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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의학을 알리는 새로운 시선을 얻다익숙한 현장, 새로운 역할로 다시 찾다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강남국제평화마라톤 한의진료부스 의료지원에 참여했다. 작년에는 처음 마주하는 마라톤 의료지원 현장의 생동감과 한의진료의 현장성이 인상 깊었다면, 올해는 조금 더 익숙해진 시선으로 현장을 바라볼 수 있었다. 특히 본과 4학년이 되어 병원 임상실습을 경험한 뒤 다시 참여하는 활동이었기에, 지난해와는 또 다른 배움을 얻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있었다. 올해는 지난해 담당했던 예진 업무에서 벗어나 진행팀으로 참여해 접수와 안내를 비롯한 부스 운영을 맡았다. 환자 한 명 한 명의 증상을 가까이에서 살펴보던 지난해와 달리, 올해는 진료를 받기 위해 찾아오는 참가자들의 동선을 살피고 원활하게 진료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이었다. 같은 행사에 참여하더라도 맡은 역할에 따라 보이는 풍경과 배움이 달라질 수 있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출발 전부터 완주 후까지, 분주했던 한의진료부스 10월 5일 이른 아침, 삼성1동 주민센터 앞은 마라톤을 준비하는 참가자들로 활기를 띠고 있었다. 오전 9시 출발을 앞두고 한의진료부스에도 많은 러너들이 찾아왔다. 다양한 부위에 테이핑을 받으려는 참가자들이 이어졌고, 의료진과 학생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분주하게 움직였다. 경기가 시작되고 시간이 흐르자 부스의 분위기도 달라졌다. 완주한 참가자들이 하나둘 돌아오면서 러닝 후 발생한 근육통과 관절통에 대한 진료가 본격적으로 이뤄졌다. 출발 전에는 테이핑을 중심으로 경기 준비를 도왔다면, 완주 후에는 침과 부항 등을 통한 통증 관리가 주를 이뤘다. 올해는 한의사 11명과 한의과대학 학생 13명 등 총 24명이 의료지원에 참여했으며, 한의진료부스를 방문한 인원은 441명으로 역대 최대 규모를 기록했다. 많은 인원이 방문했지만 의료진과 학생들이 각자의 역할을 수행하며 큰 사고 없이 진료를 마무리할 수 있었다. 진행팀의 일원으로서 현장의 흐름을 살피고 안내하는 과정에서, 원활한 진료를 위해서는 의료진의 치료뿐 아니라 이를 뒷받침하는 운영과 협력 역시 중요하다는 사실을 느꼈다. 짧은 만남 속, 한의학의 가치를 전하다 진행팀으로 활동하면서 새롭게 생각해 보게 된 것은 한의진료부스를 효과적으로 알리는 방법이었다. 출발선으로 향하던 참가자들 중에는 부스를 지나치다 “여기서는 어떤 걸 하는 거예요?”라며 관심을 보이는 이들도 있었다. 출발을 앞둔 러너들에게는 시간이 많지 않았기에, 짧은 순간 동안 어떤 내용을 전달해야 할지 자연스럽게 고민하게 됐다. 중요한 것은 한의진료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참가자들에게 필요한 정보를 적절한 순간에 전달하는 일이었다. 출발 전에는 테이핑을 받을 수 있고, 완주 후에는 침과 부항 등을 통해 통증 관리를 받을 수 있다는 점을 간결하게 안내하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생각했다. 특히 경기 전후의 상황에 따라 한의진료가 제공할 수 있는 도움을 구체적으로 설명함으로써, 참가자들이 자신의 필요에 맞게 진료를 활용할 수 있도록 안내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지난해부터 대한한의사협회 앰배서더, 서울특별시한의사회 K-MEX 학생위원 등 다양한 대외활동에 참여하며 한의학을 효과적으로 알리는 방법을 꾸준히 고민해 왔다. 콘텐츠 제작부터 현장 홍보와 행사 운영에 이르기까지 여러 경험을 쌓아왔지만, 이번 마라톤에서는 출발을 앞둔 참가자들에게 짧은 시간 안에 필요한 정보를 전달해야 한다는 점에서 또 다른 접근이 필요했다. 이를 통해 효과적인 홍보란 단순히 많은 정보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상황과 관심에 맞춰 핵심 메시지를 적절하게 전달하는 일임을 다시 한 번 되새길 수 있었다. 한 번의 치료 경험이 다음 만남으로 이어질 때 이번 의료지원에서 특히 기억에 남는 것은 한의진료를 경험한 뒤 지속적인 치료에 관심을 보인 시민의 모습이었다. 평소 통증으로 여러 의료기관을 방문했음에도 불편감이 지속되던 한 시민이 한의진료부스를 찾았고, 치료 후 증상이 호전되자 앞으로 방문할 만한 한의원을 추천받고 싶다는 뜻을 전했다. 그 모습을 보며 한의학의 우수성을 알리는 데 있어 실제 진료 경험이 갖는 의미를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다. 현장에서 이루어진 치료가 당장의 통증 관리에 도움을 주는 데 그치지 않고, 향후 지속적인 건강관리와 한의치료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진다는 점이 특히 인상 깊었다. 이처럼 시민들이 직접 경험한 긍정적인 변화는 한의학에 대한 신뢰를 더욱 공고히 하는 중요한 바탕이 된다고 생각한다. 진료의 현장을 넘어, 시민과의 접점을 넓히다 지난해 강남국제평화마라톤에서는 러너들의 통증에 대응하는 원장님들의 모습을 가까이에서 지켜보며 스포츠 현장에서 한의학이 지닌 가능성을 느꼈다. 올해는 한 걸음 떨어진 진행팀의 자리에서 시민들이 한의진료부스를 발견하고, 관심을 갖고, 실제 진료를 받기까지의 과정을 살펴볼 수 있었다. 본과 4학년이 되어 임상실습을 경험하면서 환자에게 적절한 진료를 제공하는 일의 중요성을 배워가고 있다. 이번 의료지원에서는 그에 더해, 시민들과의 적극적인 소통이 한의진료에 대한 관심과 신뢰를 더욱 높일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현장에서 이뤄지는 세심한 안내와 진료 경험이 한의학의 강점을 자연스럽게 전달하고, 시민들과의 긍정적인 관계를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점이 인상 깊었다. 두 번째로 참여한 국제평화마라톤은 지난해와는 또 다른 의미로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지난해에는 스포츠 현장에서 발휘되는 한의학의 임상적 강점을 가까이에서 확인했다면, 올해는 그 강점이 시민들의 관심과 신뢰로 이어지는 과정을 경험할 수 있었다. 특히 한의진료에 대한 높은 관심과 긍정적인 반응을 마주하며, 한의학이 지닌 가능성을 다시 한 번 실감했다. 앞으로도 예비 한의사로서 전문성을 쌓아가는 동시에, 다양한 현장에서 시민들과 적극적으로 소통하며 한의학의 우수성과 매력을 더욱 널리 알리는 데 힘을 보태고 싶다. 두 번의 국제평화마라톤 의료지원은 한의학에 대한 자부심을 더욱 깊게 하고,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되새기게 해준 뜻깊은 경험이었다. -
“정골의학을 거울삼아 추나의 내일을 보다”[한의신문] 본과 3·4학년에 걸쳐 추나요법을 배우면서, 같은 근골격계 수기치료가 다른 나라에서는 어떤 형태로 받아들여지고 적용되는지 늘 궁금했다. 그러던 중 한의대 마지막 학년을 맞은 올여름, 원광대학교 한방병원과 한의과대학이 진행하는 미시간주립대학교(MSU, Michigan State University) OMM(Osteopathic Manipulative Medicine) 단기연수(단장 하원배 교수)에 참여할 기회를 얻었다. 연수는 올해 7월11일부터 19일까지 진행되었다. 미국 헬스케어 시스템 안에서 수기치료가 어떤 역할을 맡고 있는지 직접 확인할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였으며 같은 관심을 가진 동기들과 함께할 수 있어 더욱 뜻깊었다. 미국 헬스케어 현장을 둘러보다 처음 가 본 미시간주립대학교의 캠퍼스는 경계조차 가늠하기 어려울 만큼 컸다. 넓은 부지를 자랑하는 만큼 다양한 시설들을 접할 수 있었는데, 헨리포드 잭슨 병원(Henry Ford Jackson Hospital), 오리가미 재활센터(Origami Rehabilitation), 정골의학(OMM) 클리닉 등의 시설들이 각각 응급의료, 재활, 정골의학 치료와 같이 각기 다른 역할을 하는 것을 둘러보며 미국 헬스케어 전반을 알아갈 수 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인상 깊었던 곳은 오리가미 재활센터였다. 넓은 부지의 장점을 살려, 환자 개개인의 사생활을 보장하면서도 공유 주방과 거실 등 실제 생활공간을 기반으로 한 재활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었다. 한국에서 보던 재활과 달리 목공이 재활 프로그램에 포함되어 있다는 점도, 미국의 생활문화가 녹아 있어 돋보였다. 환자가 자신의 방 가구 배치를 직접 바꿀 수 있다는 점 역시 눈길을 끌었다. 낯선 병원이 아닌 ‘내 공간’에서 심리적 안정을 얻으면서, 동시에 일상생활로의 복귀를 계속 연습하고 도전할 수 있는 환경이라는 점이 의미 깊게 다가왔다. 병원 치료를 마친 뒤 일상으로 돌아가기까지, 미국의 의료는 여러 단계가 자연스럽게 맞물려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교실과 진료실에서 만난 정골의학 정골의학은 수업과 섀도잉(참관)을 통해 더 자세히 배울 수 있었다. Donahue 교수님께서는 요통(low back pain) 치료에서 척추 정렬을 판단하는 방법과 교정 기법을 시범과 실습으로 지도해 주셨다. 학교에서 배웠던 내용을 복습하는 동시에, 비슷하면서도 접근법이 조금씩 다른 기법을 익힐 수 있었다. 수업 중에는 활발한 질의응답이 오갔는데, 궁금한 점을 바로 묻고 답을 들을 수 있어 배워 가는 것이 많은 시간이었다. 이 밖에도 MSU 교수님들의 연구실 방문과 John M. Popovich 교수님의 저널클럽을 통해 임상 너머의 연구 현장도 잠시 엿볼 수 있었다. 클리닉에서는 두 명씩 짝을 지어 실제 의료진의 진료를 참관했다. 요통이나 경추통 처럼 한국 한의원에서도 흔히 보는 환자들이 많았지만, 신생아의 두개골 교정 치료가 상당히 많다는 점은 한국과 다른 모습이었다. 궁금한 점을 여쭤보자 의료진은 내원하는 환자군에 대해 친절하고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미국에서는 수술 후 비교적 일찍 퇴원해 다른 의료시설에서 재활과 회복을 이어가는 경우가 흔해, 개흉 심장 수술(open-heart surgery) 직후의 환자도 정골의학 치료를 받기도 한다고 했다. 신생아부터 큰 수술 직후의 환자까지, 이처럼 폭넓은 환자를 만나는 것이 정골의학이 꾸준히 발전해 온 바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정골의학을 거울삼아 본 추나의 현주소 연수 기간 동안 정골의학을 가까이에서 접하며, 익숙했던 추나의학과의 차이가 하나씩 눈에 들어왔다. 같은 근골격계 수기치료에서 출발했더라도 각 나라의 의료제도와 환경에 따라 서로 다른 모습으로 발전해 왔고, 이는 각자가 놓인 자리에서 최선의 형태를 찾아온 결과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에도 분명히 배울 점은 있었다. 생애 전반에 걸친 폭넓은 환자군, 그리고 병원 치료가 재활과 회복으로 이어지는 의료기관 간의 연계를 꼽을 수 있다. 한국과는 환경이 다르지만, 한의사로서 첫걸음을 내디딜 나에게는 추나치료의 가능성을 조금 더 넓게 바라보게 해 준 경험이었다. 마지막으로 MSU 오스테오패시 의과대학 교수님들, 학생들을 안전하게 이끌어 주신 하원배 교수님과 원광대학교 참여진, 짧은 기간에도 MSU의 특색을 아낌없이 공유해 주신 정성수 소장님께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
시민들을 직접 만나 봉사할 수 있었던 뜻깊은 시간허재원 지축한의원 진료원장(척추신경추나의학회 서울경인지회) [한의신문] 지난 10일부터 11일까지 서울식물원 잔디마당 일대에서 열린 ‘제24회 허준축제’에서 대한한의사협회 추나치료 부스에 참여해 시민들을 만났습니다. 작년에 성황리에 치러졌던 허준축제 이야기를 들으며, ‘올해는 나도 꼭 참여해보고 싶다’는 마음에 진료 스케줄을 조정해 지원하게 되었는데, 마치고 나니 역시 지원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평소 익숙하던 한의원을 벗어나 활기찬 강서구 축제 현장으로 나아가 시민들을 직접 만나고 봉사할 수 있어 매우 뜻깊고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이틀 동안 한의약 부스에는 끊임없이 시민들의 발길이 이어졌습니다. 6개의 한의약 관련 부스 중, 제가 있었던 추나치료 부스에만 하루 80~90명 이상의 시민분들이 다녀가셨는데 어르신들부터 어린이 친구들까지 남녀노소 다양한 시민분들께서 평소 겪던 통증과 건강상의 고민을 안고 방문해 주셨습니다. 야외 부스라는 환경, 침과 약침 등을 제한적으로 사용할 수밖에 없는 상황, 대기가 길어 짧은 시간 내에 즉각적인 치료 효과를 내야 하는 상황 등의 삼중고가 있었으나, 그러한 상황 속에서도 한의 치료의 뛰어난 효과는 여지없이 빛났습니다. 특히 가장 기억에 남는 환자분은 연세가 지긋하신 할아버지 환자분이셨는데, 경골과 경비관절 등을 교정하고 대퇴근막장근의 원심성 등장성 수축 기법을 적용해 드린 후 자리에서 일어나 움직여보며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무릎 통증이 놀라울 만큼 좋아졌다’고 소리치셨던 것입니다. 또, 거동이 힘들 정도로 허리를 심하게 삐끗해서 제대로 걷지도 못하며 들어오신 젊은 여자 환자분에게 요추 4번의 ERSL 기능장애를 관절 MET 기법으로 치료한 뒤 상당 호전되어 멀쩡하게 두 발로 걸어 나가는 일도 있었고, 이외에도 지속되는 견갑골 하단 부위의 담결림 증상에 FPR 기법을 적용한 뒤 곧바로 ‘어? 없어졌어요’ 하며 신기해하던 젊은 남자 환자분 등, 추나 치료의 뛰어난 효과를 많은 시민분들에게 선보일 수 있어 보람찬 시간이었습니다. 해당 환자에게 꼭 필요한 ‘적방’의 추나 기법만을 적용했을 때 어떤 효과를 거둘 수 있는지 확인할 수 있었기에 저에게도 무척 신선한 경험이었습니다. 치료 후에 좋아하시는 시민분들을 보며 피로도 잊은 채 치료에 매진할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만족도 높은 치료 효과를 이끌어낼 수 있었던 근간에는 척추신경추나의학회의 체계적이고 표준화된 임상 교육이 있었습니다. 학회에서 갈고닦은 진단과 테크닉이 있었기에 진료실 밖 야외 현장에서도 흔들림 없이 높은 치료 완성도와 시민분들의 만족을 얻을 수 있었다고 확신합니다. 이번 경험을 계기로 학회 교육의 우수성과 자부심을 다시금 절감한 만큼, 앞으로도 척추신경추나의학회에서 학술 연구와 교육 활동에 더욱 매진해야겠습니다. 성공적인 행사를 위해 헌신해 주신 분들께도 깊이 감사드립니다. 밤낮으로 행사를 총괄 기획하고 현장을 조율해 주신 대한한의사협회 이준호·이종안 부회장님과 김동환 이사님, 행사 준비에 피땀 흘리신 중앙회 직원분들, 현장 안내와 보조를 도맡아 밝은 에너지로 힘이 되어준 가천대학교 한의과대학 학생 15명과 이들을 인솔해 주신 박민정 교수님, 곁에서 함께 땀 흘린 남태광 원장님을 비롯해 K-한의약의 다채로운 진면목을 널리 알린 외국인 진료 부스 원장님들, 피부미용 부스의 원장님들까지 모두가 한마음으로 일구어낸 뜻깊은 결실이었습니다. 이번 ‘허준축제’를 통해, 한의약이 국민 곁에 더 가깝게 다가가기 위해서는 체계적인 학술·교육 역량과 수많은 이들의 보이지 않는 헌신이 함께 어우러져야 함을 느꼈습니다. 기회가 된다면 내년 허준축제에도 꼭 다시 참여하고 싶은 마음입니다. 임상 현장으로 돌아가서도 허준 선생님의 인술을 본받고, 학회 활동을 통해 더욱 정진하여 국민 건강에 기여하는 한의사가 되어야겠다고 다짐하며 저의 소감을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
우즈베키스탄에서 만난 감사와 희망[한의신문] 콤스타 제184차 한방의료봉사단은 한의사 5명과 단원 8명, 총 13명으로 구성되어 인천공항 1터미널에서 출발했다. 첫날은 서로 어색했지만, 8일 간의 봉사와 생활을 함께 하며 친밀해졌고 마지막 날에는 감사와 아쉬움 속에 일정을 마무리했다. 학생 시절부터 이어진 봉사 학생 시절부터 국내 의료봉사에 관심을 가졌던 나는 본과 3학년 때 선배들과 함께 ‘보륜’이라는 의료봉사 동아리를 만들어 소록도의 한센인분들을 치료했다. 이후 병원 수련의, 과장, 개원까지 이어지며 해외 의료봉사에 참여하고 싶었지만, 시간 내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던 중 작년부터 해외 의료봉사와 단기 의료선교에 대한 마음을 품게 되었고, 올해 기회가 되어 이번 우즈베키스탄 봉사에 참여하게 되었다. 다양한 환자들과의 만남 중앙아시아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는 그동안 매체로만 접했던 곳이었는데, 이번 봉사를 통해 직접 방문하게 되었고 그곳에서 만난 환자들은 우즈베크족, 러시아인, 그리고 강제 이주로 정착해 살아온 고려인까지 다양했다. 4일 간의 일정 동안 많은 환자가 찾아와 치료를 받았다. 의료봉사하면서 받은 인상 봉사 중 깊은 인상을 받은 점은 네 가지다. 첫째, 여러 질환으로 검사 결과지를 가져온 환자가 많았는데, 특히 X-ray와 MRI 필름을 들고 와 정확한 설명을 듣고 싶어 했다. 우리나라에서는 CD에 담긴 영상만 보다가, 현지에서 창문에 필름을 비춰가며 설명했던 기억이 남는다. 둘째, 기름진 음식 위주의 식생활로 인해 체중이 많이 나가는 환자가 많았고, 그로 인한 허리·무릎 통증 환자가 대다수였다. 그 밖에도 피부질환, 원인을 알 수 없는 두통, ADHD 소견을 가진 아이 등 다양한 질환을 진료했다. 셋째, 고려인 환자분들이 짧은 한국말로 인사하며 증상을 설명하는 모습에 깊이 감동을 하였다.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중앙아시아로 이주했지만, 여전히 한국인의 정체성을 지켜온 모습에 더 큰 관심과 애정을 갖게 되었다. 마지막 날 한 고려인 어르신께서 감사의 뜻으로 초콜릿과 원두커피를 선물해 주셨을 때는 감사와 함께 치료 기간이 조금 더 길었으면 하는 아쉬움도 남았다. 넷째, 우리가 의료봉사에 참여하는 기간에 ‘2026 KOICA INTERNATIONAL KOREAN MEDICINE ACUPUNCTURE TRAINING COURSE’가 진행 중이었다. 당시 교육에는 우즈베키스탄, 몽골, 카자흐스탄 등 여러 국가의 의료인들이 참여했으며, 각 진료실을 참관하며 한의학 침 치료에 대해 상당한 관심을 보였다. 교재로만 접하던 침 치료를 넘어 실제 치료 방법을 배우려는 그 열정에서 다시 한 번 한의학의 위상과 자부심을 느낄 수 있었다. 감사한 분들 언어적 어려움은 현지 통역원들의 도움으로 극복할 수 있었다. 제 진료실을 맡아준 베거임, 전체 통역을 담당한 모히라에게 깊은 감사를 드린다. 함께한 단원들은 의료봉사 동안 큰 힘이 되었다. 본과 2~4학년 학생들, 사회복지학과 학생, 교사 등 다양한 배경의 단원들이 무더운 날씨 속에서도 헌신적으로 봉사하는 모습은 큰 도전과 영감을 주었다. 특히 한의대 학생들의 모습에서 한의학의 미래를 이끌어갈 희망을 확인할 수 있었다. 예진실과 진료실에서 함께 수고한 단원들, 특히 각각 2일씩 도와준 허태경(동의대 본2), 김보미(원광대 본3)에게 감사드린다. 숙소에서 함께 편히 지낼 수 있도록 도와준 정희식(교사), 함께 진료한 한의사 동료 정수빈(공보의), 안준영(공보의), 최다인(자생 수련의), 그리고 팀장을 맡아 전체를 이끈 이경민 원장(강산한의원)께도 감사드린다. 정윤진(부산 한의전 석사3년), 김우진(가천대 본4), 최지원(세명대 본4), 백건욱(부산 한의전 학사3년), 문현지(가톨릭대 사회복지 4년)와도 뜻깊은 시간을 나눌 수 있어 감사했다. 바쁜 일정 속에서도 늘 미소로 봉사를 지원해준 콤스타 사무국 권수연 대리와 천세정 사원께도 깊은 감사를 드린다. 뜻깊은 만남 이번 의료봉사에서 대학교 보륜 동아리를 함께 했던 후배 송영일 원장(교육과정을 기획·운영한 우즈베키스탄 KOICA 글로벌협력 한의사)을 졸업 후 오랜만에 만나 반가웠으며, 의료봉사 기간 동안 함께할 수 있어 감사했다. 콤스타 해외의료봉사를 고민하는 분들에게 해외의료봉사를 고민하는 학생과 한의사분들께 말씀드리고 싶다. 시간적·환경적으로 부담을 느낄 수 있지만, 꼭 참여해보시길 권한다. 세계적으로 한국 문화와 음식이 주목받는 지금, 우리 고유의 의학인 한의학 역시 K-Medical의 대표로서 세계에 알릴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해외 봉사를 통해 개인적으로는 큰 보람을, 한의학적으로는 더 큰 성장을 경험할 수 있으리라 확신한다. -
“글을 쓰는 건 글 쓰는 사람 자신의 생각을 확인하는 과정”[한의신문] 한의사이자 소설가인 오수완 작가가 신작 『에케 호모』로 제16회 혼불문학상을 수상하는 영광을 안았다. 오 작가로부터 작품에 담긴 의미와 한의사이자 작가로 살아가는 삶의 균형, 앞으로 써 내려갈 이야기에 대해 들어봤다.<편집자주> Q. 신작 『에케 호모』로 혼불문학상을 수상했다. 소설을 쓴 이래 세 번째 수상이다. 혼자 작업하는 작가라면 누구나 그렇듯 나 역시 작업에 대한 확신이 약해지는 순간이 종종 있었다. 더구나 <에케 호모>는 한국 문학에는 다소 생소한 소재라 당선이나 출간으로 이어질 거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이번 수상으로 그동안 혼자 해 온 일이 헛되지 않았다는 걸 확인하게 돼 기쁘다. Q. 『에케 호모』의 장르는 SF다. SF 장르를 선택하게 된 계기와 문명의 종말이라는 아포칼립스적, 극단적인 배경을 설정한 이유는? 이 이야기는 헐리우드 영화의 흔한 영웅 서사에 대한 반감으로부터 출발했다. 정말 슈퍼맨과 같은 존재가 있다면 어떤 식으로 사유하고 판단하고 행동할지 궁금했다. 일종의 사고 실험이라고 할 수 있는데 SF를 사변 소설(Speculative Fiction)이라고 한다면 그 정의에 어느 정도 부합한다고 생각된다. <에케 호모>의 주인공은 자신을 인류와는 다른 생물종으로 규정한 뒤 일련의 사색을 거쳐 마침내 인류와의 대결을 택한다. 소설은 늙은 수리공이 말 못 하는 여자아이를 데리고 문명이 붕괴된 세계를 여행하는 풍경을 그린다. 둘은 침묵의 세계를 여행하며 다양한 사람을 만나 여러 사건을 겪는데 그러면서 작품은 문명, 기술, 지식, 폭력, 사랑, 윤리, 생명, 예술 등에 관해 질문을 던진다. 그 질문들은 결국 ‘인간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다음 세대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문제로 귀결된다. Q. 『에케 호모』에서 책이 중요한 물건으로 등장하는데, 작가에게 책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 누구나 어떤 대상에 이유 없이 매혹되곤 하는데 내게는 책이 그런 물건이다. 책의 물성은 물론 그 안에 숨은 테크놀로지, 책을 만드는 데 관여한 사람들 모두에 흥미가 있다. 화형문자(fleuron)나 장식화, 인쇄 기술, 타이포그라피, 판형, 조판, 출판의 역사, 서지학에 대해서도 관심이 많다. 문명이 완전히 사라졌다 재건된다 해도 다른 조건이 모두 동일하다면 책은 정확히 지금과 같은 형태로 다시 발명될 거라고 생각한다. 인류 전용 외부 기억장치로, 일종의 확장된 표현형으로 여전히 작동할 테고. Q. 이전 작품부터 『에케 호모』까지 작품마다 소재와 세계관이 모두 다른데, 주제를 정한 후 스토리를 만드는지? 늘 다른 사람은 쓸 수 없는 것, 나만 쓸 수 있는 걸 쓰려고 한다. 누군가 쓸 수 있다면 굳이 나까지 쓸 필요는 없으니까. 그건 서로의 삶을 낭비하는 일이다. 그리고 재미있는 걸 써야겠다고도 생각한다. 재미없는 이야기를 억지로 쓰는 것 역시 시간 낭비다. 쓰는 동안 재미없는 이야기라면 읽는 데도 재미없을 텐데 그런 이야기를 독자에게 읽으라고 권할 수는 없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흔하지 않은 소재를 찾게 된 것 같다. 글을 쓰기 전에 주제에 대해 생각하지는 않는다. 피카소는 그림을 그리기 전에는 무엇을 그리게 될지 알 수 없다고 말했다. 글 역시 끝까지 쓴 뒤에야 전체의 면모를 알 수 있다. 결국 글을 쓰는 건 글 쓰는 사람 자신의 생각을 확인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소설에서는 애초의 구상을 문장으로 실현하는 일이 될 것이다. 결국 주제는 마지막에야 드러난다. Q. 한의사인 동시에 작가인데, 두 일을 병행하는 데 가장 어려운 점은? 의사이면서 동시에 소설가였던 사람들이 있다. 대표적으로는 체호프가 있고 그 외에도 코난 도일, 슈니츨러 같은 이름이 떠오른다. 그러나 그들의 작품에 드러나는 인간에 대한 이해와 연민이 직업과 관련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다른 한편으로 의사 출신 작가들이 자신의 전문 지식을 살려 써낸 소설들도 있지만 그쪽으로는 아직 흥미를 못 느끼고 있다. 체호프는 ‘의학은 나의 아내, 문학은 나의 정부’라 말한 바 있다. 그건 삶과 꿈을, 현실과 신비를 대비시키는 말인 것 같다. 나는 장대 끝에 걸린 무게추를 떠올리는데, 한쪽은 문학, 한쪽은 한의학의 무게로 밧줄 위를 걷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한다. 한의사와 소설가로서 균형을 잡으며 삶을 꾸리는 일은 오래 전부터의 과제였다. 지금으로서는 낮에는 한의사, 밤에는 소설가로 활동하는 게 고작이다. 아마 앞으로도 둘을 화해시키지 못한 채 허둥대며 한 발씩 나아가지 않을까. Q. 오랜 기간 많은 환자를 만나온 경험이 소설 집필에 영향을 미치는가? 한의사가 되지 않았다면 이토록 다양한 사람을 만날 기회를 얻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진료실에서 만나는 모든 분이 환자이기 이전에 각자의 결핍, 욕망, 감정, 성격, 한계, 가능성, 서사를 가진 인간이라는 걸 오랜 시간에 걸쳐 배웠다. 그런 경험이 쌓여 인체, 인간, 노화, 삶, 질병, 인류에 대한 사유와 이해의 폭을 넓혀 줬을 것이다. 한의학을 배운 덕분에 글쓰기에 도움이 된 부분도 있다. <에케 호모>에서 숲에서 만난 노인이 폐렴 끝에 죽음을 맞는 장면이나 지텍에서 노먼의 신체가 파괴되는 장면은 비교적 수월하게 썼는데 병원 수련과 해부학 실습의 경험 덕분일 것이다. Q. 소설을 쓰게 된 계기와 등단하기까지의 과정은? 중학교 때부터 일기를 썼지만 작가가 되겠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은 없다. 대학 다닐 때는 오히려 그림을 그리거나 기타를 치거나 했다. 동기의 권유로 당시 PC통신 천리안의 문학동호회 ‘산책길’에 가입한 것이 소설을 쓰게 된 결정적인 계기였다고 기억한다. 산책길의 소설 소모임에서 활동하며 문단 이야기를 귀동냥으로 듣다 등단을 목표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문예지나 신춘문예에 응모하는 시간을 10년쯤 보낸 끝에 2010년에 중앙장편문학상에 당선됐다. Q. 앞으로 어떤 이야기를 쓰고 싶고 어떤 삶을 이어가고 싶은가? 언제까지 소설을 쓸 수 있을지 생각하곤 한다. 나이가 들면 체력과 지력이 떨어질 테니까. 체력은 그렇다 쳐도 정신이 무뎌지는 건 스스로 알아차리기도 어렵고 인정하기도 쉽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그래서 늦기 전에 서둘러 남은 이야기들을 써 보려 한다. 우선 올해 쓴 장편소설이 내년에 출간될 예정이다. 작가의 천국에서 일어나는 일을 그린 다소 우스꽝스러운 이야기이다. 이 책이 나온 뒤의 일은 아직 생각해 보지 않았다. 막연히 미래를 생각해 보면 지금과 별로 다르지 않은 모습이 떠오른다. 균형을 잃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밧줄에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버둥대면서, 침을 놓다 말고 문득 소설 속 인물에 대해서 떠올리는. 지금 바라는 것은 다만 그 정도뿐이다. -
키를 키우는 腸, 마음을 세우는 膽…‘성장’의 새 해법윤지연 원장(장충한의원 원장·동서비교한의학회 학술이사) [한의신문] 성장을 이야기하면 대부분 성장호르몬(Growth Hormone, GH)과 인슐린유사성장인자-1(IGF-1)을 먼저 떠올린다. 실제로 지난 수십 년간 성장 의학은 GH-IGF-1 축을 중심으로 발전해 왔으며, 성장호르몬 치료는 성장호르몬 결핍증을 비롯한 일부 성장장애에서 검증된 치료법으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대사생물학과 장내미생물 연구가 발전하면서 성장을 특정 호르몬만으로 설명하기 어려워졌고, 장·간·담즙산의 대사와 성장의 관계를 함께 살펴보는 새로운 관점이 제시되고 있다. 담즙산은 더 이상 지방 소화를 돕는 소화액에 머물지 않는다. 장과 간, 면역계, 내분비계, 장내미생물을 잇는 대사 신호분자로 이해되며, 성장이 이루어질 수 있는 생리적 환경을 조절하는 인자로 주목받고 있다. ◆ 성장은 ‘환경’의 결과다 성장은 성장호르몬과 성장판만으로 결정되는 단순한 과정이 아니다. 성장판이 제 역할을 하려면 충분한 영양 공급과 정상적인 간 기능, 건강한 장내미생물, 적절한 면역 조절, 안정적인 에너지 대사 등 전신의 생리적 환경이 함께 뒷받침돼야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담즙산은 성장 환경을 조절하는 여러 요소 가운데 하나로 주목할 만하다. 담즙산은 지방과 지용성 비타민(A·D·E·K)의 흡수를 돕고, FXR과 TGR5 수용체를 통해 포도당·지질 대사, GLP-1 분비, 갑상선호르몬 활성 및 면역 항상성 조절에 관여한다. 키를 직접 늘이는 물질이라기보다 정상적인 성장을 뒷받침하는 대사 환경과 밀접하게 연결돼 있는 것이다. ◆ 腸은 ‘제2의 뇌’…장과 마음이 함께 자란다 ‘제2의 뇌’로 불리는 장에는 독자적인 신경망인 장신경계(enteric nervous system)가 발달해 있다. 장신경계는 뇌의 직접적인 지시 없이도 소화관의 운동과 분비 등을 조절하며, 장과 뇌는 미주신경과 면역·내분비·대사 신호 등을 통해 양방향으로 소통하는 ‘장-뇌 축(gut-brain axis)’을 형성한다. 여기에 담즙산과 장내미생물이 중요한 매개체로 관여한다. 장내미생물이 생성하는 다양한 대사산물과 담즙산은 신경·면역·내분비 경로를 통해 뇌 기능과 행동에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연구되고 있다. 장의 상태를 단순한 소화기능의 문제에 국한하지 않고 전신의 대사와 면역, 신경계의 상호작용 속에서 살펴봐야 하는 이유다. 우리말에도 ‘담이 크다’, ‘담대하다’처럼 담(膽)을 용기나 결단과 연결한 표현이 남아 있다. 한의학에서 담(膽)이 ‘결단(決斷)’을 주관한다고 본 점도 이러한 전통적 생명관과 연결해 살펴볼 수 있다. 현대 생명과학의 담즙산과 한의학의 담을 동일한 개념으로 볼 수는 없지만, 신체와 정신을 분리하지 않고 상호 연계된 체계로 이해하려는 관점에서는 흥미로운 학문적 접점을 찾을 수 있다. 장내세균은 담즙산의 조성을 바꾸고, 담즙산은 다시 장내미생물 생태계에 영향을 미친다. 이러한 균형이 무너지면 지방 흡수와 장 장벽 기능, 면역 항상성에 문제가 생길 수 있으며, 저등급 만성염증과 대사 이상으로 이어질 가능성도 있다. 만성염증은 성장호르몬 신호전달에 영향을 미쳐 성장에 불리한 생리적 환경을 조성할 수 있다. 특히 소장세균과다증식(SIBO)이나 만성 장질환, 담즙울체 등에서는 담즙산 대사와 영양소 흡수, 면역 항상성이 함께 영향을 받을 수 있다. AI 생성이미지 ◆ 잠·운동·음식…성장을 뒷받침하는 세 가지 생활습관 “아이들은 자면서 자란다”는 어른들의 오랜 말은 생리학적으로도 일리가 있다. 성장호르몬은 하루 종일 일정하게 분비되지 않고 파동 형태로 분비되며, 특히 깊은 잠인 서파수면(slow-wave sleep)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따라서 충분하고 규칙적인 수면은 정상적인 성장호르몬 분비 리듬을 유지하는 중요한 조건이다. 운동 역시 성장기의 건강한 신체 발달에 중요한 요소다. 달리기나 줄넘기 등 체중 부하가 가해지는 신체활동은 뼈와 근육의 발달에 긍정적인 자극을 줄 수 있다. 다만 과도한 강도의 운동이나 특정 관절에 반복적으로 부담이 집중되는 훈련은 성장기 근골격계에 무리를 줄 수 있어 적절한 강도와 휴식이 필요하다. 식습관 역시 중요하다. 장·간·담즙산과 대사의 상호작용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성장기의 식사는 단순히 ‘많이 먹느냐, 적게 먹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당류와 초가공식품에 치우친 식생활은 비만과 인슐린 저항성, 장내미생물 변화 등 대사 건강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으며, 이러한 변화가 장기간 지속되면 정상적인 성장 환경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 특히 고열량 식습관과 이에 따른 소아비만은 이른 사춘기 발현과 연관된 요인으로 지목되고 있다. 사춘기가 일찍 시작되면 초기에는 또래보다 빠르게 성장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골성숙도 빨라져 성장할 수 있는 기간이 짧아질 수 있다. ‘빨리 크는 것’이 반드시 ‘더 크게 자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결국 성장기 식습관은 현재의 영양 상태뿐 아니라 장기적인 성장과 대사 건강에도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요소다. ◆ ‘몇 cm’보다 중요한 것…몸과 마음이 함께 크는 성장 치료 한의학은 성장을 단순한 골격의 증가가 아닌 비위(脾胃)의 운화(運化), 간(肝)의 소설(疏泄), 담(膽)의 기능과 기혈(氣血), 오장육부의 조화 속에서 이루어지는 전신적 생명현상으로 이해해 왔다. 이는 장·간·장내미생물·담즙산·면역·내분비계를 하나의 생명 네트워크로 바라보는 현대 생명과학과 흥미로운 접점을 이룬다. 따라서 성장 치료 역시 성장호르몬이나 성장판에만 초점을 맞추기보다 영양·장내미생물·염증·수면·운동 등 아이가 스스로 성장할 수 있는 생리적 환경을 함께 살펴야 한다. 성장호르몬은 의학적 적응증에 따라 사용하면 효과가 검증된 치료법이지만 단순히 키를 더 키우기 위한 사용에는 기대효과와 부작용을 충분히 고려해야 한다. 한의사로서 성장 치료를 바라보며 묻게 된다. ‘우리는 아이의 키를 재면서, 마음이 얼마나 자랐는지도 함께 바라보고 있는가?’ 성장 치료의 궁극적인 목적은 몇 센티미터의 신장을 더 얻는 데 있지 않다. 몸과 마음이 함께 자라 아이가 자신의 가능성을 펼치며 건강한 어른으로 성장하도록 돕는 데 있다. -
論으로 풀어보는 한국 한의학(325)김남일 교수 경희대 한의대 의사학교실 조선의 의서 편찬사는 백성의 생명을 구제하기 위해 방대한 의학 지식을 시대에 맞게 재편한 국가적 지식공학 프로젝트였다. 인공지능(AI) 시대의 본질 역시 원천 데이터를 어떠한 철학과 체계로 구조화할 것인가에 성패가 달려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조선의 관찬의서와 이를 창조적으로 계승한 주요 의서들은 현대 AI 지식 아키텍처와 직통하며 향후 AI 한의학(K-Med)이 세계화로 나아갈 정밀한 청사진을 제공한다. 세종 15년(1433)의 『鄕藥集成方』은 ‘로컬 데이터의 표준화와 데이터 주권’을 확립한 선구적 기획이었다. 자생 약재인 향약을 표준 병증 체계와 정밀하게 매핑하고 이두를 병기해 접근성을 높였다. 이는 글로벌 LLM 환경에서 한의학 고유의 임상 지식을 고품질 표준 데이터셋으로 구축하는 ‘데이터 현지화 및 라벨링’의 원형이다. 세종 27년(1445)의 『醫方類聚』는 한·중 의서 153종을 집대성해 질병 범주별로 계층화한 ‘초거대 파운데이션 데이터베이스’이자 지식 그래프의 전형이었다. 광해군 2년(1610) 허준의 『東醫寶鑑』은 방대한 빅데이터를 인간과 임상 중심으로 재편한 ‘파인튜닝과 UX 설계의 정수’다. 내경과 외형을 앞세워 몸의 근본을 먼저 보게 한 뒤 잡병, 탕액, 침구로 이어지는 직관적 진료 알고리즘을 완성했다. 특히 ‘治病’에 앞서 ‘養生’을 중시한 철학은 예방과 생활의학을 지향하는 현대 AI 헬스케어의 목표와 직결된다. 이 지식 체계는 한국 고유의 전문적·실용적 임상의학으로 심화되었다. 인조 22년(1644) 허임의 『鍼灸經驗方』은 독창적 수기와 실증적 임상 경험을 집대성하여 물리적 중재 알고리즘을 규격화한 침구 전문 솔루션이었다. 이어 정조 23년(1799) 강명길의 관찬의서 『濟衆新編』은 『동의보감』의 방대한 체계를 임상 위주로 압축하고 실용 약성을 보완하며 경량화의 물꼬를 텄다. 이는 19세기 황도연, 황필수 부자의 『方藥合編』으로 이어져 三統 체계와 藥性歌가 결합된 실용 핸드북으로 만개했다. 관찬의 기획이 민간의 실용성과 만나 이론과 처방이 하나로 연결된 한국 한의학 고유의 ‘학술적 임상의학’을 완성한 것이며, 이는 거대 모델을 진료 일선에 최적화한 온디바이스(On-device) 솔루션의 구현이었다. 나아가 1894년 이제마의 『東醫壽世保元』은 四象體質을 통해 획일적 처방을 탈피한 대혁신이었다. 환자의 다변수 데이터를 종합 분석해 개별 최적의 처방을 도출하는 현대 정밀의학이자 AI 초개인화 맞춤 알고리즘의 선구적 모델이다. 결국 데이터 주권 매핑(향약집성방), 온톨로지 집대성(의방유취), 인간중심 인터페이스(동의보감), 중재 기술 규격화(침구경험방), 학술적 임상의학 경량화(제중신편, 방약합편), 초개인화 맞춤의학(동의수세보원)으로 이어지는 흐름은 완벽한 AI 데이터 파이프라인이다. AI 시대 K-Med의 세계화는 선조들이 일궈놓은 이 정밀한 지식 구조와 임상 데이터를 현대의 알고리즘으로 온전히 되살려내는 일이다. 수천 년 임상 빅데이터와 고유의 침구 수기, 체질 맞춤 이론이 첨단 인공지능과 결합할 때, 한국 한의학은 전 세계인의 건강을 전인적으로 돌보는 초개인화 글로벌 헬스케어의 새로운 표준으로 확고히 자리매김할 것이다. -
과학으로 보는 한약 이야기 20김호철 교수 경희대 한의대 본초학교실 교수 (주)뉴메드 대표이사 [편집자주] 본란에서는 김호철 교수(경희대 한의대 본초학교실)의 ‘과학으로 보는 한약 이야기’를 통해 임상 현장에서 자주 제기되는 한약의 궁금증과 문제들을 하나씩 짚어가며, 최신 연구 결과와 한의학적 해석을 결합해 쉽게 설명할 계획이다. 이 과정에서 독자들이 기존의 한약 지식을 새롭게 바라보고, 실제 진료 현장에서 유용하게 활용할 만한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한의사들과 이야기하다 보면 약에 대한 관심이 깊다는 것을 느낀다. 본초를 전공하지 않았어도 임상 연차가 쌓일수록 약재의 품질을 꼼꼼히 따지는 이들이 많다. 산지를 묻고 채취 시기를 묻고 절단면의 때깔을 본다. 한약을 주요 치료 수단으로 쓰는 의사로서 당연한 관심이고, 나 역시 좋은 약재를 구하려는 노력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다만 좋은 약재를 고르는 데서 관심이 멈춰서는 안 된다. 약재에 들어 있는 성분과 그 양은 가공하고 조제하는 과정에서 달라질 수 있다. 산지와 성분 함량을 따지는 만큼, 어떻게 약을 만들어야 필요한 성분이 환자의 몸에 들어가 작용할 수 있는지도 살펴야 한다. 같은 양의 아스피린, 최고혈중농도는 약 두 배 같은 아스피린을 같은 양으로 먹었는데, 최고혈중농도는 약 두 배 차이가 났다. 최고농도에 도달하는 데 걸린 시간도 한쪽은 1시간, 다른 쪽은 4시간이었다. 2022년 발표된 연구에서 성인 36명에게 인지질 복합 아스피린과 장용 아스피린을 각각 81mg씩 한 차례 투여한 결과다. 복합제는 장용정보다 혈중농도를 시간에 따라 합산한 총노출량도 44% 많았다. 혈소판에 대한 작용도 달랐다. 24시간 뒤 잔여 혈소판응집률의 중앙값은 복합제 47%, 장용정 80.5%였다. 수치가 낮을수록 혈소판 응집이 더 억제된 것으로, 복합제에서 억제 작용이 더 크게 나타났다. 이 결과가 장기 복용 시 심근경색 예방 효과의 차이까지 입증한 것은 아니지만, 유효성분과 투여량이 명확한 아스피린조차 제형에 따라 흡수와 약리 반응이 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약은 성분표에 적힌 대로 곧바로 혈액 속에 들어가지 않는다. 제제에서 방출되고, 녹고, 흡수되는 과정을 거친다. 그렇다면 여러 약재를 함께 달이는 한약은 어떨까. 처방전의 약재 이름과 중량이 같으면, 환자의 몸에 들어가는 성분과 양도 같다고 할 수 있을까. 약은 효과가 있고 안전해야 하며, 일정한 품질을 유지해야 한다. 한약의 품질도 세 가지를 함께 살펴야 한다. 어떤 약재를 쓰는지, 그 안에 어떤 성분이 얼마나 들어 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가공하고 조제해 복용하는지다. 약재의 기원: 어떤 약재를 쓰는가 약재의 품질을 살필 때 먼저 확인할 것은 처방에서 의도한 기원종과 약용부위다. 당귀가 좋은 예다. 참당귀와 중국당귀는 단순히 한국산과 중국산의 차이가 아니다. 참당귀는 Angelica gigas, 중국당귀는 Angelica sinensis로, 식물의 종부터 다르고 성분 조성도 다르다. ‘어느 나라 당귀가 더 좋은가’를 묻기 전에 ‘어떤 당귀를 쓰려는가’를 먼저 정해야 한다. 같은 식물이라도 사용하는 부위가 중요하다. 전통적으로 마황의 지상부는 땀을 내는 데, 뿌리인 마황근은 땀을 멎게 하는 데 사용해 왔다. 청피와 진피처럼 열매의 성숙도에 따라 약재를 구별하는 경우도 있다. 이는 같은 약재에 성분이 많고 적은 차이를 넘어, 서로 다른 약재로 구별해 사용하는 문제다. 산지와 등급을 따지는 것은 그다음이다. 좋은 약재를 고르는 일은 처방하려는 약재가 무엇인지 정확히 확인하는 데서 시작한다. 성분과 함량이 많다고 다가 아니다 같은 약재라도 산지와 재배 조건, 채취 시기와 생육 연수에 따라 성분의 조성과 함량이 달라진다. 약효에 기여하는 성분이라면 그 함량은 중요하다. 같은 중량을 처방해도 들어 있는 유효성분의 양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다만 성분이 많다는 말을 할 때는, 무엇이 많은지를 먼저 살펴야 한다. 품질검사에 쓰는 지표성분이 반드시 약효를 나타내는 성분은 아니다. 약재를 확인하거나 품질을 일정하게 관리하기 위해 측정하는 성분도 있다. 유럽의 생약 지침도 치료 작용에 기여하는 표지성분과 분석 목적으로 사용하는 지표성분을 구별한다. 따라서 지표성분의 함량이 높다는 이유만으로 약효가 더 좋다고 판단하기는 어렵다. 유효성분이라도 함량과 약효가 늘 같은 비율로 증가하는 것은 아니다. 가령 그 성분의 함량이 1%인 약재와 2%인 약재를 각각 10g씩 쓰면, 투입량은 100mg과 200mg이다. 그러나 약효까지 두 배가 되는지는 별개의 문제다. 실제로 얼마나 추출되고 흡수되는지, 그 양에서 치료 효과가 얼마나 달라지는지를 살펴야 한다. 규격에 맞는 원료를 쓰는 것은 기본이다. 다만 함량의 하한을 정한 규격에서는 기준을 통과한 약재끼리도 성분량이 달라질 수 있다. 둘 다 규격품이라는 뜻이지, 같은 치료 효과가 입증됐다는 뜻은 아니다. 약의 품질을 관리한다는 것은 성분이 많은 원료를 찾는 데서 그치지 않고, 치료에 필요한 성분과 함량을 파악해 그 품질을 일정하게 유지하는 일이다. 약재는 꼼꼼히 고르면서, 조제에는 얼마나 신경 쓰는가 내가 특히 짚고 싶은 것은 조제와 제형에 대한 관심이다. 한의사들과 이야기하면서 느끼는 것은, 산지와 등급에는 관심이 많지만 그 약재를 어떻게 가공하고 달여서 복용하게 할 것인지에는 상대적으로 관심이 적다는 점이다. 그러나 같은 약재를 같은 양으로 써도 조제 방법에 따라 환자가 복용하는 성분과 양은 달라진다. 부자는 가공이 안전성에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준다. 아코니틴과 같은 독성이 강한 성분은 가열하는 동안 가수분해되어 벤조일아코닌 등 상대적으로 독성이 낮은 성분으로 전환된다. 따라서 어떤 포제품을 쓰는지, 사용량과 전탕 조건이 적절한지를 함께 살펴야 한다. 좋은 산지에서 난 부자라는 사실이 적절한 포제와 전탕을 대신해 주지는 않는다. 대황은 달이는 방법과 사하작용의 관계를 보여준다. 사하작용에 기여하는 센노사이드 A는 전탕 중 추출되지만 가열에 의해 분해될 수도 있다. 한 실험에서는 센노사이드 A의 추출량이 최대가 되는 시간이 대황 분말은 10분, 절편은 40분으로 달랐으며, 사하활성도 그 함량에 비례했다. 이 연구의 조건에서 얻은 결과지만, 무조건 짧게 달이거나 오래 달이는 것으로 해결할 문제가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 대황 몇 g을 넣었는지 만큼, 어떤 크기로 썰어 얼마나 달였는지도 중요하다. 박하와 강황도 같은 문제를 보여준다. 은교산 연구에서는 전탕 온도와 시간에 따라 박하의 멘톨 추출량이 달라졌다. 강황의 커큐미노이드는 물과 에탄올의 비율에 따라 추출량에 큰 차이가 났다. 원료에 들어 있는 성분이 조제한 약에 그대로 옮겨지는 것은 아니다. 탕·산·환의 선택도 중요하다. 물로 달여 찌꺼기를 버리는 것과 약재를 분말로 만들어 복용하는 것은 먹게 되는 성분의 구성이 다르다. 같은 약재를 같은 중량으로 처방해도 제형에 따라 실제 복용하는 성분과 양이 달라질 수 있다. 따라서 제형은 복용의 편의와 함께 치료 목적을 고려해 선택해야 한다. 성분량의 차이가 모두 치료 효과의 차이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조제 방법이 최종 약의 성분과 양을 바꾼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약재의 차이에는 민감하면서 약을 만드는 과정에서 생기는 차이는 놓치고 있지 않은가. 좋은 약재를 고르는 꼼꼼함이 포제와 전탕, 제형의 선택까지 이어져야 한다. 좋은 약재에 대한 관심이 좋은 약으로 이어지려면 좋은 약재를 고르는 데 들이는 노력이 좋은 약으로 이어지려면, 조제 방법에 대한 연구와 정보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어떤 약재를 얼마나 달이고, 언제 넣으며, 어떤 제형으로 복용하는 것이 치료 목적에 적합한지 근거를 쌓아야 한다. 전통적으로 전해 온 조제법도 그 의미를 과학적으로 살펴, 한의사가 처방하고 조제할 때 활용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나는 한의사의 약에 대한 관심이 약재를 고르는 단계에서 멈추지 않았으면 한다. 산지를 묻는 꼼꼼함으로 포제와 전탕 조건을 묻고, 성분 함량을 따지는 만큼 환자의 몸에 무엇이 얼마나 들어가는지를 살폈으면 한다. 이러한 관심과 연구가 쌓여, 좋은 약재를 고르는 일부터 환자가 복용하는 약의 품질까지 뒷받침하는 제도로 이어지기를 바란다. -
자격은 이미 있는데, 준비는 되어 있는가?김은혜 가천대 한의과대학 조교수 <선생님, 이제 그만 저 좀 포기해 주세요> 저자 [편집자주] 본란에서는 한의사로서의 직분 수행과 더불어 한의약의 선한 영향력을 넓히고자 꾸준히 저술 활동을 하고 있는 김은혜 교수의 글을 소개한다. 최근 호스피스 지정기관 서류를 준비하며, 여러 날 생각이 많았다. 서류 하나하나를 채워 넣는 동안, 정작 마음에 걸렸던 것은 서류 자체가 아니라 그 서류 뒤에 서 있는 우리의 민낯이었다. 칸을 채우다 보면 자연스럽게, 우리가 정말 이 자리에 서도 되는 사람들인지를 스스로에게 묻게 되는 순간들이 있었다. 한의사는 법적으로 호스피스 전담 인력이 될 자격을 갖추고 있다. 그러나 그 자격이 현장에서 얼마나 실질적인 무게를 갖고 있는지를 스스로에게 물어보면, 선뜻 자신 있게 답하기가 어려웠다. 마약성 진통제 처방권이 없으니 통증이 급격히 변할 때 즉각 대응할 수 있는 폭이 좁고, 호스피스가 포괄수가제로 운영되는 구조 안에서 한의 치료가 어디에 어떻게 자리해야 하는지도 여전히 애매하다. 소규모로 운영되는 한방병원이 많다 보니 인력 구조나 24시간 대응 체계를 촘촘히 갖추기도 쉽지 않다. 말기 암 환자를 안전하게 모실 준비가 시설과 약품 면에서 충분한지도, 자문해 보면 자신 있게 그렇다고 답하기 어려운 곳이 적지 않을 것이다. 감염 관리나 낙상 예방 같은 기본적인 안전장치 하나하나도, 막상 세세히 들여다보면 아직 다듬어야 할 구석이 남아 있는 경우가 많다. 이 모든 것이, 굳이 누군가 지적하지 않아도 우리 스스로 이미 알고 있는 사실들이다. 실제로 확인해야 할 정보는 훨씬 많고 촘촘해 그래서였을까. 법적으로는 분명히 자격을 갖춘 인력인데, 실질적으로는 있으나 마나 한 존재로 여겨질 수 있다는 생각에 이르자 마음 한구석이 무거워졌다. 이름은 명단에 올라 있지만 정작 그 이름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스스로도 선뜻 말하기 어렵다면, 그것은 자격의 문제라기보다 준비의 문제에 가깝다. 그리고 그 무게를 다른 누구의 탓으로도 돌리기 어렵다는 사실이 더 오래 남았다. 침 치료가 암성 통증 관리에 근거를 가진 치료법이라는 사실은 이미 여러 연구를 통해 쌓여 있다. 그럼에도 정작 임종을 앞둔 환자 곁에서 그 근거를 제도 안에서 온전히 펼쳐 보이지 못하고, 오히려 급여 기준을 벗어나지 않도록 매 순간 조심해야 하는 처지에 놓여 있다면, 문제는 근거의 유무가 아니라 그 근거를 현장의 역량과 자격, 제도로 연결시키지 못한 우리 안에 있을 것이다. 좋은 근거를 갖고도 그것을 온전히 펼쳐 보이지 못하는 상황만큼 안타까운 일도 없다. 그런데 ‘있으나 마나 하다’는 말 앞에서, 나는 동시에 다른 질문 하나를 떠올리게 된다. 실제로 나는 지금 한·양방 협진이 가능한 병원에서, 말기 암 환자를 진료하고 있다. 마약성 진통제를 처방하거나 그 용량을 조절할 권한은 나에게 없다. 하지만 바로 그 환자에게 근거에 기반해 침 하나를 놓기 위해서는, 역설적으로 그 약에 대해 누구보다 정확히 알고 있어야 한다. 지금 이 환자가 어떤 마약성 진통제를 쓰고 있는지, 용량은 그동안 어떻게 조정되어 왔는지, 어떤 부작용을 겪고 있는지, 최근 며칠간 통증의 흐름은 어떠했는지, 돌발성 통증은 얼마나 자주 나타났고 그때마다 추가 진통제(PRN)가 얼마나 들어갔는지, 그리고 그 약이 경구인지 패치인지 정맥인지— 만약 패치 제형이라면 교환 시점 즈음엔 혈중 농도가 상대적으로 낮아져 환자가 평소보다 더 아파할 수 있는데 오늘이 바로 그 시점은 아닌지까지, 하나하나 확인한 뒤에야 비로소 침을 놓을 자리와 강도를 가늠할 수 있다. 진통제는 그저 하나의 예시일 뿐, 실제로 확인해야 할 정보는 이보다 훨씬 많고 촘촘하다. 자격에 걸맞은 역량을 채워 넣는 일 ‘불명확’ 처방권이 없다는 사실이, 그 약을 몰라도 된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처방권이 없기 때문에, 그 약이 지금 이 환자의 몸 안에서 어떻게 작용하고 있는지를 스스로 더 정확히 읽어낼 수 있어야 안전하고 근거 있는 치료가 가능해진다. 이 지점에서 나는 동료 한의사들에게 묻고 싶어진다. 협진 현장에서 환자를 마주할 때, 우리는 정말 이만큼의 정보를 확인한 뒤에 침을 놓고 있는가. 아니면 그저 ‘한의사도 참여하고 있다’는 명목만 채우며, 정작 그 환자의 몸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에는 눈감고 있는 것은 아닌가. 협진이라는 제도 위에 서 있다는 사실만으로는, 그 자리에 설 자격이 저절로 채워지지 않는다. 결국 이 문제는 교육으로 되돌아간다. 방금 나열한 것과 같은 수준의 정보를, 지금 협진 현장에 있는 한의사들이 당연하게 확인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 확인법을 정식으로 배운 적이 있는지부터 되짚어야 한다. 한의대 교육과정 안에서 완화의료와 호스피스를 다루는 시간이 얼마나 되는지, 통증 평가와 다학제 협진, 임종 돌봄 커뮤니케이션 같은 실무 역량을 배울 기회가 학생 때부터 마련되어 있는지를 먼저 물어야 한다. 물론, 해당 지식들이 교육과정에 들어가 있음은 학생들을 직접 가르치고 있는 사람으로서 잘 알고 있다. 반면 그와 동시에, 현 교육의 주소가 어떠한 지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죽음을 앞둔 환자와 가족 앞에서 어떤 말을 건네야 하는지, 다른 직역과 어떻게 정보를 주고받아야 하는지는 이론 강의 몇 시간으로 채워지는 역량이 아니다. 그리고 이미 임상 현장에 나가 있는 한의사들에게는, 이 영역의 최신 지견과 실무를 익힐 체계적인 재교육 과정이 있는지를 물어야 한다. 지금은 관심 있는 개인이 알아서 학회를 찾아다니거나, 뜻이 맞는 동료들끼리 스터디를 꾸리는 정도에 머물러 있는 것이 현실이다. 무엇보다, 이 낯설고도 급성장하는 영역에서 누가, 어떤 내용으로, 어떤 방식으로 교육을 설계하고 제공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가 지금 우리에게 얼마나 준비되어 있는지를 되물어야 한다. 자격은 이미 법전 안에 있는데, 그 자격에 걸맞은 역량을 채워 넣는 일은 아직 누구의 책임인지조차 뚜렷하지 않다. 왜 준비하지 못했느냐고 서로를 탓하게 되지는 않을지 호스피스와 완화의료는 요즘처럼 뜨거운 관심을 받은 적이 없다. 고령화와 존엄한 삶의 마무리에 대한 사회적 요구가 맞물리며, 이 영역은 앞으로도 계속 커질 수밖에 없는 시장이다. 그리고 최근 몇 년간 의료계를 둘러싼 여러 사건들을 떠올려 보면, 한의계가 이런 뜨거운 감자 같은 제도권 한복판에 이미 발을 들여놓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결코 당연하지도, 흔하지도 않은 기회라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된다. 제도 밖에서 아무리 목소리를 높여도 닿지 않던 자리에, 지금은 어쨌든 이름 하나는 걸쳐 있는 셈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 귀한 자리를, 정작 제대로 써 보지도 못한 채 방치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훗날 이 영역이 지금보다 훨씬 커지고 나서야, 그때는 왜 준비하지 못했느냐고 서로를 탓하게 되지는 않을지 걱정스럽다. 자리는 한번 내어주고 나면 다시 되찾기가 훨씬 더 어렵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여러 차례 지켜보지 않았던가. 인력 신고서에 이름 한 줄 적는 일이 무의미해지지 않으려면, 그 이름 뒤에 실제로 서 있을 수 있는 역량이 함께 채워져야 한다. 그 역량을 어디서부터, 누구를 위해, 어떻게 길러낼 것인지를 지금부터라도 진지하게 논의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모처럼 얻은 이 제도권 안의 자리마저 다음번에는 스스로 내어주게 될지도 모른다. 자격증 한 장으로 자리를 지킬 수 있는 시절은 이미 지났다. 지금 이 물음에 답하지 못한다면, 다음 세대의 한의사들은 아예 이 질문을 던질 기회조차 얻지 못할 수도 있다. 서류를 준비하며 마음에 남았던 무거움도, 결국 이 물음 앞에서 비롯된 것이었다는 생각을 하며 글을 마친다. -
한국기독한의사회. 자녀들과 함께한 필리핀 의료봉사[한의신문] 한국기독한의사회(회장 김동하. 참조은한의원) 의료봉사단원 15명(한의사 6명, 일반단원 9명)은 필리핀 루손섬에 있는 안티폴로, 테레사, 말람림, 실랑, 네 지역에서 의료봉사 활동과 지역 어린이 대상으로 기독교교육 및 문화 프로그램을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7개월간 준비해 9월 23일 출국, 9월 28일 귀국 일정으로 4일 동안 침, 부항, 약침, 추나, 한약, 도침, 파스, 초음파 검진 및 초음파유도하약침 진료 등의 다양한 한의약 의료서비스를 제공했다. 일반 단원들은 접수 및 안내, 예진, 진료보조, 약재 제공 등의 업무를 담당했고, 영어를 하지 못하는 현지인들을 위해서는 현지인 통역사들이 영어와 따갈로그어를 통역해서 원활하게 진료할 수 있도록 소통에 큰 도움을 줬다. 한국기독한의사회의 필리핀 의료봉사활동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2010년, 2013년, 2017년, 2018년과 올해 2026년까지 3번의 봉사는 동일한 선교사부부의 선교활동을 도와 꾸준히 의료봉사를 펼쳐왔다. 하지만 2019년 레바논 의료봉사활동을 끝으로 Covid-19 영향으로 한동안 해외 의료봉사를 하지 못했다. 이후 7년 만에 여러 기독한의사 회원들의 염원으로 해외의료봉사가 다시 재개됐다. 현실여건의 변화로 과거에 비해 단원규모는 예전만 못하나, 진료툴과 의료봉사 지역범위는 훨씬 다양해졌고 그동안의 의료봉사의 결실 또한 볼 수 있었던 값진 여정이었다. 한국기독한의사회는 2005년 10월 창립한 이래, 2007년 캄보디아를 시작으로 해마다 꾸준히 해외의료봉사를 해왔다. 여러 나라를 순회 의료봉사하면서 확장성과 다양성이라는 장점을 추구하기도 했지만, 동일한 나라, 동일한 선교사와 지속적인 유대관계를 갖고 집중적인 의료봉사를 하면서 연속성이 얻는 유익을 맛보기도 했다. 쌍방향 트루먼쇼! 자녀의 성장을 함께 기뻐하는 의료봉사 남녀노소, 세대, 취향, 생활방식, 경제소비패턴, 정치이념, 신체리듬 심지어 잠자는 습관마저 다르지만 성경적 가치관이란 공통분모 아래 단독 또는 가족과 함께한 이번 여정은 잠시나마 같은 방, 같은 하늘, 같은 비전을 바라보는 소중한 시간들이었다. 그 중 나와 너의 자녀의 진로와 성장을 함께 바라보는 것처럼 기쁘고 보람되는 일이 있을까? ‘트루먼쇼’는 한 남자의 인생 연대를 전 세계 사람들에게 실시간 방영하는 TV쇼 미국 영화다. ‘트루먼쇼’가 단방향 브라운관 속 허구영화라면, 한국기독한의사회 의료봉사에서 보고 듣는 자녀들의 성장 이야기는 현실에서 만져지고 직접 보는 3D리얼 쌍방향소통 트루먼쇼다. 자녀의 기쁨과 고통, 고민, 아픔이 공동체의 기도제목과 응원이 되고 다음 만날 날을 기대하게 된다. 때로는 또래 자녀들끼리 또는 형, 누나, 언니, 오빠, 동생들이 서로에게 비친 모습을 직간접으로 나누고 모방하면서 자신의 거울을 완성시켜 나가기도 한다. 오랜만에 의료봉사라는 이름으로 한 자리에 모여 자녀들의 안부를 묻고 나누었다. 이번 여정에는 4명의 원장이 배우자 또는 자녀와 같이 동행했다. 초등학교 때 아빠와 기독한의사 의료봉사에 참여했던 아이가 대학생이 되어 다시 참여했다. 최변탁 원장(생명수한의원)의 막내아들 개구장이 꼬마는 어엿한 성인이 되어 항공수속도 하고 무거운 물건도 들며 궂은일도 마다하지 않는 팀의 든든한 일꾼이 되었다. 30대 김남희 원장(독산한의원)은 목사 남편과 함께 미취학 아들딸을 데려와 삶의 비전을 꿈꾸었다. 경혁수 부회장(반석한의원)은 아내와 초등학생, 중학생 딸들과 함께 전체 업무분장과 어린이 문화전도체험으로 필리핀의 추억을 쌓았고, 다년간 기독한의사 의료봉사에 딸들과 함께했던 김성준 의료봉사단장(김한의원)은 이번에는 고등학생 막내아들을 데려와 부자간의 교감과 산 교육의 기회를 제공했다. 필리핀 땅에 심어진 섬김의 씨앗! 헌신의 결실을 보다 무엇보다도 보람됐던 일들은 한국기독한의사회가 8년 전에 뿌렸던 씨뿌림이 풍성한 수확의 결실이 된 소식을 들었을 때였다. 나와 가족만을 위해 살아왔던 시간을 잠깐 멈추고 다른 이의 삶을 위해 기꺼이 기쁨으로 뛰어든다는 것! 각박한 세상에서 의료봉사란 때로는 재물, 재능, 시간 낭비인 듯하다. 하지만 내가 누군가를 위해 뿌렸던 사랑과 섬김의 작은 나눔의 씨앗이 결실을 맺는 것을 보고 듣는 경험은 특별한 기쁨과 보람이 된다. 2017년 사우스빌 지역 조이풀교회에서 시작한 의료봉사는 두 선교사 부부에게는 정착 초창기여서 가뭄에 단비 내린듯한 의료봉사 일정이었다. 아무것도 없는 맨 땅에서 시작해야 하는 어려움 많은 개척 시절이었다. 이 때 마른 논에 단비와 같은 방문이 한의사와 한의사 가족 27명으로 구성된 단원이었다. 의료봉사 뿐 아니라 K-문화체험 등 다양하게 준비했다. 고성열(제일한의원) 원장의 아들이 머리에 상모를 쓰고 꽹과리를 두들기며 리드하면 다른 초등학생, 중학생 한의사 자녀들이 징과 북, 장구를 치면서 마을 한 바퀴를 돌면서 한류의 흥을 전했다. 동네 아이들과 마을 사람들의 큰 호응을 얻었던 기억이 어렴풋 났다. 선교사는 당시 한국기독한의사회의 봉사 후 교회가 마을 주민들에게 인지가 좋아지게 되는 큰 도움을 받았다고 고마워했다. 현재 조이풀교회는 지역에서 자립 가능한 큰 교회로 성장하면서 필리핀 현지인 목사에게 위임됐다. 안티폴로, 2-3시간을 달려와 치료받다 비행기 출발시간이 이른 오전시간이라 공용짐 배분 등의 수속 일정으로 새벽 5시까지 공항에 집합해야 했다. 인천공항에서 마닐라로 4시간의 비행, 마닐라에서 차로 1시간 반을 더 달려서 숙소인 안티폴로 갈릴리선교관에 도착했다. 추석 명절의 혼잡으로 돌발 상황을 알 수 없어 긴장으로 새벽부터 잠을 설치면서 여독이 풀리기도 전이었다. 첫날부터 한국선교사 30명 정도가 진료를 받기 위해 오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진료 한번 받기 위해 차로 수 시간을 달려오고 있다는 실정을 들으니 현지의 열악한 의료 환경과 그 간절한 마음이 가늠되었다. 모든 단원들은 피곤함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 진료를 했다. 그 중 치료를 받았던 어떤 선교사는 질병에 고통 받는 가족이 생각나 안타까움에 다음날 저녁에도 가족진료를 요청하기도 했다. 동남아 의료봉사 중 누리는 최대 특권은 단연코 맛있는 열대과일들이었다. 오아시스처럼 과일은 우리의 피로를 풀어주기에 충분했다. 망고, 람부탄, 망고스틴, 두리안, 용과, 아보카도, 바나나까지 한 바구니에 풍성하게 담겨 있는 모습에 한가위의 풍성함을 느낄 수 있었다. 떼레사, 주민진료와 시장 한의재택진료 둘째 날은 시청에서 실외농구장 공터 사용허가를 해주어 떼레사 대주민 의료봉사를 진행했다. 진료공간에 도착하니 일찍부터 많은 떼레사 주민들이 의자에 앉아 진료를 받기 위해 대기하고 있었다. 병원시설이 아니다 보니 야외 관람석을 베드삼아 6개의 진료베드를 임시로 만들고 각 진료실별로 책상을 설치하고 예진접수실과 약국은 별도 책상을 만들어 운영했고, 다른 한쪽 책상은 어린이존을 만들어 필리핀 어린이들에게 선물과 희망의 성경말씀을 전해 주었다. 오후가 되니 떼레사시 로델 시장에게서 왕진 요청이 왔다. 필자와 고성열 원장이 시 직원들의 안내 속에 지방자치단체장인 시장의 사택에 찾아가 한의재택진료를 했다. 필리핀의 경우는 관료주의, 신분사회라 고위 공무원의 영향이 지대하다. 특히 외국인의 경우는 자국민 위주의 외국법에서 불이익을 당하는 취약한 입지로 볼 때 더욱 현지 공무원의 협조가 필요할 경우가 많다. 우리 단원과 함께한 선교사 역시 떼레사 시장을 처음 응대하는 상황이어서 혹시나 실수하지 않을까 주의를 기울이면서 영어진료 대화에 한계는 있겠지만 정성껏 진료했다. 문진을 해보니 만성 허리통증, 어깨통증, 5개월 전 심장 부위의 통증으로 병원 검사를 했는데 재검사를 앞두고 있었다. 망진 상 복부 내장지방, 피하지방이 많이 나와 있었다. 초음파 경동맥 IMT(내중막두께) 검사를 해서 혈관나이를 측정해보니 정상범위를 넘어서 있었고 플라크가 국소적으로 돌출되어 있었다. 허리, 어깨통증, 심장통증과 중풍, 심장질환 등의 순환계질환 위험요인 중에 하나인 복부 내장지방의 적극적인 감소와 차후 현지 병원의 자세한 검사와 처치가 필요함을 주문하고 야식, 폭식, 불규칙식사, 탄수화물 섭취제한 등 식이섭생을 교육했다. 침, 부항, 약침, 추나요법 진료가 끝나자 시장은 필자에게 어떻게 이곳에 오게 되었는지 물었다. 선교사가 우리를 초청해서 떼레사 의료봉사를 하게 되었다고 대답하면서, 덧붙여 선교사가 좋은 일 많이 하시는데 필요할 때 협력도움을 부탁드렸다. 진료 후 석양을 바라보며 산비탈을 올라 지역 고위층 유지인 로페즈 가문이 지었던 유진로페즈 센터로 갔다. 센터내에서 오스카 레스토랑에서 마닐라시의 야경을 바라보며 단원들과 함께 먹는 저녁만찬은 잊을 수 없는 추억이다. 단원들 간 혹은 가족들과 함께 추억의 사진을 찍고 뜰을 거닐면서 이국 땅의 한가위 달을 만끽하니 이색적인 운치가 있었다. <가운데 로델 시장, 왼쪽 세번째 필자, 오른쪽 두번째 고성열 원장> 말람림, 소외지역에 펼쳐진 수도, 도로, 의료사업 ‘말람림’은 필리핀 언어로 ‘깊숙하다’라는 뜻이다. 의미대로 필리핀에서도 깊은 열대우림 속에 있는 소외지역이다. 셋째 날 우리가 갈 지역이었다. 필리핀에서는 4차선 큰 도로임에도 불구하고 가는 길은 구불구불한 산길을 내려가는 여정이어서 위험천만해 보였다. 큰 화물차가 많이 왕래하는 길인데 이런 산길에서 종종 차 하중을 견디지 못하고 차가 도로 옆으로 쓰러질 경우가 많다고 한다. 운행 중에 갑자기 큰 화물차가 쓰러지면 운행 중인 차는 위험천만한 상황이 될 것이고, 그 와중에 도로 정체로 얼마나 큰 불편이 있을 것인지 상상이 갔다. 우리나라 같으면 벌써 대책이 세워졌을 것이고 새로운 터널이나 고가도로 등이 세워졌을 텐데, 수십 년 째 도로 상황이 나아지지 않는다 하니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안티폴로 숙소에서 나와 큰 도로를 두어 시간 따라가다 갑자기 비포장도로 골목길로 들어섰다. 필리핀의 현실을 감안하면 큰 도로가 그럴진대 깊은 열대우림 지역의 도로 상황 개선을 정부나 지자체에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선교사부부는 말람림 지역에 들어가 물탱크를 설치하고 교회에 오는 마을 주민들과 식수와 생활용수를 공동사용 하게 했다. 하지만 아무리 필리핀 현지인들을 교육해도 사용자들이 수도꼭지를 사용 후 잠그지 않는 경우가 많아 물탱크는 금새 바닥나기 일쑤였다. 선교사는 고심 끝에 물길을 찾기로 했다. 한국에서 초빙한 전문 수맥탐지가의 도움으로 마침내 지하수 물길을 찾게 됐다. 물길이 필리핀 현지인 집 아래를 흘러가서 집 주인의 협조를 얻어 공동관리로 수도비용 원가만 받고 싼 가격에 마을주민들에게 수돗물을 공급하게 됐다. 그래서 이 곳 교회의 이름이 ‘생명의 샘’이다. 교회 주변에 모여 있는 마을 주민에게는 교회가 생명을 주는 샘터가 된 것이다. 필리핀 국가가 해야 될 일을 일개 한국인 개인이 하고 있다는 것이 같은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자부심과 존경심이 느껴졌다. 마을까지 제대로 된 아스팔트 도로가 없으니 열대 우기철에는 흙탕물이 범벅되어 차가 진흙탕에 박혀 오도가도 못하는 게 일쑤였다. 한국에 이 소식이 전하지게 되면서 한국 교인들이 십시일반하여 도로를 내었다. 하지만 약 10m가량은 도로가 다 연결되지 않은 채로 그대로 있었다. 후원금이 모인만큼만 도로가 연결된 것이다. 나머지 도로는 또 마음과 물질이 모아지면 공사가 진행될 수 있으리라는 말도 들었다. 척박한 환경 가운데서 마을 사람들의 편의를 위해 일신우일신 노력하는 선교사의 마음과 열정이 느껴졌다. 도로가 나고 식수, 생활용수가 해결되면서 주민들이 삼삼오오 모여들더니 어느덧 1,000여명이 넘는 마을로 변화됐다. 선교사는 교회가 어느 정도 자립할 수 있는 환경이 된다면 2-3년 안에 필리핀 현지인 목사에게 위임을 준비하고 있다고 한다. 비록 단 하루의 일정 이었지만 의료봉사와 합심기도로 열악한 지역 마을주민들의 어려운 사정과 몸과 마음을 위로하고 교회의 자립을 위해 응원의 마음을 모았다. 까비떼 실랑, 아름다운 새벽교회 훈련원센터 넷째 날 우리가 머무를 숙소와 의료봉사 장소의 대문이 열렸다. 그곳은 6천 평 대지위에 유럽 동화 속에나 나올법한 잘 다듬어진 정원과 사택, 기숙사, 식당, 교회가 어우러진 아름다운 대 저택단지였다. 열악한 시설에서 개척교회를 운영했던 선교사님의 기존 교회에 비하면 눈이 휘둥그레지는 곳이었다. 마치 존 번연의 소설 「천로역정」에서 크리스천이 좁은 문과 십자가, 순례자가 반드시 올라가야 하는 어려운 길인 곤란의 언덕을 넘은 끝에 만난 아름다운 궁전과도 같은 곳이었다. 올 2월 전임 선교사에게 위임 받은 새벽 훈련센터는 필리핀 현지인과 한국인들을 위한 강의, 세미나, 훈련, 휴식 공간으로 사용될 예정이었다. 선교사의 마지막 꿈은 이 공간에서 사람을 키워 사회의 빛과 소금의 역할이 되게 하는 것이었다. 새벽교회 본당 안에 진료실을 셋팅해서 의료봉사를 진행했다. 직원과 마을주민들 중에는 처음 한의의료봉사를 받아본 사람이 많았다. 병원비가 없어서 치료받지 못하고 참고 있다가 한의치료를 받고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한의치료가 얼마나 동남아 현지에서 유익한 치료도구인지 새삼 다시 느끼는 경험이 됐다. 이번 의료봉사는 여러 기독한의사 회원 및 비회원의 물심양면의 후원과 동행한 유종식 장로의 수고로 후원물품(동방메디컬, 대일제약)을 협찬 받아 진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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