어주셨던 많은 동료 선배들이, 21세기에는 작은 역할들을 정성껏 하시는 멋진 동료와 후배들이 많음에 감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