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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08월 10일 (월)

병을 배우는 교실에서, 사람을 다시 배우다

병을 배우는 교실에서, 사람을 다시 배우다

한의학 웰빙 & 웰다잉 50
― 「생애주기·돌봄 의료인문학 시즌 1」을 마치며

김은혜 교수님(최종).jpeg


김은혜 가천대 한의과대학 조교수

<선생님, 이제 그만 저 좀 포기해 주세요> 저자


 

[편집자주] 

본란에서는 한의사로서의 직분 수행과 더불어 한의약의 선한 영향력을 넓히고자 꾸준히 저술 활동을 하고 있는 김은혜 교수의 글을 소개한다.


“한의학이 인문학과 만나면 무엇이 달라질까요?” 암 환자를 진료하며 나는 자주 수치와 판단의 언어를 사용한다. 검사 결과를 살피고, 증상의 변화를 기록하며, 치료의 효과와 한계를 설명한다. 때로는 더 이상 적극적인 치료가 어려울 수 있다는 사실을 전하고, 남은 시간을 어떻게 보낼 것인지 환자와 가족에게 조심스럽게 묻기도 한다. 생사의 경계에 가까이 선 환자들을 마주하는 일은 가끔은 익숙해진 듯한 일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진료가 익숙해진다고 해서 한 사람의 고통까지 익숙해지는 것은 아니었다.


같은 병명과 비슷한 검사 결과를 가진 환자라도 각자가 두려워하는 것은 달랐다. 누군가는 통증보다 가족에게 짐이 되는 것을 두려워했고, 누군가는 치료를 멈추는 순간 자신이 포기되는 것은 아닌지 걱정했다. 어떤 환자는 하루라도 더 살기를 바랐고, 또 어떤 환자는 더 이상의 치료보다 집으로 돌아가는 것을 원했다.


의학은 질병의 경과를 설명할 수 있었지만, 그 사람이 왜 그런 선택을 하는지까지 모두 설명해주지는 못했다. 환자복 뒤에 가려진 한 사람의 관계와 기억, 책임과 후회, 끝까지 지키고 싶은 삶의 모양을 마주할 때면 의학의 언어만으로는 다 채울 수 없는 침묵이 진료실에 남았다.


그럴 때마다 한 가지 질문이 따라왔다. “우리가 만나는 환자는 치료해야 할 질환인가, 아니면 하나의 삶 전체인가.” 이 단순하지만 쉽게 답할 수 없는 질문에서 학교의 지원을 받아, 성과교류 세미나 「생애주기·돌봄 의료인문학 시즌 1」이라는 제목으로 의료, 인문학과 관련된 교수님들의 고견을 듣는 시간을 올해 상반기에 가졌다.


의료는 인간을 어디까지 이해할 수 있는가?


2026년 4월부터 6월까지 가천대학교의 지원 아래 진행된 이번 세미나는 인문학과 한의학, 생명과학과 돌봄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참여할 수 있도록 문을 열었다. 누군가는 의료의 역사를 이야기했고, 누군가는 진료실에서 마주한 몸과 문화를 이야기했다. 한의학의 고전과 철학, 유전자와 데이터, 양생과 돌봄도 하나의 자리에서 만났다.


서로 다른 언어로 출발한 강연들은 결국 하나의 물음으로 이어졌다. 의료는 인간을 어디까지 이해할 수 있는가. 그리고 우리는 어떤 의료인이 되어야 하는가.


첫 강연은 경희대학교 HK+통합의료인문학연구단 박윤재 교수님께 부탁드렸다. ‘의료가 인문학에 관심을 가지는 이유’라는 제목처럼 이번 세미나 전체를 관통하는 근본적인 질문에서 출발했다.


의료가 인간의 몸을 대상으로 한다면, 인문학은 그 몸으로 살아가는 인간의 경험을 바라본다. 같은 질환을 가진 환자라도 질병을 받아들이는 방식과 치료에 기대하는 바는 서로 다르다. 환자가 놓인 시대와 사회, 가족관계와 경제적 조건, 질병 이전의 삶까지 함께 살펴야 하는 이유다. 인문학은 책 속이나 강의실에만 머무는 학문이 아니었다. 환자가 치료를 거부하는 순간에도, 의사의 설명을 듣고도 침묵하는 보호자의 표정에도, 같은 질환을 두고 서로 다른 선택을 내리는 사람들의 삶에도 인문학은 존재했다.

 

김은혜 교수님.png


환자의 생애주기와 삶의 맥락을 이해해야 하는 이유


진료실에서 의료인은 끊임없이 질문을 받는다. 어떤 치료가 가장 효과적인가를 넘어, 이 환자에게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지, 의료인은 어디까지 개입해야 하는지, 의학적으로 가능한 치료와 환자가 바라는 삶이 다를 때 무엇을 기준으로 판단해야 하는지를 묻게 된다.


치료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의료인이 할 수 있는 일은 있는가. 이 질문 앞에서 의료의 역할은 질병을 제거하는 일에만 머물 수 없다. 환자가 자신의 상황을 이해하고 선택하도록 돕는 일, 두려움을 말할 수 있도록 기다려주는 일, 치료가 어려워진 뒤에도 환자의 곁을 지키는 일 역시 의료의 일부였다. 


수 개월간 진행된 교수님들의 강연은 진료실이 단순히 의학 지식이 적용되는 공간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해석과 이해가 끊임없이 이루어지는 장소임을 일깨워주었다.


마지막 강연까지 들으며 나는 ‘생애주기’와 ‘돌봄’이라는 두 단어를 다시 생각했다. 사람은 태어나 성장하고 늙으며, 때로는 예상하지 못한 질병을 만난다. 어떤 시기에는 누군가를 돌보고, 또 어떤 시기에는 다른 사람의 돌봄을 받아야 한다. 건강한 사람과 아픈 사람, 돌보는 사람과 돌봄을 받는 사람의 경계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쉽게 바뀐다.


의료인은 그 변화의 순간을 가까이에서 목격한다. 새로운 생명을 기다리는 사람을 만나고, 만성질환과 함께 살아가는 사람을 돌보며, 삶의 마지막을 준비하는 환자의 곁에도 선다. 같은 사람을 만나더라도 그가 생애의 어느 지점에 서 있는지에 따라 필요한 의료와 돌봄은 달라진다. 의료인이 환자의 생애주기와 삶의 맥락을 이해해야 하는 이유다. 그렇기에 의료인이 사람을 이해하는 일은 선택적인 교양이 아니라 임상 역량의 일부여야 한다.


검사 결과를 정확히 판독하고 적절한 치료를 제시하는 능력과 함께, 환자가 어떤 삶을 살아왔고 무엇을 두려워하며 무엇을 지키고 싶은지를 묻는 능력이 필요하다. 환자가 충분히 말하지 못했을 때 기다리는 능력, 의료인의 판단이 언제나 환자의 최선과 같지는 않을 수 있음을 인정하는 태도도 필요하다.


특히 치료 효과가 제한적인 상황에서는 의료인의 시선이 더욱 중요하다. 병을 낫게 할 수 없다는 사실이 의료인이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의미는 아니다. 통증과 불편을 줄이고, 환자가 원하는 사람과 함께 있을 수 있도록 돕고, 자신의 삶에 관한 결정을 스스로 내릴 수 있도록 지지하는 일은 치료 이후에도 계속되는 의료다.


우리는 어떤 의료인이 되어야 하는가?


이번 세미나가 모든 질문에 명확한 답을 주지는 않았다. 오히려 이전에는 쉽게 지나쳤던 질문을 더욱 선명하게 남겼다. 우리는 환자를 얼마나 알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의료인이 생각하는 최선과 환자가 바라는 최선이 다를 때 무엇을 기준으로 선택해야 하는가. 과학적 데이터가 설명하지 못하는 한 사람의 경험을 의료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치료할 수 없는 고통 앞에서 의료인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그리고 좋은 돌봄이란 과연 무엇인가.


2026년 봄, 서로 다른 전공과 경험을 가진 여덟 명의 연자, 박윤재 교수님(경희대학교 HK+ 통합의료인문학연구단 단장), 김태우 교수님(경희대학교 기후·몸 연구소 소장), 김현구 교수님(세명대학교 원전학의사학 교수), 이은영 박사님(경희대학교 철학과), 제소희 교수님(일본 국립민족학박물관 글로벌현상연구부 교수), 진희정 책임연구원님(한국한의학연구원 한의약데이터부 부장), 최정균 교수님(KAIST 바이오및뇌공학과 교수), 이상재 교수님(부산대학교 한의학전문대학원 예방한의학 교수) 등이 건넨 이야기는 결국 하나의 질문으로 모였다.


우리는 어떤 의료인이 되어야 하는가. 다음 진료에서, 다음 강의에서, 그리고 누군가의 삶과 아픔을 마주하는 모든 순간에 이번 세미나에서 나눈 질문을 다시 꺼내보고자 한다. 병을 치료하는 의료인이기 전에, 한 사람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을 수 있는 의료인이 되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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