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申用漑의 醫方類聚論
김남일 교수(경희대 한의대 의사학교실)
申用漑(1463〜1519)는 金宗直의 문인으로서 1483년(성종 14) 사마시에 합격하고 1488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그 해 처음으로 승문원정자에 등용되었다. 1497년에는 檢詳이 되었다. 1502년 충청도수군절도사로 좌천되었다가 이듬해 형조판서를 거쳐 예조참판이 되었고, 1506년(중종 1) 중종반정 후 형조참판으로 서용되었으며, 이어 홍문관과 예문관의 대제학을 역임하였다. 1516년에 우의정에 오르고, 1518년 좌의정에 이르렀다. 기품이 높고 총명하여 문명을 떨쳤을 뿐만 아니라, 활쏘기 등 무예에도 뛰어나 문무를 겸비하였다. 인품 또한 꿋꿋하여 범하지 못할 점이 있어 당시 선비들의 중심 인물이 되었다.
申用漑는 1504년에 『醫門精要』의 跋文을 작성한다. 이 책은 『醫方類聚』를 활용도 높은 책으로 요약한 책이다. 발문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의문정요는 의방유취에서 기원하여 번잡한 것을 삭제하고 간결하게 만든 것이다. 의방유취는 무릇 266권으로 우리 세종대왕께서 처음 편집하셨고, 세조와 성종 등 몇 임금을 지나 책이 만들어졌다. 뭇 처방들이 갖추어 모아졌고 많은 증상들을 갖추어 놓고 있으니 진실로 醫家의 큰 지침을 가르쳐주는 것이다. 그러나 책의 규모가 크지만 인쇄는 적게 하여 우리나라와 외국에서 본 사람들이 드므니 의학을 하는 자들이 천착하는 것을 병통으로 여긴다. 우리 성종대왕께서 대전과 중궁전에서 봉양을 하셔서 진실로 효행이 하늘에 이르렀다. 무릇 오래 살면서 편안해지고자 하는 것에 그 다함을 하지 않음이 없어서 醫方과 藥經을 두루 보아 깊이 생각하셔서 백성을 어질게 하고 세상을 구제하고자 하는 생각을 마침내 적은 곳에서부터 먼 곳까지 이르게 하셨다. 의방유취가 호번한 것을 염려하여 요약하여 요점을 정리할 것을 생각하였으니 의사들이 쉽게 그 기술에 익숙해지고 사람들이 두루 볼 수 있기를 바란다. 이에 弘治 六年 癸丑(1493년)에 內醫院 都提調인 許琮에게 명령하여 그 번쇄한 것을 삭제하고 그 정수를 추려서 각결하고 쉽게 인쇄할 수 있고 요약되어 쉽게 익힐 수 있도록 하였다. 그 깍인 것을 덧붙이고 번잡한 것을 간결화시켜 총결하여 스스로 깊이 정리하여 醫門精要라는 이름을 하사하셨다. 편집이 거의 끝날 무렵에 허종이 서거하여 다시 兵曹參判인 權健과 吏曹參議인 金諶에게 명하여 상세하게 비교 교정을 가하였는데, 완성에 이르기도 전에 成宗께서 승하하셔서 교정을 수년간 멈추었다. 우리 主上殿下(연산군)께서 성종의 뜻을 좇아서 마침내 內醫院에 명하여 그 편집본을 교정하여 五十卷을 만들어 87門으로 나누게 하시고 나 申用漑에게 跋文을 쓰도록 하셨다.…”(필자의 번역)
『醫方類聚』는 세종 임금의 재위 중인 1445년 의관뿐만 아니라 집현전학사를 비롯한 문신들이 대거 참여하여 365권이라는 巨帙로 편찬된 동양 최대의 한의방서이다. 세종대에 初編된 의방유취(1443~1445년, 草稿本)는 교정의 미비와 365권이라는 방대한 분량으로 인해 곧바로 간행되지 못하고 세조대 교정과정(1459~1464년, 校正本)을 거쳐 성종대(1474~1477년, 初刊本)에 이르러 3년여에 걸친 판각작업 끝에 비로소 간행된다(안상우, 『醫方類聚』의 編纂과 朝鮮前期 의서, 한국의사학회지 제14권 제1호, 2001 참조).
『醫門精要』를 편찬하는 과정은 『醫方類聚』의 실용성을 강화시키는 과정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성종년간에 허종에게 명령하여 『醫方類聚』의 활용성이 강화되도록 국가적 조치가 이루어진 것이다. 이 때 이 목적을 위해 만들어진 『醫門精要』는 현존하지 않게 되는데, 이것은 이 책의 보전을 등한시해서라기보다는 이 책의 시대적 역할이 더 이상 없게 되었기 때문이라고 판단된다. 『醫方類聚』는 1610년 허준에 의해 『東醫寶鑑』의 완성에 기여하게 된다.
<-신용개의 의문정요발문이 나오는 그의 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