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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약물 제제도 식약처 울타리 속에 : 인보사 사건을 돌아보면서조기호 경희한의대 내과학 교수 지난 2월 19일 허위자료를 제출해 골관절염 치료제 ‘인보사 케이주’(이하 인보사) 허가를 받았다는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코오롱생명과학 소속 임원들이 ‘인보사 성분조작’ 혐의에 관해 1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인보사는 1998년 개발에 착수하여 국내 첫 유전자 치료제, 국산 신약 29호로 2017년 7월 식약처로부터 품목허가를 받았으나, 미국 FDA 검증 과정에서 다른 성분이 발견되면서 식약처가 2019년 5월 인보사 품목허가를 취소하고 같은 달 30일 코오롱생명과학을 약사법 위반 혐의로 형사 고발하면서 19년 개발사가 종말을 내렸다. 인보사는 사람의 연골세포가 담긴 1액을 75%, 연골세포 성장인자(TGF-β1)를 도입한 형질전환 세포가 담긴 2액을 25% 비율로 섞은 골관절염 유전자 치료제 주사액이다. 인보사는 미국에서 임상시험 2상까지 진행됐으나 3상을 진행하던 중 미국 식품의약국(FDA)에서 인보사의 성분 중에 있어야 하는 형질전환 연골세포가 암을 일으킬 수 있는 형질전환 신장 세포로 뒤바뀐 사실이 발견되어 국내에서 발칵 뒤집힌 ‘약품 승인, 허가를 둘러싼 사건’으로 비화되었다. 허가 승인에서 취소까지 22개월 남짓 동안, 297개 의료기관에 1303명의 환자 정보가 등록됐다. 하지만 인보사 총투여 건수는 3707건에 달하고 환자 수가 3000여 명에 달하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이제 1심 재판이 끝난 상태라 뭐라 하기에는 이르지만, 나는 이 사건에서 의사의 책임과 환자의 손해는 누가, 어떻게 지는가 하는 점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특히 의사의 책임 한계는 어떻게 되는가, 이것이 나의 초미 관심사였다.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의사가 환자에게 권유하고 처방한 문제에 대해서는 전혀 논의되지 않고 있으며, 엄정한 법 테두리 내에서 일어난 일로서 의사에게 책임을 물을 것이 없다는 중론으로 흘러가고 있다. ◇법 울타리에서 안전하게 보호받아야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교훈을 얻는다. 의사의 행위가 법망을 벗어나서는 보호받기 어렵지만, 그 테두리 안에서 일어난다면 1차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된다는 암묵적 신호이다. 그렇다면 우리 한의사는 얼마나 안전한 울타리 속에서, 즉 식약처의 보호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는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환자가 복용하는 모든 약물은 법의 관리 속에서 이루어져야만 발을 쭉 펴고 잘 수 있지 않을까. 이제 약이라 하는 것은 효과와 효능보다 안전성이 최우선 순위로 두어야 하는 세상이다. 한약 처방의 효능은 두루뭉술하여 적확성이 떨어진다고 하더라도 안전성만은 우위를 가지는데, 이마저 환자에게 어필되고 있지 못하다는 느낌이다. 모든 것을 공개하고, 투명하게 나아가는 세상이다. 비결과 비법이 판치는 환경은 생존경쟁에서 밀릴 수밖에 없다. 한쪽에서는 컬러 프린트로 약물 하나하나 설명해주고, 환자 본인이나 보호자가 더 알고 싶으면 즉각 알 수 있는 세상에 살고 있다는 엄중함을 새삼 재삼 깨달아야 하지 않을까. 이제 한약물 제제는 가능하면 식약처의 승인이라는 보호막 속에 넣어두어야 한다. 한의사 처방의 대다수를 점하는 첩약 비율을 엑기스 제제와 조정하여야 한다. 제약회사에서 식약처의 승인을 받기가 매우 까다롭다. 승인 절차와 과정이 까다로운 만큼 품질은 비례한다. 치료제로서의 양질은 국민 모두에게 그 혜택이 돌아간다. 좋은 품질의 수백 품목 식약처 승인 한약 제제는 침 치료와 한약 치료를 병행하는 한의 치료의 수준을 높이는 지름길이라 생각한다. 이웃 나라의 예이지만, 코로나19 와중에 일본에서는 2020년 한방제제 매출이 사상 최고점을 찍었다. 불황을 탄다든지, 취약한 환경 탓이라는 원인론은 그만하고, 양약에 비하여 안전성 면에서 우위를 점하는 한약 제제의 식약처 승인이 대폭 늘어나야 한다. 한의사와 환자의 관계에서 우리가 모자라는 것은 안전성이 확보된 한약물이다. 한국 의료의 한쪽에서는 의료 인공지능이 정확하게 진단해주고, 최선의 치료법을 찾을 때 도움을 주는 동료로 등장하고 있다. 빅데이터가 우리의 삶을 보장해 줄 다가올 시대에서 우리는 무엇을 준비하고 있는가. 협회의 새 진용이 갖춰진 이때 더 멀리, 더 높이 바라보는 시선을 주문한다. -
전염병에서 보법을 강조한 『의학심오』에서 정국팽의 혜안조기호 경희한의대 내과학 교수 지난 15일, 오는 26일부터 국내 접종을 시작하는 아스트라제네카 백신의 만 65세 이상 고령층 접종을 보류키로 했다는 뉴스가 나왔다. 65세 이상 고령층에 대한 이 백신의 코로나19 예방 효과가 충분히 입증되지 않은 터라 해외 접종 사례와 임상시험 정보 등을 토대로 효과를 확인한 후 접종 여부를 판단하겠다는 정부 방침을 보고, 의료인이라면 고령층의 면역력 저하를 기본적으로 먼저 떠올리게 된다. 백신이 체내에 들어와서 항체를 형성하는데, 마중물 같은 면역력 정도가 관건이라는 건 이미 알려져 있다. 독감 백신의 예에서도 고령자에게 항체 형성은 매우 낮다는 것이 문제가 되어 일본 의료에서는 십전대보탕 같은 보제(補劑)와 함께 투여하여야 효과를 올릴 수 있다는 의견까지 나오고 있다. 백신이 일반화되기 전에는 일을 시작하여야 할 봄, 가을걷이가 끝난 늦가을, 두 번 정도는 의례 보약을 복용하는 관습이 있었다. 부작용 걱정 없는 예방의학의 지혜였다. 코로나19에 대응하는 협회의 방향에 대하여 다른 시각에서 스펙트럼을 확장할 수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의료 이원화 제도 하에 살고 있는 우리가 실제 일원화로 시행되는 중의학의 자료를 그대로 가져와 응용하기에는 많은 부담이 생긴다. 홍콩의 사스 때 중의약 사용 데이터나 중국의 코로나19에 대한 중의약 사용의 실례, 즉 연화청온캡슐이나 청폐배독탕 같은 약물의 우리나라 국가 차원에서의 활용은 없다. 이 엄격하고 엄중한 사태인데도 이웃 국가의 전통의학 활용을 우리가 도입하지 못하는 것은 말하지 않아도 잘 아는 바이다. 일선의 현장이건 지휘 본부에서든 면허증이라는 배타성이 억누르므로 그 한계를 실감하고 있다. 이런 실정을 피부로 느낀다면 우리는 살짝 옆으로 돌려 생각하는 것도 한 방법이 아닌가 한다. 이것이 이 원고의 핵심이다. 앞서 말한 면역력 향상을 위한 한의약의 역할이다. 소문으로 듣기로는 코로나19로 신음한 2020년, 일본 의료에서 한방제제의 상승폭이 계속 이어져 신기록을 갱신하고 있다는 것이다. 과학기술의 시대에 경험해 보지 않은 팬데믹 세상에 전통의학에서 배우는 지혜는 없을까, 찾아본다. 『동의보감』보다 딱 120년 뒤인 영조 9년(1732년)에 나온 정국팽의 『의학심오』에서 오늘 그대로 적용하여도 손색이 없는 소론(小論)이 있어, 강호제현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지금으로부터 300년 채 지나지 않은 시기에 나온 그의 사고방식은 현대의 의학 이론이라 하여도 전혀 뒤지지 않는 탁견이다. 그는 전염병에 대하여 전염의 경로와 치료에 대하여 깔끔하게 정리하면서 구태여 하나 더 보태 보법을 강조하면서 마무리한다. 65세 이상 임상 데이터가 없어서 백신 접종을 늦춘다는 얘기를 듣고 중경(仲景)의 치료방법에 더한 보법 이론은 시대를 초월한 혜안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소론은 길지 않으므로 코로나19 와중에 우리 모두 한 번은 읽고 지나더라도 좋다고 생각하여 전문을 싣는다. 1. 전염병에 대하여 계절 따라 찾아오는 전염병은 들어오는 데 두 가지 길, 나가는 데 세 가지 길, 치료법은 다섯 가지가 있다. 들어오는 두 가지 길부터 설명하고자 한다. 전염병은 기후변화와 사람에게 각각 원인이 있다. 예를 들면 따뜻해야 할 봄에 아직 춥다든가, 더워야 할 여름에 오히려 서늘한 기운이 돈다든가, 서늘하여야 할 가을에 아직 덥다든가, 추워야 할 겨울에 오히려 따뜻하면 계절에 맞는 기후 상황이 아니다. 우주 변화에 어긋나는 기후인자는 인체의 경락을 따라 들어와 두통(頭痛), 발열(發熱), 해수(咳嗽) 등을 일으키고, 혹은 경종(頸腫), 발이(發頣), 대두온역(大頭溫疫) 같은 질환을 발생시킨다. 이 모두는 비정상적인 기후인자가 만들어내는 질환이다. 한 사람의 병이 한 집안에 전염되고, 한 집안의 병이 한 마을에 전염되고, 한 마을의 병이 전염되어 한 도시에 가득해지면 병의 예탁(穢濁)한 사기(邪氣)가 서로 전염되어 퍼지는 것이다. 이 사기(邪氣)는 모두 입과 코를 따라 들어가는데, 증한(憎寒), 장열(壯熱), 흉격만민(胸膈滿悶)의 증상을 나타낸다. 입과 코로 누런 분비물을 쏟아낸다. 사람끼리 전염되는 것은 기(氣)의 세력 즉 면역력에 의하는 것으로, 기후 조건과는 관계가 없다. 이것이 전염병에서 들어오는 길이 두 가지라는 것이다. 2. 전염병이 나가는 데 세 가지 길이 있다. 기후변화 인자의 전염병은 경락을 따라 들어오니 당연히 한열로 나누어 신온(辛溫), 신량(辛凉)한 약으로 병사를 흩어주어야 한다. 예를 들면 향소산(香蘇散), 보제소독음(普濟消毒飮) 류를 사용하여 경락을 따라 들어온 것을 다시 경락을 따라 나가도록 한다. 사람의 면역력 관계로 들어온 전염병은 코와 입을 따라 들어오므로 방향성(芳香性) 약들을 사용하여 예탁(穢濁)한 기(氣)를 풀어주어야 한다. 예를 들면 신출산(神朮散)과 곽향정기산(藿香正氣散) 류를 사용하여 코와 입을 따라 들어온 것을 코와 입으로 되돌아 나가도록 한다. 경락(經絡) 또는 코와 입으로 들어온 전염성 사기(邪氣)가 장부로 전입하면 조열(潮熱), 섬어(譫語), 복만창통(腹滿脹痛) 등의 증상을 나타낸다. 이것은 독기(毒氣)가 장부(臟腑) 속으로 들어온 것이므로 장위(腸胃)를 소통하지 않으면 그 독을 해결할 수 없으니 당연히 사하(瀉下)시켜야 한다. 대변을 스스로 잘 보게 되면 청법(淸法)으로 방향 전환을 한다. 사하(瀉下) 후에도 여열(餘熱)이 없어지지 않으면 역시 청법(淸法)을 사용한다. 이것은 장부의 사(邪)가 대변을 따라 나가게 하는 방법이다. 이상이 전염성 병사(病邪)를 나가게 하는 길이 세 가지이다. 요약하면 신온(辛溫)·신량(辛凉)한 약, 방향성(芳香性) 약, 사하제(瀉下劑)의 세 방법이 있다는 것을 알면 되겠다. 3. 전염병 치료에 다섯 가지 방법이 있다. 전염병이 나가는 세 가지 길, 즉 발산법(發散法), 해예법(解穢法), 공하법(攻下法)에 대하여 앞서 설명하였다. 여기서 공하법(攻下法)을 좀 더 세분하면 사하 후 청법(瀉下 後 淸法)을 별도로 분류할 수 있다. 그렇다면 세 가지 길이 네 가지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전염병 치료법은 다섯 가지라고 생각한다. 하나 추가에 대하여 설명하겠다. 사기(邪氣)가 모여드는 것은 정기(正氣)가 반드시 허(虛)하기 때문인데, 만전(萬全)을 기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보법(補法)을 써서 허점을 막아주어야 한다. 예를 들면 기허(氣虛)에는 보기(補氣), 혈허(血虛)에는 보혈(補血)하는데, 삼소음(蔘蘇飮), 인삼백호탕(人蔘白虎湯), 인삼발독탕(人蔘拔毒湯), 황룡탕(黃龍湯), 사순청량음(順淸凉飮) 등을 사용한다. 처방 가운데 인삼(人蔘), 당귀(當歸) 등이 있으므로 그 뜻은 상상해보면 알 수 있다. 앞에서 말한 네 가지 법에 보법(補法)을 더해야만 모두 이치에 맞아 들어간다. 원기를 도모함으로써 사기(邪氣)가 물러가므로 전염병 치료의 다섯 가지에 보하는 방법을 포함해야 하는 이유이다. 이 다섯 가지 법을 숙지하면 다른 여러 가지 도리와 사리에도 통하게 되니, 전염병이라 하여도 무슨 어려움이 있겠는가? <서원당 출판사의 이원철 번역을 저본(底本)으로 하였다> -
너무 앞서간 전염병학자의 전통의학과 서양의학의 만남조기호 교수 경희대학교 한의학과 내과학 지난 11월 13일, 일본 국내 발행 부수 2위의 아사히 신문 1면에 하늘의 목소리 사람의 말이라는 뜻의 「천성인어」에서 ‘너무 앞서간 전염병 학자’라는 제목의 칼럼이 실렸다. 에도 후기의 야마나시 현에 살았던 하시모토 하쿠쥬라는 한방의사가 19세기 초에 전염병의 시대에는 밀집, 밀접, 밀폐의 3밀을 피하도록 외식이나 연극 구경, 배우러 다니는 행위 등 외출을 자제하여야 하며, 입은 옷은 하룻밤 물에 담갔다가 세탁해야 하고, 답례품을 주거니 받거니 해서도 안 되며, 환자는 격리해야 한다는 주장을 소개하였다. 기술과학 문명이 주도하는 21세기 오늘날,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 19)에 대응하는 생활준칙이 이미 200년 전의 한방의사에 의하여 역설되었다는 사실을 새롭게 조명하고 있다. 그는 처음에는 한방의학을 배우고, 뒤에 서양의학을 배운 의학자로서 1809년에 『단독론(斷毒論)』을 내면서 전염병의 시대에 대처하는 방법을 구체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그가 쓴 한문책은 현대어로 번역되어 지난 2019년에 새로운 책으로 나왔으며, 의사학자들은 지금이야말로 역사의 지혜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일깨우면서 『전염병 일본사』 등을 내고 있다. 이 칼럼의 필자는 19세기가 시작할 무렵의 이론이 오늘날 코로나 대응책에도 통한다는 사실, 전염병의 본질은 사람과 사람과의 전염이라는 것, 바이러스나 백신의 정체도 전혀 몰랐던 시대에 저항력이나 면역의 이론에서 돌파구를 찾으려 했다는 사실에 주목하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의 이론이 탁견이었지만, 위대한 인물임을 몰라봤다는 사실을 반성하면서 전염병 선각자의 혼신의 가르침을 깊게 생각한다고 하였다. 니혼게이자이 신문도 작년에 몇 번이나 지나간 역사에서 경험 의학을 찾을 필요가 있다고 하였다. 이런 흐름으로 한방의학을 전공하는 일본 의사들은 <일본의사신보>, <한방의 임상> 등의 저널에 코로나 19에 대한 한방약의 역할이라는 증례를 발표하고 있다. 전통의학으로서 경험 의학이 과학과의 결합으로 개인의 방어력에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양방과 한방이라는 의료이원화의 법체제에 있는 우리라 하더라도 19세기 말, 서양의학이 들어오기 전까지의 의학은 민족의 자산으로서 가치를 가지고 있으며, 과거의 경험 의학은 너나 할 것 없이 우리 모두 공유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 말라리아 치료제를 개발한 공로로 2015년 노벨생리의학상을 수상한 중국의 투유유 약학자는 4세기에 편찬된 『비급주후방』에 나온 약재에서 힌트를 얻었다고 하였다. 어제의 경험을 통한 지식의 새로움이 그 무엇보다 필요한 시대의 좋은 예이다. 과학의 힘으로 나온 백신으로 코로나19는 멀지 않아 남의 일이 될 것이다. 그러나 ‘총, 균, 쇠’의 인류 역사에서 보듯 미증유의 바이러스는 우리를 또 위협할 것이다. 코로나가 창궐하는 지금이나 이후라 하더라도 건강하게 오래 살고자 하는 개인의 욕망은 변함이 없을 것이다. 오늘도 효과가 없다거나 가짜 뉴스라 하더라도 인터넷에서 떠도는 약물을 처방해달라는 요구가 끊임없다는 기사를 접하고 있다. 이는 다시 말하면 자신의 건강은 스스로 지켜야 하겠다는 기본 욕망에서 나온 것이다. 바이러스에 대응하는 초기의 힘은 오로지 저항하는 면역력에 달려있다. 면역력이라는 방어체계는 한의학의 기본 치료방법론이다. 개인의 항병력 정도를 진단하여 수비력과 공격력을 적절하게 배치하는 것이 한약 처방의 기본 골격이다. 오늘 한의학은 이 경험이 과학을 만나 재조명되고 있다. 터널 안에서 언제 벗어날지 모르는 불안한 상황에서 선현들이 남긴 경험 의학을 다시 생각해본다. -
한의표준임상진료지침, 누더기 될까 우려스럽다[편집자주] 본란에서는 한의표준임상진료지침 사업단에 참여한 조기호 경희한의대 내과학 교수에게 한의표준임상진료지침의 발전 방안에 대한 의견을 싣는다. 요즘 우리는 운전대를 잡으면 바로 시동을 걸지 않고 ‘내비게이션’부터 맞춰 둔다. 이 ‘내비게이션’은 요금은 조금 들더라도 더 빨리 갈 것인지, 시간이 더 걸리더라도 돈이 들지 않는 길로 갈 것인지, 아니면 둘러가더라도 신호등 없는 자동차 전용도로로 갈 것인지 등 몇 가지 선택지를 제시한다. 기존에 내가 익히 알던 것과는 전혀 다른 길로 안내하기도 하지만, 운전자는 믿고 그대로 간다. 그것이 그 시간대에 최적의 길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이 믿음은 오로지 데이터의 집적에 따른 결과에 의존한다. 설사 생각한대로 가지 못하였다 하더라도 다음에 또 같은 방법을 취하곤 한다. 그만큼 현재 우리는 데이터가 지배하는 세상에 산다. 한의사의 진료행위도 이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다. 한의사는 최적의 치료방법을 찾기 위하여 끊임없는 공부를 해야만 하는 숙명의 직업이기도 하다. 환갑이 넘은 필자는 지난 20년간 한의진료 영역에서 데이터 구축이라는 큰 숙제를 안고 살았다. 구체적으로 근거중심의학이라는 분야의 해외 저작물 소개에서부터 우리의 현주소를 되돌아 볼만한 출판물을 개인적으로, 또는 학회의 일원으로 출간함으로써 다양한 방식으로 이 분야에 일정한 역할을 하였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런 작업은 어디까지나 구슬에 지나지 않으며, 이 구슬을 보배로 만드는 것은 “진료지침 작성”이라고 생각해 왔다. 일차적으로 진료지침 작성은 학회에서 해야만 할 책무 중 하나이다. 그러나 꼭 내부자의 고발이 아니더라도 이 좁은 바닥에서 숨길 것 없이 우리 한의 관련 학회의 사정을 둘러보면 인력 풀이 부족한 것이 현실이며, 그동안 이런 작업을 반드시 해야만 한다는 책임의식이 희박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던 참에 한의표준임상진료지침 사업단이 구성되었고, 대대적인 진료지침 작성사업이 진행되게 되었다. 필자는 이 사업의 언저리에 “파킨슨병”을 주제로 참여하게 되었다. 이렇게 진료지침에 관심을 가졌던 것은, 일전에 한국한의학연구원과 공동으로 진행한 중풍 표준화 사업의 하나로서 2004년 일본뇌졸중합동위원회의 진료지침을 2005년 번역하여 제출한 적이 있어서였다. 또한 필자의 세부 전공인 파킨슨병의 일본 진료지침이 벌써 여러 번 개정되는 것을 보며 각 개정판을 통해 스스로 머릿속 지식을 업데이트해왔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진료지침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다. 여러 국가의 진료지침 중에서도 유독 일본 진료지침을 참고해온 것은 그래도 한의 치료에 대한 언급이 있어 서양의학을 하는 사람들이 한의학을 어떻게 바라보는지를 엿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나의 삶의 궤적을 먼저 적은 이유는, 우리 한의계 역시 그동안 ‘근거중심의학’이니, ‘진료지침 작성’이니 하는 문제에 많은 고민을 한 끝에 한의표준임상진료지침 사업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이제 5년이라는 1차 사업 기간이 마무리되면서 그 결과물에 대한 귀추가 주목된다. 필자도 한 꼭지를 차지하고 있어 여간 부담스러운 것이 아니다. 그래서 필자는 진료지침 개발과정에서 느꼈던 몇몇 문제점을 지적하며 앞으로 이 한의표준임상진료지침을 한의계가 어떻게 바라봐야 할지, 그 앞으로의 시선에 대하여 졸견을 피력하고자 한다. ◇한의학의 임상 가치, 세계와 공유하는 지식 체계로 만들어야 먼저, 진료지침의 내용에 대해 이야기를 하겠다. 진료지침 작성의 일차적이고 고유한 목적은 각 학회가 회원들이 임상진료에서 활용할 수 있는 ‘내비게이션’을 제시하기 위함이다. 그동안 각 학회 차원에서도 여러 차례 시도해 보았으나, 그 자료의 빈약성과 열악함 때문에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던 참에, 국가 펀드가 이루어짐에 따라 이 진료지침 작성이 시행된 것이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이 상황을 잘 이해하지 못하면, 사업단 검토위원과 연구자의 스탠스가 모호해지면서 간극이 벌어진다. 연구자의 입장에서는 국내 한의치료 자료보다 중국이나 일본 자료 의존도가 절대적으로 높을 수밖에 없다. 반면, 검토위원들은 우리 자료 또는 한의사가 익숙한 방법을 주로 요구하게 되는데, 이러다보면 배가 산으로 올라간다. 어디까지나 가이드라인 작성은 출판된 자료에 우선권을 두어야 하며, 해도 해도 안 되면 전문가 의견까지 용납하는 방식으로 작성해야 한다. 역으로 생각하면 이러한 작업을 계기로 한의 진료 영역을 중의학이나 일본 한의학까지 확대할 수 있는 계기가 되리라는 긍정적인 면도 다분히 있다. 이 사업을 통해 얻을 수 있는 부수적인 수확은 한국 한의임상을 국내에만 국한된 한의학이 아닌 동아시아 전통의학으로, 더 넓혀 갈 수 있는 기반을 다졌다는 데 있다. 따라서 국내 한의계에는 없는 자료를 억지로 찾게 할 것이 아니라, 앞으로 이번 사업결과를 토대로 더 확장된 다음 단계로 나가는 발판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진료지침 검토과정 상의 문제점도 지적하고 넘어간다. 그동안 사업단은 검토위원 위촉 시 양방의사나 그쪽에 기울어진 의견을 가진 학자를 필수로 포함시켜 양쪽의 의견 균형을 잡아 평가를 해나가는 모양새를 취해 왔다. 좋은 제도라고는 생각하나, 의료이원화 체제인 우리나라에서는 이 경우 개인의 의견을 제쳐두고 집단의 의견을 대변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렇게 위촉되었던 위원들의 발언을 보고 듣자면 여우의 신포도 우화가 생각난다. 이제 우리 한의계도 꽤나 성숙해졌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외부 의견에 휘둘릴 것이 아니라 우리 한의계 나름의 의견이 반영되도록 헤드쿼터로서 사업단이 중심을 잡아야 한다. 검토위원들의 한마디 말에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는 모습을 보면 필드에서 작업하는 우리 연구자들은 맥이 풀어지고 만다. 이제 진료지침 형식을 짚어보고자 한다. 진료지침 작성 포맷은 그냥 우리 식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우리 식으로 해서도 안 된다. 설사 우리 식으로 하였다 하더라도 이를 쳐다볼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그러므로 당연히 이런 작업포맷의 기본 형식은 누구나 그 ‘개념을 공유할’ 수 있어야 하고, ‘분류체계’가 바로 세워져야 한다는 두 전제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이를 벗어나면 아무리 열심히 한다고 하여도 헛바퀴만 돌 뿐,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사업단에서는 2017년 판을 예비인증, 금년도 판을 최종인증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면서 엄청난 혼란을 야기했다. 용어 사용의 의도와 방법을 아무리 설명하고 항의하더라도 그렇게 요구했다. 1판, 2판이라는 쉽고 글로벌한 용어가 있는데도 왜 그렇게 고집하는지 모르겠다. 진료지침 개정에 있어 밀물처럼 쏟아져 나오는 자료를 업데이트 해가는 것이 가장 중요한 기본 취지임을 잘 모르는 듯하다. 본인의 경험 지식에 추가적으로 생산된 자료를 피드백해가는 것은 오늘날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 당대 사조가 그렇다. 임상의학이라면 표준의학인 서양의학이든, 보완 · 대체의학이든, 전통의학이든, 모두 이 당대 사조에서 벗어날 수 없다. 간혹 치료법 측면에서 획기적이거나 각광을 받더라도 앞서 말한 전제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하면 유사(pseudo)라는 접두사가 붙게 되고, ‘뉴노멀’로 승격되지 못한다. 양의사와 한의사로 나뉘어진 이 의료이원화 체계에서 전통의학, 즉 한의 치료의 가치를 어떻게 ‘공유할’ 것이며, 어떻게 ‘분류할’ 것인가 하는 과제는 한의학 전공자에게 크나 큰 책무이며, 이런 면에서 우리 한의학 전공자들은 선현들에게 엄청난 부채의식을 느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작업은 순전히 우리만의 몫이다. 전통의학은 각국의 전통, 관습, 문화, 역사, 철학에 따라 달리 전승되고 계승되는 특징이 있지만, 한의학의 임상 가치를 국가적인 테두리를 넘어 세계의 지식인들과 ‘공유할 수 있는 지식’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우리 현실에 적합한 연구 방법론을 장착하여야만 한다. 또한, 경계를 넘나드는 체계 확립도 중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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