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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04월 21일 (화)

“서글픔이란 예우(부제: 사랑에 대하여)”

“서글픔이란 예우(부제: 사랑에 대하여)”

부산대 한의전 동제 신춘문예 수필부문 수상작
서은해 학생(부산대학교 한의학전문대학원)

동제신춘문예 서은해 학생1.jpg


[편집자 주] 부산대학교 한의학전문대학원 서은해 학생의 ‘서글픔이란 예우(부제: 사랑에 대하여)’는 제5회 동제신춘문예 수필 부문 우수작으로, 가족과의 일상 속에서 마주한 사랑과 상실의 감정을 섬세하게 그려낸 작품이다. 특히 할머니와의 동거 경험을 통해 느낀 책임과 애정, 그리고 이별을 예감하는 순간의 내면을 진솔하게 풀어내며, 사랑이 지닌 유한성과 그로부터 비롯되는 서글픔의 의미를 성찰적으로 담아냈다.

 

서글픔이란 예우 (부제: 사랑에 대하여)

 

잠시 떨어져 지내면 편할 줄 알았는데, 당신이 남기고 간 그 흔적들은 도리어 내게 수없이 깊은 서글픔을 안겨주었고, 시간의 유한함 속 무한한 사랑을 깨닫게 해주었다.

 

할머니를 우리 집에 모신 지 두어 달. 할머니는 또 한 차례의 수술을 받으시러 2주간 병원에 입원하셨다.

 

아 드디어! 드디어 잠시 나도 쉴 수 있겠구나. 바쁜 엄마를 도와 할머니의 끼니를 챙기고 일상을 살피던 두 달. 누군가의 삶을 지탱해야 한다는 책임감은 내 생활의 반경을 좁은 안방 문턱 안으로 제한해 버리곤 했다. 학업을 병행하며 스스로를 챙기기에도 허덕이던 찰나, 잠시나마 오롯이 나 자신에게만 집중하고 온전히 쉴 수 있는 시간이 잠시 주어졌다고 생각하여 도리어 마음이 편했다.

 

나는 할머니를 그토록 사랑하지만 왜 동시에 나를 짓누르는 무거운 책임감처럼 느껴졌을까. 사랑은 때로 비겁한 무게추가 된다. 할머니를 향한 지극한 애정의 뒷면에는, 나 하나 건사하기 버거운 일상의 피로가 ‘책임감’이라는 무거운 이름을 달고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안방을 정리하며 어느새 우리 집 곳곳에 스며든 할머니의 흔적들에 가만히 눈길이 갔다.

 

할머니의 의자 위에 마치 할머니를 닮은 것처럼 가지런하게 정리된 조그만 화투패. 화투패들은 화려한 꽃 그림을 모두 숨긴 채, 아무런 무늬 없는 매끄러운 뒷면만을 보이며 얌전하게 포개어져 있었다. 커다란 의자 한구석, 금방이라도 미끄러질 듯 아슬아슬하게 놓인 그 작은 플라스틱 통. 그 정갈하고도 위태로운 모양새가 꼭 우리 할머니를 닮아 있어서, 나는 목울대가 뜨거워지는 와중에도 기어코 서글픈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노인정에서 사람들과 어울려 치던 화투패를, 할머니는 우리 집 안방에서 홀로 펼쳐 들고 계셨다. 같이 칠 사람 하나 없는 방에서 수줍게 '갑오떼기'를 하며 오늘의 운세를 점치던 당신의 둥글고 작은 뒷모습이 그 화투패 하나로 내 앞에 그려졌다.

 

할머니는 텅 빈 방에서 홀로 무엇을 치우고 계셨던 걸까. 무늬 없는 시간을 한 장 한 장 겹쳐 올리며, 당신은 어떤 이별들을 미리 연습하고 계셨던 걸까. 그 작고 귀여운 질서를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자니, 사랑이라는 것이 때로는 누군가 떠난 자리에 남겨진 이토록 고요한 흔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방 문을 열면 희미하게 풍기던 알싸한 생강 내음의 정체도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원체 사탕을 먹는 사람이 없어, 사탕이라곤 구경도 할 수 없던 우리 집에, 할머니는 당신의 간식거리라며 투박한 생강 사탕 한 봉지를 챙겨오셨더랬다.

 

한 알 한 알 포장된 그 딱딱하고 노란 알맹이들을 드시기 편하게 길쭉한 사각 용기에 옮겨 담아 드렸을 때, 만족스럽게 미소 지으시던 그 할머니의 부드러운 표정이 떠올라 코끝이 맹맹해졌다. 언제 하나씩 꺼내어 적막을 달래셨는지, 이제는 바닥을 드러내며 굴러다니는 몇 알 남지 않은 사탕들이 그 방의 빈자리를 더 크게 증명하고 있었다. 그 작은 통이 비어가는 속도가 곧 할머니와 내가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의 속도인 것만 같아, 나는 차마 그 뚜껑을 닫지 못하고 한참을 들여다보았다.

 

불현듯 떠올랐다. 우리의 시간은 영원하지 않구나.

 

할머니가 남긴 그 무늬 없는 시간을 더듬다 보니, 문득 내 생의 가장 유한하고도 찬란했던 또 다른 풍경이 겹쳐 보였다. 그것은 이른 아침, 방 안까지 차오르던 하얀 눈의 기척이었다.

 

어릴 적, 이른 아침 하얀 눈이 내릴 때면 어쩌면 우리 부모님은 눈을 보며 우리가 느낄 설렘보다도 자식들에게 그 소식을 알려줄 수 있다는 더 큰 설렘을 가지고 우리를 깨우곤 하셨다. 평소라면 일어나지도 않았을 시간인데, ‘얘들아, 밖에 눈 와’라는 그 따뜻한 속삭임 한마디는 그 어떤 모닝콜보다도 확실했다. 두 눈 번쩍 뜨고 곧장 일어나 거실로 향해 하룻밤 사이 거짓말처럼 완전히 새로운 새하얀 세상이 펼쳐진 바깥을 보며 우리는 두근대는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그런 모습을 볼 수 있다는데, 어쩌면 밤새 눈이 내릴지도 모르겠다는 그 작은 설렘이, 밤하늘에 내린 작은 눈송이 하나로 더 큰 설렘이 되어 아침에 아이들에게 알려주는 그 부모님의 마음은 얼마나 순수한 사랑으로 가득했을까. 우리를 바라보는 부모님의 그 사랑 어린 눈동자의 깊이는 가늠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사랑이 눈에 보이는 것만 같던 그 시간도,

돌이켜 생각하면 벌써, 사무치게 그리워도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과거가 되었다.

 

지금 이 순간도, 사랑하는 나의 부모님, 나의 형제, 그리고 이젠 한 분의 조부모님인 외할머니가 살아계신 이 순간도 수없이 과거가 되고 있구나.

 

이 모든 흔적마저도 언젠가는 먼지처럼 흩어질 것이다. 화투패를 쥐던 할머니의 손도, 눈 소식을 전하던 부모님의 목소리도, 결국은 시간 앞에서 모두 사라질 수밖에 없다는 진실이 그제야 무섭도록 실감 났다.

 

그 순간 나는 마치 아무것도 없이, 세차게 지나가는 길 위에 그저 가만히 서서, 하염없이 쌩쌩 불며 내 뺨을 스치고 지나가는 시간이라는 바람을 맞고 있는 것만 같았다. 바람에 저항할 여력도 틈도 없이, 그저 손가락 사이사이 빠져나가는 모래알처럼 바람처럼 지나가는 찰나의 시간을 속절없이 흘려보낼 수밖에 없었다.

 

‘내가 서 있는 오늘이라는 시간도 먼 훗날 사무치게 그리워할, 더 이상 돌아갈 수 없는 순간이 되겠구나.’

 

때가 되면 언젠간 모두가 떠난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 생경하게도 너무 두렵게 다가왔다.

 

동제신춘문예 서은해 학생2.png

 

언젠가는 내 세계를 지탱하던 기둥들이 사라지고 나 혼자 남겨질 것 같다는 막막함. 하지만 나를 더 주저앉게 만든 것은 이 굴레가 나에게서 끝나지 않으리라는 사실이었다. 언젠가 나 또한 누군가의 과거가 될 것이고, 나의 아이들 역시 내가 지금 할머니를 보며 느끼는 이 유한함을 제 삶의 무게로 짊어지게 될 것이다.

 

내가 사랑하는 존재들이 이 가혹한 배움—사랑하기에 반드시 슬퍼해야 한다는 그 얄궂은 규칙—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이 못내 안쓰러웠다. 찬란한 사랑을 가르치는 일은 곧, 그 뒤에 숨은 필연적인 상실을 가르치는 일과 다르지 않았다. 이 무거운 유산을 물려주어야만 하는 생의 질서 앞에서, 나는 사랑이 지닌 숭고함보다 그 뒤에 가려진 서글픈 숙명을 마주했다.

 

나는 이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걸까.

 

뺨을 때리는 시간의 바람을 멈출 수는 없다. 하지만 그 바람 속에 가만히 서서 맞기만 하는 것과, 그 바람을 타고 나아가는 것은 다르다. 내게 남은 시간을 계산하며 두려워하기보다, 내 손끝에 닿는 할머니의 온기, 부모님의 목소리를 더 선명하게 감각하기로 했다. 어쩌면 그것이 내가 시간을 이기는 유일한 방법일 것이라 생각했다.

 

사랑에는 용기가 필요하다.

그 유한함을 끌어안을 용기가, 그리고 유한함이 주는 그 찬란한 슬픔을 품고서 언젠간 사라질 것을 알면서도 오늘 더 열렬히 사랑하겠노라 결심할 용기가.

 

결국, 서글픔이란 유한한 사랑에 대해 내가 바칠 수 있는 가장 정중한 예우이다.

 

그러니, 이 서글픔이라는 것은, ‘당신은 내게 하나뿐인 소중한 존재였습니다’라는 수줍고도 솔직한 메시지를 온몸으로 하는 경건한 의식과 같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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