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東西醫學은 患者들을 위해서 단결하자”
金永勳 先生, 1935년 ‘塔園夜話’란 글서 강조

[한의신문]
金永勳 先生(1882∼1974)은 호가 晴崗으로, 1882년 江華島 江華邑 官廳里 출신이다. 그는 인천에서 활동하던 名醫 徐道淳의 제자가 되어 한의학을 공부하였다. 1904년 최초의 근대적 한의과대학인 同濟醫學校가 설립되어 교수를 뽑자 이에 지원, 수석합격하여 都敎授가 되었다. 1909년에는 大韓醫士會라는 한의사 단체를 만드는데 관여하였고, 이후 일제 강점기에 접어들어서는 한의학의 부흥을 위해 노력했던 인물이다.
金永勳 先生은 1935년 창간된 『東洋醫藥』제1호에 ‘晴岡山人’이라는 필명으로 ‘塔園夜話’라는 제목의 글을 발표한다. 아래에 그 내용을 소개한다.
“問: 여보시오. 醫藥이란 人類의 生命을 救療하기는 마찬가지가 아니오? 그런데 왜 西醫學家는 漢醫藥을 輕視하고 漢醫學家는 西醫藥을 冷視하야 서로 自高自是로 互相軋轢하는 貌樣이 많으니 그게 무슨 까닭일까요?
答: 글쎄 말이오. 西洋의 비르호, 히포크라데스가 자기들의 曾祖父가 아니오. 東洋의 軒、岐、華、扁이나 張、劉、朱、李가 自己네의 外祖父가 아닌데 왜들 그리겠소. 다 각기 狹小한 腦 속에 先入見만 있어서 모두 ‘우리 성인(余聖)’으로 제것만 좋고 저만 잘났다는 것이지요.
問: 學術은 國境이 없다는데 西醫學者는 漢醫藥을 좀 硏究하고 漢醫學者는 西醫藥을 좀 硏究하야 東西와 新舊들 叅互하야 治療하야 주었으면 病者에게도 좋은 일이 아닐까요?
答: 그랬으면 족히 좋겠소만은 그렇지가 못하니 참 딱한 일입니다. 醫師뿐 아니라 저 相士나 卜士나 堪輿士나 또는 詩, 文, 書, 畵家 先生님들도 조금씩은 그러한 感이 不無한 모양입니다. 그러나 점잖은 선배야 그럴 理가 없겠지요. 그는 다 딴말이오. 아마 以後 차차 東西醫間에 참으로 큰 學者들이 나서 砂糖도 좀 먹고 소금(鹽)도 좀 먹어 보아야 달고 짠 것을 좀 알 것이지요.
問: 그런데 量狹한 의원들은 ‘卒討醫’라고 부르니 그게 무슨 말인가요“

答: 네-그렇지요. 將棋 못 두어 보셨구려. ‘車’란 놈은 鐵甲 탱크와 같아서 靑野千里를 縱橫馳騁하고, ‘包’란 놈은 飛行機와 같아서 九萬蒼空에 越山超海를 제 멋대로 飛翔하지만 ‘卒’이란 놈은 그저 거기서 한발도 더 뛰지 못하고 요리쓸고 톡치고 조리쓸고 톡치는 步卒이지요. 그래서 ‘卒討’라고 해서 量狹한 의원에게 그러한 名辭를 붙인 것이지요.
問: 그러면 또 서투른 의원들을 ‘돌파리 醫’라고 하니 그것은 무슨 말인가요.
答: 허허 참 그렇지요. 돌파리란 漢文으로 解釋하면 ‘掘石的’이지요. 이것은 堪輿士의 風水說에서 나온 말인데 아마 변변치 못한 地師들이 정작 穴은 못잡고 돌(石)만 판다는 말이지요. 그래서 딴 다리만 잡는 의원들에게는 돌파리란 名辭를 붙였나봅디다.” (필자 임의대로 일부 내용 현대어로 고침)
위의 글은 問答式으로 비유적으로 당시 의료계의 문제점을 꼬집고 있다. 첫 번째 문답은 양의사와 한의사 間의 사회적 갈등을 드러낸 것이고, 두 번째는 한의학뿐 아니라 시, 소설, 서화 등에 종사하는 문화계의 동서간의 소통 문제 부재의 문제를 이야기한 것이다. 세 번째 문답은 도량이 좁은 의료인들의 소통 부재를 비유적으로 장기판의 ‘卒’에 비유하여 ‘卒討醫’라고 부르는 것을 논한 것이다. 네 번째 문답은 ‘돌파리’라는 용어를 풀어서 설명한 것이다.
김남일 교수·경희대 한의대 의사학교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