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희 한의대 심범상 교수
현재로서 ICD-TM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언급하기는 힘들다. 한중일의 의료 현실을 담은 내용을 기초로 합의를 통해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다만 중국과 일본의 사정을 참고하여 볼 때 예상되는 점을 언급하고자 한다.
ICD-TM의 내용과 추진 방향
우선 일본은 한의사 제도가 없고 의사가 진단하여 한약을 처방하며, 침구사는 진단을 할 수 없고 처치만을 담당하는 이유로 현재 일본의 한의학은 기존의 한의학 전통에서 진단분야가 결여되어 있다.
한국과 중국이 변증론치에 의한 임상이라면 일본은 탕증론치에 의한 임상인데, 우리나라에서는 약국에서 주로 이루어지는 형태 즉 양방 병명에 의한 진단하에 일정한 처방이 주어지는 식이다. 따라서 별다른 한의학적 분류체계의 개념이 없고 주로 제약회사에서 제제화되어 판매되는 처방의 목록이 매우 중요하다.
이번 회의에서 기대되는 일본의 역할은 개념 혹은 내용상에서의 기여라기보다는 전통적인 파트너쉽의 확인과 함께 경제적인 기여가 우선일 수밖에 없다. 또 회의의 진행도에 따라서 일본 특유의 꼼꼼함, 학문적 엄격성으로 한국과 중국의 분발을 자극하리라는 점 등이 예상된다.
일본이 만약 분류체계의 이론적 바탕을 무시하고 탕증론치 체계를 강하게 제안할 경우 국제합의라는 작업의 성격상, 느슨한 형태의 분류체계가 만들어지는 것도 배제하기는 어렵다.
중국의 경우에는 1995년 ‘중의병증(中醫病證) 분류와 코드’가 국가표준(GB/T15657-1995)으로 제정된 바 있으며, 중국측 회의참석자에 따르면 중국의 한방병원에서는 한명의 환자에 대해 우리나라의 KCD에 상당하는 CCD와 ‘중의병증분류’ 2가지를 동시에 코딩한다고 하였다. ‘중의병증분류’는 크게 내과(內科), 외과(外科), 부과(婦科), 아과(兒科), 안과(眼科), 이비후과(耳鼻喉科), 골상과(骨傷科)의 7개 과목에 691개의 질병 코드, 변증코드는 크게 병인(病因), 음양기혈진액담(陰陽氣血津液痰), 장부경락(臟腑經絡), 육경(六經), 위기영혈(衛氣營血), 기타 증후(證候)로 나뉘어 총 1,933개의 변증코드를 갖고 있다.
다만, 질병과 변증코드는 각각 별도의 테이블로 분리되어 있고, 양방 질병명과도 어떤 연계를 갖지 않기 때문에 환자의 진단명을 기입하는 사용자는 무척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으나, 어떤 의미있는 통계는 나오기 어려운 구조이다. 특히 국가보건행정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더욱 그러하다.
우리나라의 한의질병사인분류(KCD-OM)는 3단계의 코드체계를 갖고 있는데, 2번째 코드까지는 KCD의 양방질병명과 대응되도록 되어있고, 마지막 3단계에서 한의병명 혹은 변증명이 사용되고 있다.
현행 KCD-OM-2의 상당수 문제는 이 2단계와 3단계 분류에서 비롯하는데, 2단계는 분류가 중복되거나 대응구조가 1대1 대응이 아닌 일대다 혹은 다대다의 관계로 되어 있어 분류체계로서의 기본적인 조건을 구비하지 못하고 있으며, 마지막 3단계의 한의분류체계 역시 매우 엉성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를 들면 중복성에서, 창만(脹滿)은 ‘나14’, ‘라98’의 2개의 코드를 가지며, 식울(食鬱) 역시 ‘나13.5’, ‘라97’의 2개의 코드를 갖고 있다. 다대다 대응에서 ‘나02 간실증(肝實證)’과 ‘나04 간열증(肝熱證)’은 똑같은, 여러 개의 KCD 코드와 대응되고 있다. 이러한 문제 때문에 결국은 KCD-OM 역시 국가보건통계를 위한 질병분류로서 제 역할을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상, 한중일 삼국의 질병분류 코드를 살펴보면 각자 갖고 있는 문제가 많으나 한편으로는 각자의 장점을 잘 살림으로써 보다 진보한 분류코드를 만들 수도 있다는 희망을 갖게 된다. 즉, 중국은 한의질병의 분류체계에서 한국보다 그 체계성이 훌륭하다. 또 한국은 한의질병분류체계와 서의질병분류체계를 매칭한 분류체계를 갖고 있으며 이는 전술한 많은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한중일 간에 오직 한국만이 갖고 있는 소중한 경험이다.
ICD-TM은 결국은 질병현상이라는 보편적 사실을 보편적 질병인식체계로 표현, 즉 ICD의 체계내에서 표현되는 것을 목표로 해야 할 것이다. 이번 회의에서 한국의 경험이 없었다면, 작업의 추진을 결정함에 많은 주저와 큰 결심이 필요했을 것이란 점을 특히 밝혀둔다.
한편, 이러한 작업과 노력이 의료일원화의 불필요한 논란을 야기하거나 그러한 논란을 조장할지 모른다는 우려가 있을 수 있는데, 이는 단지 우려일 뿐임을 지적하고자 한다. 이는 마치 북한을 통해 중국이나 러시아로 철도나 고속도로가 개통되었다고 한국이 이들 나라에 편입되는 것이 아닌 것과 같은 이치이다.
국제한의학표준용어 혹은 국제한의학질병분류의 제정은 한중일과 세계 각국의 한의학 전공자 및 의학자들, 나아가 그 이용자들과의 원활한 의사소통을 이루고 이것이 다시 우리 한의학의 발전으로 피드백 될 것이기에 공동 노력을 하는 것이다.
향후 전망
한중일은 우선적으로 서로의 질병분류체계에 대한 내용을 검토하고, 평가하기로 하였다. 구체적으로는 일정한 양의 진단정보를 수집하여 평가하므로써 한중일간 분류체계의 실질적인 비교분석이 가능하도록 합의하였고, 이 과정에서 WHO-FIC의 개정위원회 위원장(2003-2004)으로 활동한 Roberts 박사(호주)가 전과정을 지도하기로 약속하였다.
Roberts 박사는 마침 현역에서 막 은퇴한 분이었기에 본 작업에 합류할 수 있었으며 덕분에 우리는 최고의 전문가와 함께 일할 수 있는 행운을 갖게 되었다.
향후 한중일 삼국의 분류체계를 이해하기 위한 자료를 검토하고, 각 분류체계에 대한 각국의 적절한 분석과 평가를 토대로 ICD-TM 제정을 위한 단계를 밟아 갈 것이다. 아직까지는 절차와 과정에 대한 합의와 노력을 진행하고 있으며, 이들 단계의 구체적인 모습이 무엇일지를 명확하게 예측하고 있지는 못하다.
다만, 이러한 전 과정은 각국 정부당국의 이해와 지원이 필요하며, 특히 통계청과 보건복지부의 협조가 없으면 제대로 진행되기 어려울 것이다. 또한 진행과정에서 한의사협회와 대한한의학회의 협조와 역할이 중요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