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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06월 27일 (토)

醫史學으로 읽는 近現代 韓醫學 (358)

醫史學으로 읽는 近現代 韓醫學 (358)

“조선의학의 영광을 회복시키자.”



張志淵이 전하는 한의학의 방향



kni-web[한의신문] 張志淵(1864∼1925)은 경상북도 상주 출신으로서 각종 언론 활동으로 유명했던 인물이다. 그는 1895년 명성황후 시해 사건(乙未事變)이 일어나자 의병궐기 호소 격문을 각처에 발송하였고, 1896년 俄館播遷 때에는 고종 환궁을 요청하는 萬人疏를 기초하기도 하였다. 이후 『大韓禮典』 편찬에 참여(1897년) 獨立協會 가입(1897년), 『皇城新聞』기자(1898냔) 등의 활동을 하였다.



1899년 『時事叢報』 주필, 『황성신문』 주필 등을 하였고, 廣文社의 편집원으로 참여하여 丁若鏞의 『牧民心書』와 『欽欽新書』 등을 간행하였고, 1901년 『황성신문』의 주필, 1902년 8월 사장으로 취임하였다.



1905년 11월 17일 乙巳條約이 강제로 체결되자 『황성신문』 1905년 11월 20일자에 ‘是日也放聲大哭’을 게재해 전국에 배포하였다. 이 논설은 일본의 국권침탈과 을사5적(乙巳五賊)을 규탄해 국민총궐기를 호소하는 내용이었다. 이후 일본 헌병대에 체포되어 65일간 투옥되었으며, 『황성신문』은 11월 20일자 압수되고, 1906년 2월 12일까지 정간되었다.



장지연의 시문집 『韋庵文稿』에서 몇 개의 한의학 관련 글을 발견하였다. 이 『韋庵文稿』는 장지연이 죽은 뒤 장자 재식(在軾)과 후학 권도용(權道溶)이 그의 글들을 편집해 조선총독부 도서과에 출판 허가원을 제출했으나, 주요부분을 전부 삭제하라는 지시 때문에 간행하지 못했다. 1956년 국사편찬위원회에서 비로소 편찬·간행했다.



아래에 그 내용의 일부를 소개한다.(번역은 필자의 작업)



2118-28-1“朝鮮醫學講習, 許浚의 東醫寶鑑: 朝鮮醫學은 중국에서 수입됨으로부터 역사 기록에 드러나는 것은 신라 新羅 神文王十一年 처음으로 醫學을 설치하여 博士 二人이 本草, 甲乙經, 素問 等書로 生徒들을 교수하였으니 이것이 조선의 의학이 학교를 설치한 효시이다. 이로부터 의학으로 저명한 자들을 들어보지 못하다가 조선에 이르러 선조의 시기에 太醫 許浚이 비로소 의술로 이름을 떨쳤고 東醫寶鑑을 저술하여 중국에까지 이름을 떨치게 되었다. 그 이외에도 鄭北窓, 尹草窓 등도 또한 神醫로 크게 알려졌는데, 그 의술은 전해지지 않는다. 近世에 西洋醫術이 輸入됨으로부터 西醫學을 마친 사람들이 계속 이어져 나오니 이에 조선의학계가 경쟁하는 형세가 있게 되었다. 그러나 조선의 의학이 그 책이 浩繁하고, 그 의술이 衰微하여 비교컨대 術이 衰하고, 卒業한 專門硏究者를 비교해보아도 거의 遜色이 있음을 면치 못한다.”



“中國의 醫學: 시험삼아 의학의 본원을 논하고자 한다. 중국에서부터 창조되었으니, 黃帝, 岐伯, 本草, 素問, 難經이 진실로 鼻祖가 되는데 歷代의 漢醫의 術이 발달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兪부, 扁작, 의和, 의緩같은 이들이 오래되었고, 漢나라의 張仲景, 華陀, 晉나라의 葛洪·王叔和·劉涓子, 粱나라의 陶弘景, 唐나라의 孫思邈, 金나라의 劉完素河間, 元나라의 李杲·東垣, 朱震亨·丹溪·張元素·, 명나라의 李梴, 李時珍, 張介賓·景岳 등 모든 사람들이 가장 명의로 세상에 알려진 이들이다. 모두 새로운 처방을 발명하여 책을 저술하여 醫家들의 祖師가 되었으니 醫術을 가히 크게 갖추었다고 할만하다.”



“解剖學의 始初: 또한 解剖縫合의 術은 兪跗·扁鵲으로부터 계승한 자들은 華陀, 陳珪이다. 照心診脈의 法은 또한 秦緩, 越人으로부터이니, 즉 漢醫도 또한 그 術을 궁구하였지만 다만 그 처방을 비밀로 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주지 않았다. 그러므로 지금 세상에서 서양의학에서 창조하였다고 주장하는 것이 족히 괴이하다고 할만한 것만이 아니다. 西洋의 醫學은 二百年前까지는 항상 脈管廻血의 理를 이해하지 못하였다가 近世에 비로소 精微로운 내용을 깨닳아 이전 사람들이 알아내지 못한 것들을 發明한 것이 많다. 무릇 西洋에서는 醫學을 숭상하여 장려하여 大學校에까지 설치하였고, 驗實의 능력을 헤아려서 博士의 명칭과 자리까지 영달하게 해주고, 전문적 영업까지 허가해준다. 그러므로 醫生들은 반드시 정미롭게 더욱 정미로운 것들을 구하여 저들과 같이 발달해야 할 것이다. 우리나라 조선은 종래로부터 醫士들을 術士처럼 대우하여 일반적으로 정부의 장려책이 없었다. 그러므로 衰微하고 不振해져 마침내 오늘날에 이르게 되었다. 그리하여 현재 당국으로부터 장려가 고려되고 있지만 여력이 남아있지 않다. 즉 의학 진흥의 기회를 오늘날에 있어서 東西의 學을 참고하고 新舊의 方으로 증험하여 더욱 정진한다면 어찌 醫界의 曙光이 아니겠는가?”



김남일 교수·경희대 한의대 의사학교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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