論으로 풀어보는 한국 한의학 (58)

기사입력 2015.01.19 1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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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李奎報의 御醫撮要方論

    李奎報(1168년∼1241년)는 고려 고종년간에 최고의 지성인으로서 국정을 주도했던 인물이다. 그의 저술로 『東國李相國集』이 있다. 이 책에는 『御醫撮要方』의 서문이 들어 있다. 『御醫撮要方』은 1226년에 崔宗峻이 왕실에서 내려오던 처방들 중에서 긴요한 것들을 모아서 간행한 醫書이다. 그 서문은 아래와 같다.

    “무릇 인생이 중히 여기는 것은 몸과 목숨일 뿐이다. 비록 死生, 壽夭가 다 하늘에 매인 것이라 하나, 만일 몸을 조섭함이 적절하지 못함으로 인하여 질병이 침범하게 되어 좋은 方文과 묘한 약으로써 이를 다스리지 못한다면, 그 사이에 어찌 목숨을 橫失하는 자가 없겠는가? 이러므로 옛 성현이 『本草』, 『千金』, 『斗門』 『聖惠』 등 모든 방문을 저술하여서 만백성의 생명을 구제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권질이 너무 호번하여 열람하기에 곤란하다. 만일 시일이 오래 갈 병이면 의원을 찾는 것이 가하고, 모든 서적을 뒤져서 그 방문을 찾는 것도 가하다. 그러나 만약 갑자기 위급한 중병을 얻었다면 어느 겨를에 의원을 찾고 서적을 뒤질 수 있겠는가?
    아예 정밀하고 요긴한 것만을 채집하여 위급을 대비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 國朝에 茶房에서 수집한 약방문 한 질이 있는데, 수집한 지 오래라, 탈루되어 거의 유실될 지경에 이르렀었다. 지금 樞密相公 崔宗峻이 이것을 보고 애석히 여긴 끝에 그것을 인쇄하여 널리 보급할 것을 생각하고 이를 상께 아뢰니 상께서 흔연히 허락하였다. 공은 이에 2권으로 나누고 또 모든 방문 중에서 가장 긴요한 것만을 첨부하여 사람을 시켜 繕寫하게 한 다음 이름을 『御醫撮要』라 하고, 어명으로 西京留守官에 보내어 인쇄하여 세상에 유포하게 하였으니, 이 또한 聖朝에서 백성 보기를 赤子 보듯하는 어진 정책이며, 또 士君子가 중생을 널리 구제하는 뜻이기도 하다.
    아, 좋은 점이 있으면 덮어두지 못하는 것은 나의 고집한 바인데, 공이 또 명하여 서를 쓰게 하니, 어찌 피할 수 있겠는가? 삼가 두 번 절하고 그 대략을 쓴다. 병술년(1226, 고종 13) 4월 일에 서한다.”(한국고전종합DB 참조함)

    李奎報는 위의 글에서 의학의 중요성과 간편한 의서의 필요성에 대해 역설하고 있는데, 이것은 무신난, 몽고와의 전쟁 등을 겪으면서 당시 고려에서 시급하게 생각했던 바였던 것이다. 崔宗峻은 고려시대 茶房이라는 의료기관에 근무했던 御醫로서 아마도 기관의 이름과 마찬가지로 차를 중심으로 질병을 치료하는 전문가였을 것이다.

    茶房이라는 기관은 최초로 설치된 시기가 분명하지 않지만 文宗代에 이미 설치되어 운영된 것을 알 수 있다. 이 기관에서는 왕실의 食用茶와 御藥을 끓여서 올리는 일뿐 아니라 외국사신과 백관들에게 연회나 의식 중에 차를 주는 일을 관리하였다. 고려시대에는 차를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고 한다. 궁중에서는 하루에 세번씩 차를 마셨고, 치료에 있어서도 차를 활용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茶房’이라는 이름의 의료기관을 궁중에 설치하여 운영한 것도 차를 치료에 많이 응용하였다는 것을 말해준다. 게다가 이 기관의 관리인이 醫官이었다는 것은 御用茶를 藥으로 취급하였다는 것을 분명히 해주는 것이다. 李奎報는 유학자이지만 의학에 조예가 있었던 인물이었다. 그의 저작 『東國李相國全集』卷第十의 古律詩에는 ‘讀本草’라는 제목의 다음과 같은 시가 들어 있다.

    “정치가 졸렬하니 마음 수고롭고 병이 기부에 파고든다. 세간만가는 팔뚝이 꺾일 만한 일을 당해야만 아는 법, 반백에 수령되니 마침내 아무 쓸데도 없도다. 약방문과 의경을 읽어서 노의가 되고프다.(政拙心勞病切肌。世間萬事折肱知。二毛作郡終無用。欲讀方經作老醫.)”

    <-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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