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잔재 생약 용어 정리 모르쇠로 일관
‘음양곽’ 식품 허용 등 무책임한 행태 지속
천연물신약 사태, 식약공용한약재 문제 등 한약과 관련된 문제가 자꾸만 꼬여가고 있다.
적극 나서 문제를 풀어가야할 정부 당국은 이익 단체와 산업계의 눈치만 보느라 뒷짐만 지고 있을 뿐 국민의 안전은 고려 대상에 조차 없는 듯 보인다. 손 대봤자 골치만 아프기 때문이다.
대표적 사례가 한약(생약) 용어 정립 문제다. 한약 관련 정책에 혼선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관련법규상 용어부터 정립하는 것이 중요하다.
하지만 현재 약사법에서는 ‘한약’을 원료약재 개념으로, 한의약육성법에서는 ‘한약재’를 ‘한약’ 및 ‘한약제제’ 원료로 정의하고 있으며 하위 법규 등에서는 ‘한약’과 ‘한약재’ 용어를 혼용하고 있다.
특히 ‘생약’이라는 용어는 본래 ‘자연 그대로의 약재’ 또는 ‘어떠한 가공도 하지 않은 날 것의 약재’로 사용됐으나 일본에서 한약재를 생약이라고 칭하던 것이 일제 강점기에 들어와 변질된 일제의 잔재다.
다행이 1953년 약사법에서는 ‘자연상태의 것’을 의미했으나 1958년 이후 ‘한약재’의 의미로 대한약전에서 지속적으로 사용하면서 또다시 의미가 변질돼 오늘날에는 사실상 현대 한약에 대한 정의로 조선시대의 생약, 숙약, 성약의 의미를 모두 포괄하는 정체불명의 용어가 되어 버렸다.
‘생약제제’의 경우에는 서울행정법원이 약사법 및 관계법령에 이를 정의하고 있는 규정이 없는 등 해당 고시에서 생약제제를 정의한 근거나 어원을 찾기 어려울 뿐 아니라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의미의 ‘제제’라는 단어가 한약과 생약에 결합했다는 이유만으로 한약제제와 생약제제가 뚜렷하게 구별된다고 볼만한 합리적 근거를 발견하기 어렵다고 지적했을 정도다. 다시말해 정의한 근거나 어원을 찾기 어려운 용어를 임으로 만들어 사용해온 것이다.
더구나 최근 식품의약품안전처(이하 식약처)가 즐겨 사용하고 있는 ‘천연물의약품’이라는 용어도 법규에 근거하지 않는 용어다. 한의계는 그동안 ‘생약(제제)’이라는 용어가 그러했듯 이 용어가 향후 어떠한 목적으로 활용되어질지는 우려하고 있다.
사실 식약처가 이 문제를 인지하지 못하거나 노력을 아예 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
2010년 당시 식약청 내에서도 관련법규에서 사용되고 있는 용어의 개념이 모호해 혼용되면서 오해의 소지가 높다며 용어 재정립을 위한 민·관협의회를 개최한 바 있다.
한약의 신뢰와 품질을 제고해 나가기 위한 첫 단추가 바로 용어 정립이 돼야 한다며 강한 의지를 나타내기도 했다.
하지만 1번의 워크숍과 2차례의 협의회를 끝으로 결국 흐지부지 되고 말았다.
이후에도 대한한의사협회를 비롯한 관련 단체에서는 국민의 건강을 위해 조속히 용어 정립이 이뤄져야 한다며 지속적으로 식약처에 요구해 오고 있지만 식약처는 지금까지 뒷짐만 진체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다.
보다 못한 한의협이 용어 정비에 대한 필요성을 인지하고 있으면서도 약사법과 행정예고안 등의 근간이 되는 중차대한 사안을 뒤로 미루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따지며 국민의 건강을 위해 반드시 우선으로 해결돼야할 사안을 아무런 대책 없이 뒤로 미루는 것이 과연 의약품 정책을 총괄하고 있는 정부 당국의 책임있는 행태인지를 반문하는 내용의 성명서를 발표하며 압박했으나 여전히 식약처는 꿈쩍도 않고 있는 상황이다.
국민의 안전을 위한 문제에 요지부동이었던 것과 달리 식약처가 식품산업 활성화에는 상반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전문가의 정확한 진단과 처방 없이 복용할 경우 각종 부작용의 우려가 있는 한약재 음양곽(삼지구엽초)을 식품산업계의 요구에 따라 식품산업을 활성화한다는 명목 하에 식품의 원료로 사용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내용의 ‘식품의 기준 및 규격 일부개정 고시안’을 행정예고한 것이다.
국민의 건강과 생명은 안중에도 없는 무책임한 처사라는 비난을 피할 수 없는 이유다.
식약처의 존재 이유가 국민의 건강과 안전에 있다면 2010년 한약의 신뢰와 품질을 제고하기 위한 첫 단추가 용어 정립에 있다고 했던 당시의 의지를 다시한번 보여줘야 한다.
그리고 지금부터라도 명확한 용어 정립을 기반으로 왜곡된 한약 정책을 하나하나 정상화시켜 나가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