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성들의 건강을 책임지는 군주가 되자”
正祖 이산의 壽民妙詮論

[한의신문]정조 이산(1752∼1800)은 조선 22대 임금이다. 그는 개혁적 성향의 군주로 규장각을 설치하여 학술을 장려하였고, 장용영을 설치하여 왕권을 강화하였으며 탕평책으로 정국을 안정시키고자 하였다. 그는 학술적으로도 뛰어난 군주였다. 184권에 달하는 『弘齋全書』(1814년에 간행)가 그의 저술이다. 이 안에는 『壽民妙詮』이라는 醫書가 포함되어 있다.
아래에 『壽民妙詮』의 서문을 소개한다.
“…지금 의술을 하는 자들은 거개가 병증과 맥박에는 진력하지 않고 탕음, 환제의 이름만 외우고 있다가 환자를 대하면 그 병의 원인이 어느 장기, 어느 경맥에 있는가도 확실히 모르면서 그저 그림자 잡는 식으로 이것저것 마구 쓰고 있으니 그 병이 나을 리가 있겠는가. 제아무리 神醫니 醫聖이니 의술이 대단하다 해도 『周禮』에서 말한 下醫 정도인 자도 열에 하나 둘도 없는 실정인데, 그 원인은 이 때문인 것이다. 이는 실로 의술을 배운 자가 잘못 배운 소치이겠지만 한편으로는 처방을 내어 의술을 가르치는 자들이 맥박에 대한 것, 병증에 관한 것, 기타 탕음, 환제 등을 전부 한 책 속에다 엮어 놓았기 때문에 보는 이가 혼동을 일으키고 헷갈리는 데다가 되도록 빠른 길만 추구하려는 폐단을 낳게 되어, 내 오래 전부터 그것을 병통으로 여겨 왔다. 선대왕의 玉候가 불편하시기 시작한 병술년(1766, 영조42) 이후부터 내가 밤낮으로 허리띠 한 번 풀지 않고 곁에서 11년을 모셨는데, 그동안 하루도 醫藥에 종사하지 않은 날이 없었다. 그때 『東醫寶鑑』을 펴놓고 身形, 精, 氣에서부터 부인과, 소아과에 이르기까지 각기 종류별로 證論과 脈訣 등을 따로따로 초록하여 4권의 책으로 만든 다음 ‘用時還解壽斯民’이라는 伊川의 詩語를 따 이름하여 『壽民妙詮』이라고 하였다. 얼마 후 또 생각해 보니, 湯液에 관한 여러 처방도 그냥 빼 버릴 수만은 없어서 또 다시 이를 초록하여 별책으로 5권을 만들었다. 책이 완성되고 나서는 까맣게 잊고 있다가 근래에 와서야 어지러운 초고들을 뒤져 보니, 별책으로 된 것은 이미 유실되었고 『수민묘전』만이 남아 있었다. 그것을 그대로 방치하자니 전날에 공들인 것이 아까워서 다시 정하게 베껴 쓰도록 하고, 그 책을 쓰게 된 동기를 이렇게 써 본 것이다. 이는 모두 古方에서 나온 것들로서 별로 신기한 내용은 없으나, 일개 의술을 하는 자의 心目을 빌려서 급선무가 무엇이라는 것을 밝힌 점에 있어서는 다소의 도움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기는 하나 내가 말하는 壽民은 단순히 그러한 뜻만은 아니다. 지금 재정이 동이 나고 백성들이 곤궁에 빠져 병들어 있는 것이 눈에 가득한데도 고칠 길이 없으니, 아, 어떻게 하면 이천을 구천에서 일으켜 그 방법을 물어볼 수 있을까.” (한국고전번역원의 한국고전종합DB에 올라와 있는 양홍렬의 번역을 따옴)

위의 글은 정조 이산 자신의 의학적 견해를 담아내고 있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먼저 그는 기존의 의학을 하는 자들의 수준이 저급한 이유를 교육의 부재로부터 찾았다. 수준 높은 의학 지식이 보급되기 위해서 양질의 정보를 담고 있는 의서가 전달되어야 한다는 의미에서 자신의 저술 『壽民妙詮』을 저술한 것이란 것이다.
둘째, 『壽民妙詮』은 자신이 선대왕의 왕후를 11년간 치료했던 경험이 바탕이 되어 저술된 학습 기록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선대왕의 玉候가 불편하시기 시작한 병술년(1766, 영조42) 이후부터 내가 밤낮으로 허리띠 한 번 풀지 않고 곁에서 11년을 모셨는데, 그동안 하루도 醫藥에 종사하지 않은 날이 없었다”라는 문장에서 확인된다.
셋째, 『壽民妙詮』은 일종의 『東醫寶鑑』학습의 결과물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壽民妙詮』은 『東醫寶鑑』의 내용을 학습하면서 적은 공부기록의 성격이 강하다. 그래서 이 책을 『東醫寶鑑』학파에 속하는 의서로 분류하기도 한다.
김남일 교수·경희대 한의대 의사학교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