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한의산업진흥협회 회장 강희정
[한의신문] 한의학은 과거의 유산에 머물러 있는 학문이 아닙니다. 대한민국이 오랜 시간 축적해 온 문화유산이면서, 진단·처방·약재·의료기기·건강관리 기술이 결합된 기술유산입니다. 앞으로 우리가 어떻게 육성하느냐에 따라 국민건강에 기여하는 의료자산이 될 수도 있고, 세계시장에서 경쟁력을 갖는 고부가가치 산업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시점에 한국한의약진흥원의 통폐합이나 기능 축소가 거론되는 것은 매우 우려스럽습니다.
한국한의약진흥원은 2019년 현재의 명칭과 체제로 출범한 이후 한의약 정책개발, 연구개발, 산업화, 한약재·한약제제 지원, 기업지원과 해외진출 등 한의약 분야의 전문 업무를 수행해 왔습니다. 한의약산업을 이해하고 산업계와 지속적으로 소통할 수 있는 사실상 유일한 정부 지원기관이기도 합니다.
한국한의약진흥원은 지난 몇 년간 한의약 정책과 연구개발, 기업지원, 해외진출 기반 조성 등 다양한 분야에서 의미 있는 역할을 수행해 왔습니다. 산업계와 현장을 연결하는 전문 지원기관으로서의 기반도 꾸준히 구축해 왔습니다. 다만 급변하는 산업환경과 AI·디지털 전환 시대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사업기획 역량과 기업 맞춤형 지원, 연구성과의 제품화와 사업화 연계 기능을 더욱 강화할 필요가 있습니다. 산업현장의 다양한 수요가 정책과 사업에 보다 신속하게 반영될 수 있도록 지속적인 혁신도 함께 요구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과제가 있다고 해서 전담기관을 없애거나 다른 기관에 흡수하는 것이 해답은 아닙니다. 오히려 변화하는 산업환경에 맞게 기능을 보완하고 역량을 강화해 한의약산업을 전담하는 전문기관으로 발전시켜야 합니다. 도로가 막힌다고 도로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도로를 넓히거나 신호체계를 변경해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 필요한 것은 기관 통폐합이 아니라 “한의약 산업지원 기능의 강화와 확장”입니다.
세계는 전통의학을 미래산업으로 키우고 있습니다
중국과 인도는 전통의학 전담조직을 중심으로 연구개발, 산업화, 디지털 전환, 표준화와 해외진출을 국가전략으로 추진하고 있습니다. 세계보건기구 역시 「전통의학 글로벌 전략 2025~2034」를 통해 근거 강화, 표준화, 보건의료체계 연계와 디지털 기술 활용을 주요 과제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세계 각국이 전통의학의 데이터와 기술표준을 선점하려는 상황에서 대한민국이 유일한 전담 지원기관을 약화시킨다면, 한의학이 가진 지식과 산업적 가치를 충분히 활용하지 못한 채 세계시장의 주도권을 다른 나라에 넘겨줄 수 있습니다.
한의약산업은 한약재와 한약제제에만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의료기기, 디지털 헬스, AI 건강관리, 식품, 뷰티, 관광과 웰니스 산업으로 확장할 수 있습니다. 국민건강에 기여하는 동시에 수출, 일자리, 지역산업과 고부가가치 시장을 만들어 낼 수 있는 분야입니다.
세계적인 K-Culture 열풍을 일시적인 콘텐츠 소비에 그치지 않고 제품과 서비스 산업으로 발전시키기 위해서도 한의학을 K-웰니스의 핵심 자산으로 육성해야 합니다.
AI 전환은 한의학을 새롭게 분석하고 검증할 기회입니다
한의학은 하나의 증상이나 수치만으로 사람의 상태를 판단하지 않습니다. 증상, 생활습관, 신체상태, 정서적 변화, 맥·설·복진 정보와 치료 반응을 종합해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패턴을 분석합니다.
이러한 복합적 특성은 기존의 단순 통계나 제한적인 분석기술만으로 설명하고 검증하기 어려웠습니다. 한의학이 실제 임상에서 활용하는 다차원적인 관계와 시간에 따른 변화를 기존 연구방법으로 충분히 다루기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AI 전환은 이러한 한계를 넘어설 새로운 가능성을 열고 있습니다.
임상정보, 생체신호, 의료영상, 설문, 처방과 치료 반응을 함께 분석하면 기존에는 확인하기 어려웠던 한의학적 패턴을 데이터로 구조화할 수 있습니다. 맥진·설진과 같은 진단기술의 객관화, 한약 처방과 약재 연구, 개인 맞춤형 건강관리, 고령자와 만성질환자의 예방관리, 다국어 한의약 지식서비스도 가능해질 수 있습니다.
AI가 한의학의 효과를 저절로 입증해 주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동안 분석하기 어려웠던 복합적인 임상정보를 연구 가능한 데이터로 전환하고, 과학적 검증의 범위와 정밀도를 높이는 중요한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바로 지금이 한의약 전담기관의 역할을 축소할 때가 아니라 확대해야 할 때입니다.
한의약 데이터의 용어와 수집기준을 표준화하고, 데이터 품질과 개인정보를 관리하며, 의료기관·대학·연구기관·기업이 함께 연구하고 실증할 수 있는 기반을 구축해야 합니다. 개별 기업이나 연구기관의 노력만으로는 이러한 국가적 기반을 만들기 어렵습니다.
한국한의약진흥원이 한의약 AI 기술을 독점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산업계와 연구기관이 안정적으로 연구개발하고 제품화할 수 있도록 공공 인프라와 지원체계를 마련하는 전문기관이 돼야 한다는 것입니다.
복지부 총괄, 진흥원 실행지원, 범부처 공동투자가 필요합니다.
한의약산업은 보건복지부의 정책과 예산만으로 성장하기 어렵습니다.
AI와 데이터는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창업과 사업화는 중소벤처기업부, 수출과 표준화는 산업통상자원부, 약용작물과 원료산업은 농림축산식품부, K-Culture와 웰니스 확산은 문화체육관광부의 정책과 연결돼야 합니다.
따라서 한의약육성발전계획은 보건복지부가 총괄하고, 한국한의약진흥원이 산업화·기술개발·AI·데이터·세계화 과제의 실행을 지원하며, 관계부처가 각자의 소관 분야에서 정책과 예산을 연계하는 한의산업 거버넌스로 발전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다음과 같은 변화가 필요합니다.
첫째, 한국한의약진흥원을 제5차 한의약육성발전 종합계획의 산업·AI·세계화 과제를 지원하는 핵심 전문기관으로 강화해야 합니다.
둘째, 한의약 임상·산업 데이터를 표준화하고 안전하게 활용할 수 있는 국가 차원의 AI·데이터 기반을 구축해야 합니다.
셋째, 관계부처의 AI·창업·수출·농업·문화 분야 지원사업을 한의약산업과 연결하는 범부처 협력체계를 마련해야 합니다.
넷째, 연구개발에서 제품화, 임상·실증, 인허가, 보험, 투자와 수출까지 이어지는 전주기 기업지원체계를 구축해야 합니다.
다섯째, 사업 건수와 예산 집행률이 아니라 제품 출시, 매출, 수출, 고용, 투자유치와 규제개선 성과를 중심으로 사업을 평가해야 합니다.
산업계가 요구하는 것은 현재의 조직을 그대로 유지해 달라는 것이 아닙니다. 부족한 부분은 과감히 개혁하되, 대한민국의 한의약산업을 책임질 전문기관의 기능과 역량은 강화해 달라는 것입니다.
한의학은 한의계만의 자산이 아닙니다. 국민 모두가 물려받은 문화유산이자 기술자산입니다. 이 소버린 보건자산을 AI 기반 미래산업과 세계적인 K-웰니스로 발전시킬 것인지,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 채 세계시장의 주도권을 다른 나라에 넘겨줄 것인지 이제 선택해야 합니다.
기관 통폐합이 아니라 한의약 산업지원 기능의 확장이 필요합니다.
복지부가 정책을 총괄하고, 한국한의약진흥원이 산업화를 전문적으로 지원하며, 관계부처가 함께 투자하는 국가 한의산업 거버넌스를 구축해야 합니다. 그것이 지금 세대가 물려받은 한의학을 미래세대의 건강과 일자리, 수출산업으로 발전시키는 길입니다.
※ 한국한의산업진흥협회(KOMPAS)는 한약재, 한약·제약, 원외탕전, 한의 의료기기, 정보통신·디지털 헬스 등 한의산업 전 분야의 기업이 참여하는 최초의 종합 한의산업협회로, 협회는 한의산업의 건전한 발전과 국민건강 증진을 목적으로 기업지원, 정책·규제 개선, 연구개발, 표준화, 수출 확대와 산업계 권익보호 업무를 수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