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씨를 쓰는 일은 나에게 늘 스트레스가 따르는 일이었다. 악필(惡筆)이다 보니 방명록에 이름 석자를 쓰는 일도 늘 머뭇거리게 마련이었다.
필사의 시작은 악필을 교정해 보고 싶어서였다.
하루 진료 일과가 끝나는 1시간 전에는 환자가 비교적 뜸한 시간이다. 매일 이 시간을 이용해서 하루 한 시간씩 세필로 필사를 했다. 당시에는 논어를 읽고 있을 때였으므로 그 뜻을 세밀하게 살펴보고, 악필도 교정해 볼 목적으로 논어 본문을 필사 했다. 붓글씨를 배워본 적이 없어서 글이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논어 필사를 마치고 맹자와 도덕경도 필사를 했다.
아주 조금씩이지만 글씨가 틀이 잡혀가고 하루 한 장 씩 쌓여가는 필사지를 보면 늘 가슴이 뿌듯한 기분을 느꼈다.
일궤위산(壹簣爲山)이라 했던가…
매일 한장씩 쌓여가는 필사지는 어느듯 논어 두권, 맹자 상하권, 도덕경 5권이 되어 책으로 엮어졌다.
필사해서 책으로 묶은 도덕보장 표지
이왕에 필사를 할거면 내가 전공하는 한의서를 필사해 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필사를 하면서 원전(原典)을 세밀하게 읽어보고 싶었다.
제일 먼저 선정한 책이 강평본(康平本) 상한론(傷寒論)이었다.
환자 진료 처방의 90% 정도를 고방(古方)으로 처방하고 있는 나로서는 당연한 선택이었다.
예로부터 중경서(仲景書)를 일러 천고묘문(千古妙文)이라 했다. 상한론에 기재되어 있는 처방들은 비록 2,000여년 전에 쓰여진 처방이지만 오늘날에도 활용 빈도가 매우 높으며, 임상에서 탁월한 효과를 발휘하는 처방들이 많다. 특히 중경(仲景) 처방의 으뜸이라고 하는 계지탕(桂枝湯)과 마황탕(麻黃湯)은 임상 현장에서 처방 빈도가 매우 높을 뿐만 아니라 효과도 매우 좋아서 지금도 이 처방을 기본으로 다양하게 가감(加減)하여 사용하고 있다.
필사한 강평상한론 목차
현재 한방건강보험에 적용이 되는 56종의 처방 가운데 상한론 처방은 갈근탕, 대시호탕, 대청룡탕, 대황목단피탕, 도인승기탕, 반하사심탕, 삼황사심탕, 소시호탕, 소청룡탕, 시호계지탕, 이중탕, 인진호탕, 조위승기탕, 황련해독탕 등 14개 처방으로 모두 임상 현장에서 다빈도로 이용되고 있으며, 모두 훌륭한 효과를 볼 수 있는 처방들이다.
강평상한론은 일본 강평(康平) 3년(1060년) 단파아충(丹波雅忠)이 초록(抄錄)한 전사본(傳寫本)으로 1936년 대총경절(大塚敬節)이 처음 학계에 보고한 상한론 고본(古本)이다.
필사한 강평상한론 본문
이 본(本)는 당대(唐代)의 권자본(卷字本)이라고 여겨지고 있으며, 1065년 교정의서국(校正醫書局)의 교정을 거치지 않은 고본(古本) 중의 하나이다.
강평상한론이 송본(宋本)과 다른 점은 원문의 형식이다.
즉 가장 초기의 원문으로 추정되는 15자행(字行)의 조문(條文)이 있으며, 대자(大字) 첩주(曡注)의 형식으로 14자행, 13자행이 있으며, 이 밖에 15자행과 14자행에 부가되어 있는 소자(小字)의 감주(嵌注)와 방주(傍注)가 있다.
이른 봄부터 하루 한 시간씩 필사한 강평상한론이 7개월에 걸쳐서 완성이 되었다. 졸필이어서 세상에 내어 놓기가 매우 부끄럽지만 한 글자 한 글자 써 내려가면서 상한론을 깊이 있게 다시 읽는 계기가 되었고, 악필 교정에도 많은 도움이 되었다.
필사한 강평상한론 표지
상한론 조문마다 나의 감성을 정성껏 넣고 보니 무엇보다도 한의학에 대한 나의 애정과 사랑이 더욱 깊어졌다.
한의사로 살아오면서 만난 모든 인연에 감사드린다.
특히 교토대학 디지털 자료와 출처미상의 필사본을 전해준 나무뿌리한의원의 조성 원장님께 고마움을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