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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06월 20일 (토)

[시선나누기-1] 무대는 어둡다

[시선나누기-1] 무대는 어둡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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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저온 보리한의원장


[편집자 주] 본란에서는 공연 현장에서 느낀 바를 에세이 형태로 쓴 ‘시선 나누기’ 연재를 시작한다. 문저온 보리한의원장은 최근 자신의 시집 ‘치병소요록’(治病逍遙錄)을 ‘생존신고요’ 공연에서 한의사가 자침하는 역할로 무대에 소개한 바 있다.


무대는 어둡다. 

눈길을 더듬어 단을 오르고 발바닥을 더듬어 가장자리를 가늠해야 한다. 천장에는 수십 개의 조명이 번호가 매겨진 채 매달려 있겠지만 때와 곳을 정해 그것들은 하나씩 혹은 둘, 셋씩 허락될 뿐이다. 바닥에는 조그만 십자 형태의 야광 테이프가 세 개쯤 붙어 있다. 무대 정중앙과 이삼 미터 앞, 뒤. 무대에 오르는 자가 역할에 따라 발끝을 맞춰서 서야 하는 자리다. 그마저 그 언저리까지 다가가지 않으면 눈에 띄지 않는다. 

막과 막 사이가 암전으로 어두워지는 것이 언제 어떤 이유로 시작되었는지 모르겠다. 눈을 감았다 뜨면 밤의 끝자락을 물고 새 하루가 와 있듯이 무대에는 새 시간, 새 공간, 새 사건을 위한 검은 커튼이 쳐진다. 암전이 끝나고 조명이 켜지면 거기 새로운 장면이 이미 준비되어 나타난다. 들숨과 날숨 같다. 시간을 흐르는 물살 위의 징검돌, 어떤 점프, 어떤 리듬, 새로운 악센트,  ‘그런데 말이야’의 ‘그런데’와 같은. 어떤 줄 바꿈. 


숨어 기다리는 나를 위해…

등장과 퇴장을 가린 채 무대는 다시 열리지만, 등장과 퇴장이 없는 것은 아니다. 역할을 뚝 멈추고 발소리를 죽여 무대를 벗어나는 조용한 퇴장이 있다. 소품을 챙기고 조명이 들어올 곳에 미리 나가 기다리는 분주한 호흡이 있다. 객석이 가까운 소극장 마룻바닥에서는 더욱 조심스러운 일들이다. 관객이 터져 나오는 기침 소리를 애써 누르는 것처럼.  

무대 오른쪽 가림막 뒤에 나는 숨어 있다. 검은 벽, 검은 막, 콩 세 알만 한 엘이디 등이 벽에 붙어 발밑을 희미하게 비춘다. ‘조고각하’(照顧却下). 나는 희미하게 웃는다. 벽 모서리에 작은 야광 테이프가 한 점 붙어 있다. 출입 때 방향을 가늠하게 해주는 표지다. 숨어 기다리는 나를 위해 무대 감독님이 간이의자 하나를 가져다준다. 의자에 앉는 대신 나는 소품들을 가지런히 올려놓는다. 침, 뜸, 알코올 솜이 담긴 트레이, 시집, 무대로 나갈 때 스위치를 올리면 되는 마이크, 그리고 흰 가운을 의자에 입히듯 걸쳐둔다. 이렇게 하는 것이 예의인 것만 같다. 그 곁에 나는 검은 그림자처럼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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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가림막 뒤에도 역시…

무대 건너 마주 보이는 곳에 바이올리니스트가 서 있다. 저 가림막 뒤에도 역시 콩 세알만 한 등이 켜져 있을 것이다. 바이올리니스트의 어깨와 다리가 희미하게 보인다. 공연 내내 그도 서 있다. 무대에서 잘 서 있는 것이 바이올리니스트에겐 중요한 일이라고 그는 내게 말한 적이 있다. 잘 서 있기를 바라는 사람은 무대 뒤에서 앉아 쉴 수 없다. 적어도 내 짐작으로는 그렇다. 등장이 빈번한 그는 나보다 더 예민하게 무대를 살필 것이다. 그리고 몇 걸음 조용히 걸어 나와 배우의 몸짓에 맞춰 팽팽한 현에 활을 떨군다. 징지지지지징……. 그는 즉흥연주가다.

“음악이 BGM으로만 소모되는 게 싫어요.” 

“그래서 저는 비지도 안 먹어요. 하하하.” 

유쾌한 그는 이 무대를 위해 동해로 달려가 파도 소리를 녹음해왔다. 그 위에 바이올린을 손으로 뜯는 연주를 덧입혀서 다시 녹음했다. 그리고 그 음악이 흐르는 무대 위에서 직접 바이올린을 켠다. 그 솔로 무대를 위해 파도 소리 위로 내 시집의 몇 구절을 낭독해서 얹은 것도 그다. 

“산다고 살았는데 산 것이 하루도 안 되는 것 같던 깨침에 대해서라면……. 욕지기가 치미는 몸뚱이 말고는 진실이랄 것 세상에 없던 그 황량한 축복에 대해서라면…….” 

아아, ‘오심’(惡心)이다. 그의 인생과 나의 삶이 동해의 파도 소리와 ‘오심’ 위에서 미묘하게 겹친다. 그리고 미어지는 듯한 선율이 흐른다. 그는 이 구절을 왜 골랐을까?

“하우스 오픈했습니다.”

“관객 입장 시작합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약속된 말과 몸짓

전날부터 시작된 무대 세팅과 리허설 위로 종소리가 울리고 조명이 꺼진다. 객석에서 간간이 들리는 의자 소리, 아는 얼굴과 모르는 얼굴들이 보내고 있을 조용한 눈빛, 어둠 속의 고요,  극장 안에 함께 있으나 가림막 뒤에 홀로 있는 고립과 적막. 

내게 주어진 무대, 내가 할 수 있는 약속된 말과 몸짓.

빈 무대를 가만히 넘겨다보는데 건너편에 서서 여기를 바라보고 있을 사람의 마음과 눈길이 느껴진다. 이럴 때 ‘기운’(氣運)이라는 말은 참으로 생생하고 절실하다. 

‘나는 지금 여기를 느끼고 호흡합니다. 나는 당신께 나의 기도와 기운을 보냅니다.’ 

그리고 콩 세알의 조명 아래 내 발을 본다. 

‘나는 쓰고, 나는 일하고, 나는 사람과 더불어, 지금 여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곧, 나는 저 무대로 걸어 나갑니다.’

 


인생에서 우연히 마주친 이야기처럼. ‘그런데 말이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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