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血虛生熱에 四物湯加減方을 사용한다.”
李惟聖의 血虛生熱論

[한의신문] 李惟聖(1581〜?)은 1606년에 丙午 增廣試에서 生員 3등 12위를 하여 찰방을 지냈고, 光海君 8년인 1616에 丙辰 增廣試 乙科에 3위로 합격하여 관리로서 성공한 인물이다. 그는 의학에 뛰어나 논리정연한 醫論을 전개하고 있다.
『承政院日記』1627년 인조 5년 5월 17일자 기록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장면이 나온다.
“藥房提調 徐渻과 副提調 洪瑞鳳이 다음과 같이 아뢰었다. 中殿의 症候은 벌써 수개월이 되어 약물을 여러 가지로 썼지만 여전히 드러나는 효과가 없습니다. 御醫인 趙興男 등 네 사람이 傷寒 이후에 泄痢가 이어지고 腹脹面浮의 증상이 이로부터 나오는 것이니 補藥으로 치료하지 않을 수 없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閔棡과 李惟聖 등 두 사람은 이 증상이 오로지 血虛生熱로 말미암으니 下部寒冷의 증후같은 것은 모두 熱氣의 所致이므로 반드시 먼저 涼血治熱의 약제를 사용해야 하며 만약 빨리 치료하려고 補藥을 사용한다면 熱氣가 흩어지지 않아 補血의 공적이 또한 적어진다고 하였습니다. ○ 藥房에서 또 다음과 같이 아뢰었다. 엎드려 성상의 가르침을 받들어 다시 李惟聖에게 물어보니 즉 四物湯에 黃連酒炒, 升麻 各二錢, 柴胡, 黃栢酒炒, 澤瀉 各一錢, 地楡, 靑皮 各七分을 加하고 熟地黃을 빼고 乾地黃酒炒를 대신 넣고 當歸, 地黃을 배로 넣고 生薑三片, 桑白皮, 木通 各三寸을 넣어 부수어서 같이 끓여 10회 연달아 복용하는 것이 마땅할 것 같습니다.”
李惟聖의 주장을 분석하면 熱氣怫鬱로 인한 寒冷證에 대한 인식의 일단을 보여준다. 이것은 한국 한의학의 학술유파에 대한 단초를 제공하는 발언이다. 이 발언은 御醫인 趙興男의 溫補를 위주로 하는 치료법을 주장하는 것에 대해 경종을 울리고 있는 것이다. 趙興男은 傷寒 이후에 泄痢가 이어지고 腹脹面浮의 증상을 虛證으로 보고 있는데 대해서 李惟聖은 血虛生熱로 말미암으니 下部寒冷의 증후같은 것은 모두 熱氣의 所致인 것으로 보았다.
趙興男과 李惟聖은 변증에서 학파적 차이를 드러내고 있는데, 이를 통해 조선 중기 한의학의 다양성을 엿보게 해준다.

李惟聖의 처방은 다음과 같다. 四物湯에 黃連酒炒, 升麻 各二錢, 柴胡, 黃栢酒炒, 澤瀉 各一錢, 地楡, 靑皮 各七分을 加하고 熟地黃을 빼고 乾地黃酒炒를 대신 넣고 當歸, 地黃을 배로 넣고 生薑三片, 桑白皮, 木通 各三寸을 넣는 것이다. 이 처방은 四物湯으로 生血시키고 나머지 약물로 淸熱, 瀉火, 散瘀, 行氣 등의 의미를 취한 것이다.
李惟聖은 中殿의 질환에 대해 趙興男 등이 中殿의 傷寒後遺症에 補藥을 쓸 것을 주장하고 있는 것에 대해 반론을 제기하고 있다. 補藥을 사용하면 熱氣가 흩어지지 않게 되므로 涼血治熱의 약제를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中殿의 泄瀉의 증상을 熱氣가 鬱結되어 나타난 것으로 보고 처방을 구성한 것으로서 淸熱, 瀉火, 散瘀, 行氣 등의 의미를 강화시킨 것이다. 시기적으로 보아서 초여름에 해당되는 것으로 보아 그가 中殿의 泄瀉의 질병을 暑泄이나 火泄 등의 질환으로 본 것이 아닌가 한다. 暑泄은 “煩渴尿赤暴瀉如水”을 주증으로 하며, 火泄은 “口乾喜冷痛一陣瀉一陣其來暴速稠粘” 등을 주증으로 한다.
이러한 치료 방식은 그 유래를 더듬어 보기 어려운 독창적인 견해로서 기존의 상한병의 후유증으로만 여기고 補法만 고집하는 치료법에 경종을 울리고 있는 것이다.
김남일 교수·경희대 한의대 의사학교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