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醫學入門을 거듭 교정하여 연구자들에게 도움을 주다”
朝鮮 儒醫들의 醫學入門論

[한의신문] 『醫學入門』이 조선에 들어온 이후로 조선의 의학계에서는 이 책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허준의 『東醫寶鑑』에는 이 책이 인용된 조문의 숫자는 2714조에 달하여 인용된 의서들 가운데 으뜸이다. 조선 후기에는 『醫學入門』을 醫學取才에 講書로 채택하였다. 1831년 전의감 제조인 李羲甲은 이 책을 “의학과거에 사용하는 책 가운데…『醫學入門』이 진실로 醫家들을 모아 놓은 것으로 후학들의 指南이 된다”고 하였고, 1865년 법전인 『大典會通』에는 『醫學入門』을 醫科取才 때에 考講書로서 활용했다(崔秀漢의 『朝鮮醫籍通考』).
아래의 글은 “內局重校 戊寅改刊 題重刊 醫學入門後”라는 제목이 붙은 『醫學入門』조선판 인쇄물의 跋文이다. ‘內局重校’는 내의원에서 거듭 교정했다는 뜻이다. ‘戊寅改刊’은 1818년 다시 고쳐서 간행했다는 말이다. 그리고 ‘重刊 醫學入門’이 이 책의 제목이다. 그 발문을 해석해 본다.
“위의 醫學入門은 명나라의 李梴이 모은 것으로 源流가 잘 갖추어져 있고 門路가 바르니 의학을 공부하는 자들이 指南書로 본다. 萬曆庚辰인 1580년에 만들어져 그 전해진 판각이 우리나라에 요처에 보관되었는데, 임진년의 병화 이후에 양평군 허준이 지은 동의보감과 더불어 서로 선후하여 의서의 판각으로 우리나라에 있는 것은 겨우 이 몇 책일 따름이었다. 戊寅年인 1818년 봄에 내가 內醫院에서 提擧를 하였는데, 모든 醫師들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작년 겨울에 내의원에서 兩南道에서 入門과 寶鑑을 인쇄하여 올리라는 명령을 받았는데, 寶鑑은 嶺湖南에서 모두 인쇄하여 올렸지만 오직 入門은 湖南에 옛 판본이 있으나 이미 닳아 없어져서 인쇄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무릇 醫書의 存亡과 醫學의 盛衰는 관련이 깊습니다. 이것이 우리 내의원의 근심입니다. 무릇 提擧께서 도모하시는 것이 마침내 주효하여 관동의 人蔘 공물로 생긴 남은 돈을 취할 뜻으로 내의원에서 기술자를 모집하여 인쇄합시다.’
무릇 모든 의사들의 말은 좋은 말이로다. 내가 일찍이 벼슬아치로 남북을 노닐면서 후미진 먼 여염집 사이에서 그 흩어진 책들을 얻기도 하였다. 모든 古方들은 국초에 인쇄된 판본들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으니 이에 醫書의 板刻이 옛적에는 많았지만 지금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醫道도 이에 따라 조금 쇠퇴하니 어찌 그것을 증험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무릇 사람의 技術은 반드시 性에 通하여 익힘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니, 그 性을 품부받은 사람은 항상 갑자기 멈춤이 있지 않으니 혹 익힌다 해도 耳目에 접속되지 않으면 소통하여 術을 이룰 수 있으리오. 책을 널리 배포하여 집에서 쳐다보고 집마다 익혀 사람과 책이 서로 만나면 또한 반드시 세상에 이름을 떨치는 자가 그 사이에 나올 것이니 내가 인쇄를 하여 가만히 기다리노라.”(필자의 번역)

이어서 “上之二十年 庚辰 孟秋 安東金履喬 謹識. 校正 崇祿大夫 行 知中樞府事 吳千根. 折衝將軍 僉 知中樞府事 兼五衛將 玄在德. 折衝將軍 僉 知中樞府事 兼五衛將 慶輯. 監印 僉 知中樞府事 兼五衛將 玄在德. 折衝將軍 僉 知中樞府事 兼五衛將 慶 輯”이라고 관련 인사들을 나열하고 있다. 관련 인사가 金履喬, 吳千根, 玄在德, 慶輯 등이다. 당대의 유명학자들이 총망라되어 있다.
이 발문은 1820년 안동김씨인 金履喬가 썼다. 金履喬는 순조시기에 이조판서·평안도관찰사·병조판서·형조판서·공조판서·예조판서 등을 역임하고, 1831년 우의정에 올랐던 인물이다. 吳千根은 醫官 出身으로 崇錄大夫까지 오른 인물이다. 玄在德은 의사 집안에서 성장하여 어릴 때부터 의학을 수업하면서 학문을 연마하는데 힘써서 의관으로서보다 문인이나 서예가로 더 많이 알려져 있는 인물이다. 경집은 1801년에 醫科考試인 辛酉 式年試에 三等으로 전체 4위를 한 醫官이었다.
이들의 노력으로 『醫學入門』은 한국의 하나의 학술유파를 이루어내는 의서가 되었다.
김남일 교수·경희대 한의대 의사학교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