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광역시한의사회
[한의신문] 역사는 때때로 포탄이 쏟아지는 전선보다 차가운 활자가 오가는 회의장에서 더 극적으로 움직입니다. 한국전쟁의 포화가 한반도를 뒤덮고 있던 1951년 여름, 임시 수도 부산의 남포동 부산극장이 바로 그런 곳이었습니다. 극장 의자에 몸을 맡긴 채 나라를 걱정하던 국회의원들 사이에서는 총성보다 더 치열한 ‘의료 주권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당시 우리 한의학의 처지는 참으로 위태로웠습니다. 일제강점기 ‘의생(醫生)’이라는 이름에 갇혀 말살의 위기를 겪었던 한의학이, 과연 대한민국 의료의 당당한 한 축인 ‘한의사(漢醫師)’로 부활할 수 있을 것인가. 그 운명이 결정되던 75년 전의 기록을 다시 꺼내 봅니다.
1. ‘과학’의 탈을 쓴 기득권의 오만
당시 정부가 내놓은 ‘국민의료법안’ 초안과 이를 지지하던 의사 출신 의원들의 논리는 단호했습니다. 그들은 한의학을 ‘과학’의 이름으로 청산해야 할 과거의 유산으로 치부했습니다.
1951년 7월13일, 제25차 본회의 속기록에는 당대 최고의 외과의사였던 이용설 의원(세브란스의대 교장 출신)의 발언이 적나라하게 남아 있습니다. 그는 “현대 과학자가 보고서 좋은 과학이라고 칭찬할 만하게 되어야 한다”며 한의학을 압박했습니다. 일본 규슈제국대학 의학부 출신의 한국원 의원은 한술 더 떠 “한의원이라고 하면 전국 병의원의 인식이 저하되니, 일제 때처럼 ‘진료소’나 ‘치료소’라 불러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들의 의도는 명확했습니다. 한의사를 전문 의료인(師)이 아닌 보조 인력(士)이나 ‘제2종 의료업자’로 묶어두려 했던 것입니다. 이는 일제가 한의학을 고사시키기 위해 고안한 ‘의생’ 제도의 비겁한 변주에 다름 아니었습니다.
2. 김익기의 전략적 지혜: 논리로 장벽을 넘다
이 고립무원의 현장에서 한의계의 구원투수로 등장한 인물이 바로 사회보건위원회 위원장 김익기 의원이었습니다. 안동 출신의 이 정치가가 위대했던 점은 단순히 전통을 지키자는 ‘감성적 호소’에 머물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는 반대파의 논리를 정면으로 받아쳐 무력화하는 ‘전략적 지혜’를 발휘했습니다.
김 의원은 당시 부산에 세워진 ‘동양의학전문학원’을 입법의 핵심 근거로 제시했습니다. 반대파들이 한의학을 구습이라 비하할 때, 그는 “현재 학생들이 해부학, 생리학 등 기초의학을 체계적으로 교육받고 있다”는 사실을 공론화했습니다. 한의사는 더 이상 과거의 의생이 아니라, 현대적 교육을 받은 전문 의료인이라는 점을 실증해낸 것입니다.
또한 그는 전쟁 중인 국가의 현실을 꿰뚫는 ‘경제적 독립론’을 폈습니다. “값비싼 외제 약에만 의존하는 것은 국가 경제에 큰 부담입니다. 우리 땅에서 나는 약재를 과학화하여 국민을 치료하는 한의사를 육성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보건 독립입니다.” 이 혜안은 중립파 의원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결정적 한 방이 되었습니다.
3. 연대와 사자후: “경험은 가장 위대한 과학이다”
김익기 의원의 리더십 옆에는 든든한 우군들이 있었습니다. 중앙대학교의 창립자이며 여성 독립운동가, 초대 상공부장관이었던 임영신 의원이 7월20일 제30차 본회의에서 토한 사자후는 지금 들어도 가슴이 시원합니다. “내가 교육자로서 평생을 바쳤지만, 학문이란 결국 사람을 살리고 유익하게 하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수백 년간 우리 민족의 병을 고쳐온 한약의 경험을 ‘비과학’이라는 이름으로 사장시키는 것은 교육적으로나 국가적으로나 큰 손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신의(서양의학)도 실험과 경험으로 생긴 것이고, 한약도 수천 년의 경험과학인데 실제 병을 고치는 한의사를 왜 비과학으로 몰아세우는 겁니까.” 그녀의 질타는 김익기 의원의 설계에 강력한 대중적 설득력을 더해주었습니다. 여기에 조헌영 의원 등의 깊이 있는 학문적 지원이 합쳐지며, 한의사 제도는 ‘동등한 지위’를 향해 나아갔습니다.
4. 1951년 9월6일, 주권을 선포하다
마침내 운명의 9월6일, 제59차 본회의에서 법제사법위원장 엄상섭 의원이 자구정리 보고를 마쳤습니다. “의학, 치과의학 또는 한의학을 전공하는 대학을 졸업한 자…의사, 치과의사 또는 한의사의 면허를 얻어야 한다.”
이 짧은 문구의 확정으로 한의사는 의사, 치과의사와 나란히 법전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신익희 의장이 “이의 없으십니까?”라고 물었을 때, 본회의장을 가득 채운 찬성의 물결은 민족 의학의 부활을 알리는 축포였습니다. 재석 79인 중 찬성 61표. 그날 대한민국은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기 힘든 선진적인 ‘이원적 의료 체계’의 첫발을 뗐습니다.
5. 맺음말: 우리에게 남겨진 숙제
오늘 우리가 들고 있는 면허증에는 75년 전 부산의 짠 바닷바람을 맞으며 기득권의 핍박에 맞섰던 선배들의 고뇌와 결단이 서려 있습니다. 김익기 의원은 한의학을 과거에 가두지 않고 미래로 연결한 정치가였습니다. 그가 새겨넣은 ‘한의사’라는 세 글자는 단순한 직업명이 아니라, 우리 생명을 우리 스스로 지키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우리를 향한 ‘비과학’의 공격은 여전합니다. 하지만 1951년의 김익기 의원이 그러했듯, 우리 역시 논리와 실력으로 그 장벽을 넘어야 합니다. 한의사 제도는 전쟁터라는 극한의 공간이 우리에게 준 특별한 선물이자 책임입니다. 선배들이 꿈꿨던 ‘현대적이고 과학적인 한의학’을 완성하는 일, 그것이 바로 이 시대를 사는 우리 한의사들의 숙명입니다. 부산극장의 승전고를 잊지 맙시다. 1951년 부산과 김익기라는 이름을 우리가 오늘 다시 기억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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