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의협이 집단 휴진도 불사하며 투쟁을 벌이는 등 시작부터 삐걱거렸던 원격의료가 시범사업조차 시작하지 못한 상태에서 무산될 처지에 놓이게 됐다. 이미 정부와 의협 간의 갈등의 골이 있는 대로 깊어져 향후 정책 추진마저 불투명해졌다.
의-정, 불안한 동거로 상호간 갈등의 골 깊어
지난해 말 복지부는 국정감사 보고 자료를 통해 의료인 간에 허용되던 원격진료를 환자와 의사로 확대하는 내용의 입법예고를 검토하면서 의료법 개정에 강한 의지를 보였다. 원격의료가 의료산업 육성의 핵심이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러자 지난 3월 의원급 의료기관들이 집단 휴진에 돌입하는 강수를 뒀다. 의협은 회원들에게 파업에 참여하라고 독려하는 등 벼랑 끝 전술을 구사했다. 결국 복지부는 의협이 ‘독점규제 및 공정거래에 관한 법률’ 제26조 1항 3호의 ‘사업자단체의 금지행위’를 위반한 것으로 판단, 공정위에 공정거래법 위반 여부에 대해 조사를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시범사업 시행 결과를 입법에 반영하는 선에서 가까스로 합의를 이뤘지만 이마저도 삐걱댔다. 정부와 합의를 주도한 노환규 회장이 탄핵을 당한 것. 시범사업 논의는 사실상 중단됐다.
결국 의정간의 불협화음으로 4월부터 6개월간 시범사업을 하려던 계획은 사업의 대상이나 범위 등 그 어떤 것도 구체화되지 않은 채 무기한 연기됐다. 복지부가 애초 원격진료라는 카드를 내놓고 정책을 밀어붙이려 한데는 의협 측에서 분명 이에 동조하겠다는 제스처를 취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제대로 된 내부 합의조차 없었던 의협은 갈지자 행보를 보였고 복지부는 질질 끌려다녔다. 결과적으로 복지부 혼자 헛발질만 한 셈이 됐다.
이번에는 원격 모니터링, 향방은?
졸속으로 추진됐던 원격 진료가 사실상 원점으로 돌아가자 복지부는 ‘원격 모니터링’ 시범사업을 대한의사협회에 제안하기에 이르렀다. 기존의 원격 진료에 포함됐던 의사-환자 간 ‘진단과 처방’이 아니라 ‘지속적 관찰’과 ‘상담·교육’ 에 초점을 두겠다는 것이다.
손호준 보건복지부 원격의료추진단 기획제도팀장은 지난 9일 “원격 진단과 처방을 의료계가 강력하게 반대하고 있어 우선 이를 제외한 범위에서 시행하겠다”며 “예를 들어 고혈압, 당뇨병 등 만성질환 재진환자의 경우 현재는 주기적으로 의료기관을 방문해 혈압과 혈당 등을 체크하고 있는데 지속적으로 관찰하고 그 결과에 따라 상담과 교육을 하는 것이 원격 모니터링”이라고 설명했다.
이에 따라 지난 16일 대한의사협회는 긴급 상임이사진의 서면의결을 거쳐 보건복지부에 원격의료 시범사업 설명회를 공식 요청한 바 있다. 하지만 지난 21일 오후 예정돼 있던 ‘원격의료(모니터링) 시범사업 설명회 및 긴급 대표자회의’를 당일 돌연 취소했다.
의협 관계자는 “정부가 추진하려는 원격모니터링 시범사업에 진단과 처방이 배제돼 있다 하더라도, 그 본질은 결국 원격진료에 이르기 위한 과정으로 볼 수 있다는 회원들의 의견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섣불리 설명회에 참석했다가 복지부 의도대로 끌려갈 수 있다는 것이다.
의협은 설명회 제안 철회에 이어 23일 상임이사회를 통해서도 시범사업 참여 여부에 대해 결론을 못 내린 채 “국회에서 입법 저지를 하겠다”는 기존 원칙만 앵무새처럼 되풀이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에 대해 양의사들의 평회원들로 구성된 평의사회는 성명서 발표를 통해 원격의료 시범사업이 무산된 것에 환영의 뜻을 밝혔다.
지난 22일 평의사회는 “국민건강을 보호해야 할 주무부서인 보건복지부가 국민건강을 팔아 대기업과 질병관리회사의 박리다매 이권창출에 앞장서려는 시도는 비난받아 마땅하다”고 주장했다.
평의사회는 또 “대도시 원격의료는 편리하다는 이유만으로 불편한 대면진료를 대체하게 될 가능성이 높은데 대면진료에서조차 오진문제와 의료분쟁이 끊이지 않는 상황에서 반쪽짜리 진료인 원격의료가 국민에게 어떤 폐해를 불러올지는 불문가지”라고 덧붙였다.
한편 예정됐던 시범사업 일정이 여러 차례 미뤄지자 복지부는 의협의 협조가 없더라도 시범사업을 진행할 계획이다.
복지부 관계자는 “한계가 있더라도 진행을 아예 못하는 것은 아니며 보건소나 지역병원 등을 통해 먼저 시작한 후 점차 확대하는 방안도 고려해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정확한 평가와 수가산정, 문제점 등을 보완하려면 의료기관 중 의원급의 참여가 중요하지만 협회의 협조를 마냥 기다릴 수만은 없다는 게 복지부의 입장이라 향후 갈등의 불씨는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