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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03월 25일 (수)

[시선나누기-42] 붓과 그림자

[시선나누기-42] 붓과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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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저온 보리한의원장


 

[편집자주] 

본란에서는 공연 현장에서 느낀 바를 에세이 형태로 쓴 ‘시선나누기’ 연재를 싣습니다. 문저온 보리한의원장은 자신의 시집 ‘치병소요록’ (治病逍遙錄)을 연극으로 표현한 ‘생존신고요’, ‘모든 사람은 아프다’ 등의 공연에서 한의사가 자침하는 역할로 무대에 올랐습니다.


문저온 원장의 ‘시선나누기’ 연재를 마칩니다. 

독자 여러분과 필자에게 감사드립니다.


캄캄한 무대에 웅크리고 앉아 한 사람이 먹을 간다. 벼루 옆 촛대에 꽂힌 작은 촛불 하나가 바닥을 비춘다. 벼루에 먹이 갈리는 소리가 들릴 듯 말 듯 공간에 번진다. 그는 먹을 놓고 곁에 놓인 붓을 들어 벼루를 쓰다듬듯 먹물을 적신다. 촛불 하나로 비추는 이 광경은 보일 듯 말 듯 눈앞에 있다. 먹을 쥘 때도 붓을 쥘 때도 두 손은 맞대어 모은다. 숙인 얼굴에 불빛이랄지 그림자랄지 어슴푸레한 것이 비친다. 그는 이제 천천히 오른손에 붓을 들고 왼손에 촛불을 들고 일어선다. 종이 뒤로 들어간다.


종이는 무대 가운데 펼쳐져 있다. 엄밀히 말하면 두루마리 종이가 양쪽 기둥에 감겨 고정된 채로 공중에 펼쳐져 있다. 그는 촛불을 들고 무대 한쪽 어둠 속에서 걸어 나왔다. 너무 작은 불빛이어서 움직이는 그가 겨우 보일 뿐이었다. 촛불을 든 그가 널따란 종이 뒤로 걸어가자 불빛이 그의 그림자를 만든다. 길게 가로 펼쳐진 종이가 일순 환해지며 그림자 극장이 생겨난다. 그가 종이에 붓을 찍는다. 검은 먹물 자국이 종이 위로 번져간다. 


말하지 않고 생각을 전하는 방법은?


처음 보는 광경이다. 종이 위가 아니라 종이 뒤에서 찍는 붓 자국. 종이를 투과하는 촛불의 아련함이 한지 위로 번지면서 그가 그리는 붓 그림을 생생하게 만든다. 선 하나, 점 하나, 선 하나, 점 하나. 붓 그림을 그리며 그가 종이 뒤에서 말한다. “장자가 잠을 잔다.” “장자는 꿈속에서 나비가 된다.” 다시 선 하나, 점 하나. “나비가 잠을 잔다.” “나비는 꿈속에서 장자가 된다.” 종이 위에는 겹겹이 장자와 나비가 포개진 커다란 꽃 하나가 피어난다. 


그림을 마친 그가 자리를 옮겨 선다. 제 얼굴 뒤에 초를 갖다 대었는지 새까만 그림자 하나가 나타난다. “스승님!” 머리를 길게 땋은 옆모습이 종이 가득 나타나서 동자는 노스승께 배움을 구한다. 장자 우화 몇 장면이 연이어 나타나고 사라진다. 붓은 수월한 몸짓으로 선 하나를 긋고 선 두 개를 긋고 화폭에는 산이 나타나고 배가 나타나고 까치와 사마귀와 매미가 나타나고 그가 천천히 하늘 천 따지를 읊는다. 두루마리를 힘주어 말아 당긴다. 무대 한쪽에서 북을 치던 고수가 두루마기 옷소매로 종이를 푼다. 검을 현 누를 황을 함께 읊는다. 오래된 서정이 종이 위로 지나간다. 어둑한 무대 위로 숨소리가 고여 든다. 


팽팽한 종이를 그가 붓으로 내리칠 때 종이는 찢어질 듯 찰랑이면서 견디는 소리를 냈다. 쾌감이 일었다. 붓이 종이와 만나는 소리가 이렇게 낯설었다. 찰싹 소리를 내며 붓이 손바닥을 그리고 모기를 잡을 때 객석의 아이들이 킥킥거리며 웃었다. 장자가 아이들을 웃게 했다. 공연 막바지, 그가 생경하게 이렇게 물었다. “말하지 않고 생각을 전하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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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뀌어버린 지금 상황이 녹록지가 않네”


나는 순간 마임이스트 선생을 떠올렸다. 그가 몸으로 표현하는 것이 ‘생각’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말해서도 안 되지만, 그는 말하지 않고도 전한다. 큰 질문에 이렇게 쉬운 답을 떠올리면서 나는 빙그레 웃었다. ‘선생, 이것이 인연을 함께한 저만의 특권입니다.’ 말을 마친 그가 종이 뒤에서 붓 그림을 그린다. 집을 그리고 달을 그리고 사과를 그린다. 갑자기 보이지 않는 칼이 종이를 가른다. 집을 긋고 달을 오리고 사과를 오린다. 종이와 부딪치던 붓 소리. 이제 종이를 베어 버리는 소리. 칼날이 종이를 긋는 소리가 선득하게 귓가를 긋는다. 뚫린 종이 뒤에서 그가 손바닥에 올린 사과를 베어 문다. 


겨울을 뚫고 봄인가. 선생에게서 연락이 왔다. 

‘광복 80년, 을사늑약 120년, 그리고 자이니치! 


강제 연행 및 징집에 의해, 혹은 현실적, 사회적 이유로 자의 혹은 타의적 유배를 선택했어야만 했던 우리의 선조들과 역사의 질곡 속에서 외롭고 고된 이민자의 삶을 이어 나가야 했던 우리의 동포들에게로, 그들의 후손들에게로 떠납니다. 많은 관심과 후원을 부탁드립니다.’

작년 초봄의 ‘신유배기행’이 올해는 일본으로 간단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살아있는 예인들의 혹한기 예술 유랑-디아스포라 일본 편’이라고 적혀 있다.


“재일조선인의 ‘재일’이 ‘자이니치’야. 간단하게 줄여서 재일조선인을 자이니치라고 부르는 거지. 간편하지만 멸시하는 말이기도 해. 이번 공연에서는 그분들을 초청해서 무대를 만들려고 해요.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장소 몇 군데를 찾아가서 현지 예술가들 몇 분과 함께 무대를 꾸릴 거예요.”


예전에 보았던 다큐멘터리가 생각났다. 조선인학교 영화 얘기를 하자 선생은 안타까워했다. 

“안 그래도 조선인학교를 찾아가 보려고 했는데, 신고를 하고 허가를 받도록 바뀌어버린 지금 상황이 녹록지가 않네.”


말하지 않고도 전해지는 그 무엇


공연을 위한 후원금을 모으는 사이트에 선생은 후원금 달성에 감사하는 마음을 전하면서 시 한 편을 써서 올려놓았다. 새삼 그는 몸으로 글을 쓰는 시인이다. 


꽃은 어머니/ 꽃은 아버지/ 꽃은 나// 살아서 다행이라는/ 질곡(桎梏) 속에서/ 스러지지 않고/ 조선의 꽃으로/ 환하게 피어있는 당신입니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그 속으로 떠나가신/ 겨레의 넋들 불러 모시고/ 우리 한판/ 신명나게 놀아봅니다 ―‘자이니치 앞에 바치는 꽃’


아토는 선물이라는 뜻이라 했다. 아토는 순우리말이라 했다. 아토는 인형극 극단이라 하고, 아토는 1인 극단의 1인이라고 했다. 머리를 땋은 어여쁜 사람이 선배 연기자의 유작(遺作)을 이어받게 되었노라고 공손히 말했다. 장자와 도덕경을 읽고 있다고 했다. 촛불과 그림자, 그리고 붓그림. 그림자로도 전해지는 것이 있다면 색(色)은 무엇일까... 말하지 않고도 전해지는 그 무엇을 들고 선생은 그늘진 곳으로 사람들을 찾아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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