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O WPRO 표준경혈위치를 러시아어로 번역하다”

기사입력 2017.11.24 1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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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집자 주] 본란에서는 송영일 한국국제협력단 우즈베키스탄 글로벌협력의료진으로부터 우즈베키스탄 현지에서의 한국 한의학에 대한 인식 등을 소개한다.



    2130-34-1우즈베키스탄(이하 우즈벡)에서의 한의학 관련 교육은 침구경혈학 위주다. 현지에서 침구경혈학 교육기관으로 가장 영향력이 있는 곳은 타슈켄트 의사보수교육센터의 ‘신경재활과 동양의학’ 교육과정이다.

    우즈벡 의사들 중 침 치료를 하고자 하는 사람은 반드시 이 강좌를 수료하고 수료증을 받아야 한다. 그런데 이 교육은 대부분 이론 위주의 교육이라는 평을 받고 있으며, 또한 이 강좌를 수료한다고 해서 실제로 침구치료를 운용해 나가기는 어렵다고 수료자들은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다보니 침구경혈학을 더 배우고 싶어하는 우즈벡 의사들이 ‘우즈베키스탄-대한민국 한의학센터(이하 센터)’를 찾아오게 된다.

    2016년에 한의학 교육을 시작하면서 센터에서 교육받는 의사들에게 어떤 교재를 통해 침구경혈학을 공부하는가라고 물어봤더니 조잡한 복사물들을 보여주는 경우가 많았다. 대부분 경혈명은 중국어 발음으로 암기하고 있고, 대략적인 위치만 어림짐작으로 이야기할 뿐이었다. 올바른 교육을 위해서는 공식적이고 표준화된 교재가 절실했다.

    궁리 끝에 세계보건기구 서태평양지역 사무처(이하 WHO WPRO)에서 나온 ‘WHO Standard Acupuncture Point Location in the Western Pacific Region’을 교재로 사용키로 했다. 어렵지 않은 영어로 돼 있어 우즈벡 의사들도 충분히 사용하리라 생각했는데, 영어를 해석해 낼 수 있는 의사가 거의 없다시피 했다.

    그런데 책에 나온 그림을 보고 놀라는 의사들이 많았다. 이렇게 자세하게 해부학적으로 설명해 놓은 책을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영어로는 무용지물인 이 책을 유용지물로 바꾸는 방법은 결국 ‘러시아어로 번역해 내는 일이겠구나’란 결론을 내리고 바로 작업에 착수했다.

    물어물어 WHO WPRO에 책을 번역하고 싶다는 의견을 보내자, 개인 자격이 아닌 센터의 대표로서 WHO WPRO로부터 번역을 해도 좋다는 영어로 된 공식문건을 받았다.

    그때부터 사서 고생이 시작됐다. 처음 계획은 나와 같이 공부한 의사들을 중심으로 차근차근 번역을 해나가면서 쉽게 작업을 마치는 것이었다.

    하지만 예상은 빗나갔고, 제대로 된 번역팀을 꾸리는데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영어를 러시아어로 번역하는 것이 우즈벡 의사들에게 굉장히 어려운 일이었기도 했고, 이 작업을 할 수 있는 몇몇 의사는 번역작업에 참여하는 조건으로 많은 돈을 요구하기도 했다.

    많은 돈을 투자하면 당연히 질이 좋은 번역물이 나오겠지만 정말 적은 예산만으로 작업을 하다보니 팀원들이 요구하는 번역료를 다 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유능한 의사들을 설득하고 팀을 만드는 과정에서 잦은 팀원 교체가 있다 보니 작업이 책 앞부분에서 한동안 정체돼 있었다.

    2141-38-1답답한 마음에 팀원들의 번역을 기다리지 않고 번역을 직접 해나갔다. 내가 번역에 속도를 내자 팀원들도 좀 더 속도를 내주었다. 팀원들간에 수차례 교정을 통해 러시아어로 정확한 번역 문장을 만들어내는데 주안점을 두었다.

    어느 정도 번역을 마무리해가면서 맞부딪힌 문제는 편집이었다. 거의 컴맹에 가까운 필자는 책을 편집한다는 일을 스스로 하리라고는 감히 생각조차하지 않았지만, 눈앞에 일이 닥치자 결국 인터넷을 이리저리 뒤져 편집방법을 찾아내어 작업을 시작했다. 책이 일차적으로 완성되고 러시아어 원어민 3명에게 감수를 맡겼다. 미처 찾아내지 못한 오자, 탈자, 띄어쓰기, 이상한 문장 등을 다시 찾아내어 고치고, 고치고 또 고쳤다.

    마지막으로 필자를 괴롭힌 문제는 책의 주민등록 번호라고 할 수 있는 ISBN이었다. 애초에는 우즈벡 내에서 ISBN을 받으려 했지만 행정처리 비용으로 500달러 이상이 필요했다. 한국에서는 ISBN을 받는 것이 무료라는 것을 알게 되어, 한의사이면서 KNC출판사의 대표인 김우석 원장으로부터 도움을 받을 수 있게 됐다. 흔쾌히 도와주신 김우석 대표에게 다시 한 번 지면을 빌어 감사드린다.

    결국 책이 세상에 나왔다.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은 한글과 한국어를 중심으로 경혈명을 구성한 것이다. 즉 이 책으로 공부하면 ‘주산리(zusanli)’가 아니라 족삼리로 경혈을 공부하게 된다. 대한민국 한의사의 주도 아래 진행된 번역작업이므로 당연한 귀결이라 할 수 있겠다. 향후에 발간되는 모든 서적 역시 한글과 한국어를 중심으로 제작해 나갈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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