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의신문=민보영기자]‘오렌지 쥬스를 마신다는 게/커피가 쏟아지는 버튼을 눌러 버렸다/습관의 무서움이다(중략)/돈만 넣으면 눈에 불을 켜고 작동하는 자동판매기를/ 매춘부라 불러도 되겠다/황금교회라 불러도 되겠다/이 자동판매기의 돈을 긁는 포주는 누구일까 만약/그대가 돈의 권능을 이미 알고 있다면/그대는 돈만 넣으면 된다(생략)’
시인 최승호의 시 ‘자동판매기’다. 시 속 화자는 먹고 싶지 않은 음료 버튼을 잘못 누르고는 황망해 한다. 그리고 의문을 품는다. 자신이 원하는 바와 상관없이 ‘돈만 넣으면 눈에 불을 켜고 작동하는’ 자동판매기는 ‘돈의 권능’을 깨우치기 위해 만들어진 것만 같다.
돈만 넣으면 나오는 게 커피든 주스든 상관 없다는 자동판매기의 태도는 지난 18일 보건복지부(이하 복지부)가 발표한 ‘원격화상 의약품 판매시스템’ 도입안을 떠올리게 만든다.
복지부는 이날 원격화상 통신 기기로 약 구매자와 약사가 상담한 뒤 약을 구입할 수 있는 원격화상 통신기기를 설치하겠다고 밝혔다.
판매되는 약품은 처방전 없이 조제 가능한 일반의약품이다. 이 같은 내용이 담긴 약사법 개정안은 오는 10월 발의될 예정이다. 이 개정안은 버튼을 잘못 눌러 원치 않은 음료를 먹게 만든 ‘자동판매기’를 양산할 수 있다.
첫째, 일반의약품의 안전성 문제가 있다. 식품의약품안전처 온라인 복약지도방 자료에 따르면 일반의약품에 해당하는 아세트아미노펜 진통·해열제는 권장용량 이상 복용할 경우 간 손상을 일으킬 수 있다. 급성 간 부전, 수치 이상(異常), 심하면 사망에 이를 수 있다고도 했다. 비타민 A가 함유된 한 의약품은 임신 전 3개월부터 임신 초기 3개월까지 일정량 이상을 복용한 여성에게 기형아 출산율을 높일 수 있다는 보고도 있었다.
둘째, 복약 지도자와 환자 모두의 오판 가능성을 키울 공산이 크다. 환자는 약사와 통화하지 않을 경우 일반의약품에 대한 모든 유의사항을 자신의 특정 증상에 견줘볼 수 있어야 한다. 그만큼 정제된 정보를 갖고 있어야 하며, 그 정보가 자신에게 해당되는 점을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
결국 환자 스스로가 전문가 수준의 정보를 갖고 있어야 한단 얘기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한 경우가 더 많다. 이렇게 환자가 안전하지 않을 수 있는 일반 의약품의 오용 가능성을 키운다. ‘유선’으로 이뤄지는 복약 지도 역시 환자의 정확한 상태를 알 수 없게 만든다. 유능한 전문의라도 환자의 상태를 잘못 판단할 가능성이 커진단 의미다.
의료계도 이 사안에 팔을 걷어부치고 나섰다. 한의사, 치과의사, 약사, 간호사 등이 참여하는 보건의료 4개 단체(대한한의사협회, 대한치과의사협회, 대한약사회, 대한간호협회)는 이날 공동성명서를 통해 “의약품 자동판매기의 경우 약화사고 시 책임소재가 불분명하며 기계오작동, 의약품 변질 등의 우려가 크다”며 제도 도입에 대한 반대의사를 분명히 했다.
보건의료 4개 단체는 또 “국가의 보건의료제도는 국민의 생명과 직결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정작 서비스 제공의 주체인 보건의료전문가의 목소리는 철저히 외면당하고 있는 실정”이라면서 보건의료계의 목소리를 외면한채 제도 도입을 밀어붙일 경우 시민단체와 연대해 투쟁해 나갈 것임을 경고했다.
그나마 복지부는 만성질환과 원격진료자에 대한 ‘처방약의 택배배송 허용’은 받아들이지 않기로 했다. 처방약의 변질·오염 가능성과 약사의 복약지도 결여 우려 탓이다. 의약품의 안전성 문제와 환자 안전을 우선시한 결정이다.
이 뜻을 ‘원격화상 의약품 판매시스템’에도 관철시켜야 한다. 환자가 자신의 상태를 정확히 파악할 수 있도록 의료진과의 직접 상담을 확대하고, 의료진이 환자에 맞는 처방을 할 기회를 줘야 한다. 환자 안전 문제는 자동판매기가 보여주는 ‘돈의 권능’만으로 해결할 수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