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 인 수 교수
우석대학교 한의과대학 한방내과학
근거중심의학의 전반에 대해서 살펴보았으니 이제 EBM을 실제 임상에서 활용하는 것이 남았다.
어떤 문제에 부딪쳤을 때 이를 EBM을 이용하여 해결하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이같은 근거중심 진료의 첫 단계는 임상에서 생기는 의문점을 대답할 수 있는 질문으로 바꾸는 것이다. 메드라인에서 ‘고혈압’‘식이요법’을 검색하면, 1만여편의 논문이 나타나서 우리를 당황하게 한다(필자가 서두에서 EBM이 탄생한 배경이, 아이러니하게도 “의학정보가 너무 많아서”라고 한 것을 기억하기 바란다).
근거중심진료와 교육
이 경우에는 정보를 얻고 싶은 집단, 효과를 알고 싶은 치료방법, 비교하려고 하는 대상, 알고 싶은 치료 효과를 명확히 정의해야 한다(이를 흔히 ‘PICO(P: Patient, Population or Problem, I: Intervention, C: Compa rison, O: Outcome )’라고 부른다). 따라서 검색을 시작하기 전에 보다 구체적이고 핵심적인 주제어를 사용하여 질문을 만들어야 한다.
아울러, 현재 가지고 있는 질문이 치료, 진단, 예후 중 어디에 해당하는지를 확인해야 한다. 두 번째 단계는 질문에 근거가 될 수 있는 문헌을 찾는 것이다. 이 방법은 메드라인을 PICO를 이용해서 분석하거나 이차문헌을 활용하게 된다. 셋째 단계는 이렇게 찾은 근거를 분석하는 것이며, 마지막 단계는 근거를 요약하는 것이다.
근거중심교육은 이같은 근거중심의학의 활용방법을 의대생들이나 전공의 교육에 포함시켜서 이를 가르치는 것이다. 전공의를 대상으로 하는 근거중심의학의 활용법은 환자를 직접 대하는 많은 전공의들에게 다양한 정보접근 방법을 가르침으로써 양질의 수련 교육을 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또한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교육에서도 간단한 교육을 통해서 정보를 찾고, 활용하는 방법을 익힐 수 있다.
무더웠던 작년 여름 늦은 오후에, 일간지에 실린 기사 제목이 필자의 눈길을 끌었다. ‘금연침 유감’(한겨레신문 2003년 7월 14일)이라는 제목의 이 글은 가톨릭의대 이某 교수가 신문사에 기고한 글로 이 교수는 “금연침 시술은 과학적으로 효과가 불확실하거나 없다는 사실이 이미 밝혀졌다”고 전제하고, 보건복지부에서 무료 금연침 시술사업을 시행하고 있는 것에 대해 “이미 효과가 없음이 밝혀진 금연침을 국가적으로 시행하는 것은 잘못되었다”고 주장을 하였다.
그날 저녁 필자는 동료교수와 함께 작업을 시작하여, 이 교수가 인용했던 금연침 관련 문헌을 저술한 영국의 화이트 교수에게 메일을 보내고, 또다른 외국 문헌(금연침에 관련된 메타분석 문헌)을 인용하여 이를 토대로 신문사에 반론을 게재한 적이 있다(한겨레신문 2003년 7월 17일. 장인수, 김락형).
이 사건은 그렇게 마무리되었지만, 한편으로 이처럼 터무니없는 논리에 대응하기 위해서 외국의 연구자에게 메일로 확인을 하고, 외국 저널에 실린 문헌을 인용하면서 안타까운 생각도 들었다. 한의학을 방어하기 위한 근거를 밖에서 구해야 하는 현실이 아쉽게 느껴졌다.
이 조그마한 사건은 한의학에서 EBM이 왜 필요한가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이다. 한의학의 치료기술에 대한 이같은 비판은 이해의 부족에서 출발하지만, 일회성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도 계속될 수밖에 없다.
한의학에서의 EBM 활용
중요한 점은 연구자 개인이 신문에 기고하는 정도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한의학의 정체성을 흔드는 많은 임상연구들이 양방에서 나오면서 결국 국가정책의 방향이 영향을 받게 된다는 점이다.
올해 2월에 국립독성연구원에서 발표한 독성간염관련 보고 같은 경우가 그 예일 것이다. 부실하기 짝이 없는 이 보고서는 국가기관의 이름으로 제출되어 향후 지속적으로 재인용되고 국가정책에 반영될 것을 생각하면 안타깝다. 또다른 예를 찾아보자. 한의사협회 중앙보험위원회는 산재보험으로 우리의 영역을 더 확대하고자 애를 쓰고 있다.
교통사고 환자들은 골절보다는 연조직 손상이 더 많다.
이 분야야말로 한의학 치료기술의 우수성이 돋보이는 부분일 것이다. 그러나 산재보험에서 한방치료 범위의 확대를 요구하면, 부딪치는 한계는 과학적인 근거(evidence)이다.
치료하면 잘 낫는다, 환자가 통증이 빨리 가라앉는다는 말이 아니라, 구체적이고 객관적인 데이터를 요구하는 것이다. 물론 이밖에도 다른 장애요인이 많지만,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근거의 부족은 큰 장벽으로 남아있다.
이를 타파하기 위한 길은 우수한 양질의 연구를 우리 손으로 수행하고, 이를 근거로 싸워나가는 수밖에는 없다.
여기서의 연구는 실험적 연구가 아닌 임상연구를 말하며, 잘 짜여진 연구계획서(protocol)에 의해서 철저하게 준비하고, 정확한 상병명과 진단기준을 토대로 체계적인 연구방법, 공인된 척도와 평가기준에 의해서 평가된 올바른 결과를 도출했을 때에만 연구 결과가 과학적인 근거로 인정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다행스러운 점은 한의학계에서 최근 수년 사이에 전반적으로 우수한 임상연구가 눈에 띄게 증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임상연구를 직접 수행한 우수한 일차문헌들도 많아졌고, 아직 그 수가 많지 않지만 체계적 검토나 메타분석 논문 같은 우수한 이차문헌들도 발표되고 있다.
서병관 등(대한침구학회지 2004), 박성호(한방재활의학회지 2003), 전민정(동의대 학위논문 2002) 등은 체계적 검토(systematic review) 논문을 발표하였으며, 고성규 교수(내과학회지, 2002)는 질적메타분석 논문을 한방내과학회지에 발표하였다.
한의학 치료기술의 근거(evidence)로 활용될만한 좋은 책도 최근에 출판되었다. 일본동양의학회 EBM특별위원회가 펴내고 경희대학교 조기호 교수가 번역한 ‘한방처방의 EBM’ (고려의학)이 바로 그 대표적인 책이다. 2004년 5월에 발간된 이 서적은 22개의 각 진료과목별로 73편의 우수한 임상연구논문을 선별하여 한방처방의 치료 효과에 대한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
논문 한편 한편이 우수하고 연구방법론에서 참고할 가치가 큰 양질의 논문으로 임상시험을 준비하고 있거나 계획하고 있는 연구자들에게 많은 참고가 될만한 내용을 담고 있다.
논문들은 일본의 의학저널에 실린 것도 많지만, 西歐의 SCI급 의학저널에 게재된 논문도 많이 포함되어 있어서 각 질환에 따른 한약의 치료 효과에 대한 과학적인 근거로 활용가치가 크다고 생각된다.
EBM은 이제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굴러가고 있다. 이미 우리가 거부할 수도, 따르지 않을 수도 없게 되어버렸다. 한의학의 치료기술을 살리고 발전시키려면, 이를 증명하는 길밖에 없다.
한의학의 치료효과를 증명하기 위해서는 실험연구로도 증례보고도 나름대로의 가치가 있지만, 무작위대조임상시험(randomized controlled trials : RCTs)이 이미 EBM의 표준이다.
좋은 임상연구가 더 많이 발표되고, 우리의 손으로 만들어진 많은 자료에 의해서 한의학의 가치와 우수성이 재평가될 때, 주류의학으로서 당당하게 대접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묵묵히 일하는 임상연구자들이 더 많이 나오고, 우수한 임상연구가 더 많이 나와서 한의학의 밝은 미래를 활짝 열어주기를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