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의신문] 기존의 세계배구연맹(FIVB)이 여자부에서 매년 주최하던 월드 그랑프리(World Grand Prix)대회는 2018년도부터 발리볼네이션스리그(Volleyball Nations League, VNL)으로 변경됐다.
대회는 그동안 요강에 따라서 조금씩 변화가 있었는데, 2025년에는 3주에 걸쳐서 매주 6개국씩 3개의 조로 나누어서 리그를 치르는 방식으로 진행이 됐다.
푸에리토리코 출신의 페르난도 모랄레스 감독이 이끄는 대한민국 대표팀은 1주차 경기는 브라질에서, 2주차 경기는 튀르키예에서 치뤘다. 마지막 3주차 경기는 일본의 지바현에서 폴란드, 일본, 불가리아, 프랑스와 예정이 돼 있었다.

이에 필자는 진천선수촌에서 합숙훈련을 하고 있었던 여자배구 대표팀에 팀닥터로 합류, 7월 7일 인천공항에서 선수단과 만나 일본으로 출국했다. 올해 VNL은 꼴찌를 하는 팀이 강등되는 시스템으로 잔류를 위한 승점을 쌓기 위해서 출국하는 선수단에는 보이지 않는 부담감이 내재돼 있었다.
일본에 도착 이후 간단한 입국 수속을 마치고 바로 호텔로 이동해 방 배정을 받고 짐을 정리했다. 다른 이들은 간단히 짐 정리를 하는 동안, 필자는 식사 시간이 되기 전까지 치료 물품 등을 사용하기 편하게 준비를 해둬야 했기 때문에 매우 분주한 시간을 보내야 했다.
치료실은 이번에 같이 동행한 헤드 트레이너 선생님의 방을 사용하기로 해, 그곳에 상시 사용할 물품들은 추려서 미리 옮겨 놓고, 나머지는 필요할 때 마다 방에서 옮기는 방법을 택했다.
어느덧 셋째 날 경기의 날이 다가왔다. 첫 경기 상대는 전 대한민국 대표팀 감독이자 도쿄 올림픽 4강 신화의 주역인 라바리니 감독이 이끄는 폴란드 대표팀이었다. 경기력 점검을 위해 오전에 볼 운동을 마치고, 점심 식사를 한 이후 체육관으로 경기를 하러 이동했다.
전력상 우리나라가 열세였지만, 선수들이 한 마음으로 잘 준비한 덕분에 첫 세트를 먼저 따며 기세등등하게 출발했으나 최종 경기 결과는 접전 끝에 3대 1로 석패했다. 시합이 끝나고 응원을 온 은퇴한 전 국가대표 김연경 선수와 상대팀 라바리니 감독과 함께 담소를 나눴다.

필자가 다른 대한배구협회 의무위원들과 함께 번역해 올해 초 군자출판사에서 출간한 『스포츠의학 배구편』 책에 추천사를 부탁했을 때 흔쾌히 추천사를 써준 두 분이 바로 이들이었다.
라바리니 감독은 볼 기회가 잘 없었기 때문에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싶어서, 한국에서 준비한 선물과 함께 출판된 책을 드렸다. 한 때는 한 팀의 감독과 팀닥터로 만났지만, 지금은 스포츠현장에서 만날 때마다 서로의 안부를 묻는 친구 같은 사이로 발전했다. 이런 것이 국제 스포츠 현장에서 활동하는 팀닥터의 매력적인 부분이 아닐까 싶다.
경기 후 강소휘 선수가 도핑 대상자로 선정이 돼 도핑 검사장까지 같이 이동했다. 보통 도핑 검사장에는 원활한 검사를 위해 물과 같은 음료들이 배치돼 있다. 하지만 대기실에 물이 보이지 않아서 담당자에게 영어로 물어보았는데 갸우뚱 하는 표정만 지을 뿐이었다.

이런 순간에 대비하기 위해 혹시 몰라서 그동안 연습했던 언어학습 플랫폼 듀오링고의 기량을 선보일 때가 찾아왔다. 일본어로 물은 어디에 있는지 다시 물으니, 조금 뒤에 물과 음료를 들고 나타났고, 이후 원활한 수분 보충과 함께 도핑 검사를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두 번째 경기는 일본에게 3대0으로 패했고, 세 번째 경기는 불가리아와 풀세트 접전 끝에 승점 1점을 확보했으나 아쉽게 3대 2로 지고 말았다. 하지만 이 승점 1점 덕분에 태국보다 세트 득실률에서 앞서며 꼴찌로 처질 수 있는 강등 위기를 탈출했다.
마지막 경기는 전 대한민국 대표팀 감독을 맡았던 세자르 감독이 이끄는 프랑스와의 일전이었다. 경기 전 모랄레스 감독은 선수들의 동기부여를 위해서 점수 한 점, 한 점이 잔류를 위해 너무도 중요하니 최선을 다할 것을 당부했다.
하지만 경기초반 심판의 석연치 않은 판정이 잇따르면서 3대 0으로 패했다. 자력으로 잔류를 결정짓지 못하고, 미국에서 열리는 태국과 캐나다와의 경기 결과를 지켜봐야 하는 상황이 돼 선수들의 분위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선수들에게 기량적으로 필요한 부분은 적절하게 지적하고, 알려주는 세심함과 동기부여가 충분히 될 수 있게 적절한 발언을 하는 모랄레스 감독을 보면서 대단한 리더십의 소유자라고 생각했다.

경기직후 라커룸에서는 선수들을 다독이며 그간의 소회를 정리하는 모랄레스 감독의 발언이 이어지고 있었는데, 이를 선수단에게 통역하던 통역관이 먼저 감정이 복받쳐 올라서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고, 선수들도 따라서 복잡 미묘한 감정 속에서 눈물을 쏟아냈다.
스포츠 현장에는 인생사처럼 희노애락이 공존한다. 때로는 원치 않는 결과로 인해 슬픔과 노여움에 빠질 수도 있다. 하지만 주어진 환경에서 최선을 다한 이들에게 누가 뭐라고 할 수 있을까?
세계 최고의 레벨에서 경쟁하기 위해 매 순간순간 노력하며, 태극마크가 주는 무게감 속에서 나라를 대표해 아픈 몸을 이끌고 최선을 다하는 국가대표 한 명 한명은 필자와 같은 범인(凡人)이 보기에는 이미 박수와 격려를 받기에 충분히 대단한 사람들이다.
처음 팀닥터 일을 시작했을 때, 100번째 경기까지는 동행하자는 개인적 목표를 세웠었다. 이제 어느덧 절반에 조금 못 미치는 39번째 경기를 치렀다. 스포츠 현장에는 영광의 순간만이 있지 않다. 실패와 좌절의 순간도 숱하기에 인생의 축소판에 가깝다. 작은 진료실을 벗어나서 세계라는 큰 무대에서 활동하는 선수들과 많은 관계자들을 보면서 또 한 번 인생을 배우게 됐다. 무엇보다 나 스스로를 되돌아보게 된 소중한 경험들이 이 일이 주는 최고의 매력이다.
“이 팀의 일원이 된 것은 제게 큰 영광이었습니다. 고개 숙이지 마세요. 여러분은 모두 칭찬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들입니다.”(It was my great honor to be part of this team, don’t let your heads down, all of you deserve to be prais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