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님은 경기도 여주군 대신면 후포리(京畿道 驪州郡 大神面 後浦里)에서 태어나 유년기(幼年期), 학동기(學童期)를 지내셨습니다. 교수님은 우연히 생겨난 그곳의 대신농업중고등학교(大神農業中高等學校)에서 학업을 하던 가운데 교장선생님으로 계시던 약용식물학자 고 임세흥(林世興) 선생님(前 서울大 林基興博士의 伯氏)으로부터 ‘농촌 잘 살기 운동’의 일환으로 ‘덴마크운동’을 전개하는 과정으로 6년간 국산본초(國産本草)에 대한 이론과 실습의 산 교육을 받게 되었는데, 그것이 지금의 본초학(本草學)을 전공(專攻)하게 된 큰 동기가 되었고, 스승님의 숭고하신 정신을 이어받아 특히 국산한약(향약)[國産韓藥(鄕藥)] 연구에 사명감을 갖게 되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교수님과는 대학 입학 후 본초반이라는 동아리 모임에서 지도교수님으로 처음 인연을 맺었습니다. 대학 생활 동안 동아리 활동에 진심인 저를 아껴주시고 졸업 후 자연스럽게 본초학을 전공하게 되었지요. 임상을 하다가 교육자의 길로 들어서면서 교수님과 백두산 횡단, 설악산, 지리산, 한라산 등 국내의 각지는 물론 인도, 스리랑카, 캄보디아 그리고 중국은 수십 차례 약초를 보기 위해 동행했지요. 교수님 그때가 그립습니다. 퇴직 후에도 가끔 연락하시어 충고와 격려를 아끼지 않았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그리고 최근에 저에게 마지막 유작을 남겨주셨지요.
“안녕? 오늘 가칭 ‘원색동서약용식물’의 원고가 마무리되어 송부하니까 확인하시고, 수정할 것은 수정하여 좋은 책을 만들어 정 교수의 경력에 업그레이드하길 바라는 바요. 저자는 정 교수와 내가 하는 것으로 하면 좋겠소. 별도로 흑백 스캔도를 송부하고 칼라도 찾아 보낼 터이니 필요한 부분은 사용토록 하시기 바랍니다. 건투를 기대해요. 신 교수. (2023년 7월6일)”
그 서문에 교수님께서는 “세월은 참으로 무상하다고나 할까? 내 나이 벌써 80세가 넘어서다니, 내가 젊었을 때는 그저 겁이 없이 오직 젊은 청춘만 생각하고 작은 체구를 이끌고 이리 뛰고 저리 뛰며 한없이 망아지 모양으로 살아왔던 그 철없는 삶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정말로 쉴 새 없이 바삐 뛰어다녔다.
세상에 태어나서 많은 고생도, 많은 경험도 하여 보고 여기저기, 이 나라 저 나라 그저 약초가 있는 곳이면 가보지 않은 곳이 거의 없을 정도가 아니던가? 일도 한없이 해보고, 돈도 한없이 벌어서 써보며 또한 한없이 돌아다녀 보았다. 산과 들, 초원과 사막, 열대와 한대, 높은 산과 낮은 산, 정말 미친 듯이 돌아다녔다.
이제 생각하니 나 자신이 정말로 호기심이 남들보다 더 많아서 미쳤었던 것 같다. 누가 오라지 않아도, 또 누가 시키지 않는데도 왜 그리 바쁘게만 살아왔는지 나도 나 자신을 모르게 살아왔다. 더불어 실수도 많이 하고 욕도 많이 얻어먹어 보았다. 뭐가 그리 잘 났다고 그랬는지 나도 나 자신을 모른다. 그러나 나는 후회하지도 않는다. 누구나 이야기하는 운(運)! 그야말로 몇 번 죽었다가 살아난 기적(奇蹟)! 바로 엊그제 같은 막내아우의 여식(조카딸)을 시집보낸 그날 밤에 내가 뇌출혈(腦出血)로 쓰러질 줄이야 뉘 알았겠나. 그러나 기적(奇蹟) 같이 살아나서 이러한 글을 쓰고 있지 않은가?
그 운(運)이 나에게 특별하게 따랐는지도 역시 모르겠다. 나는 하나님의 축복일 것으로 믿는다”고 말씀하셨죠.
저에게 마지막 유언이라고 생각하고 완성해 내겠습니다. 교수님의 큰 사랑 영원히 기억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편히 영면하시길 기원합니다.
2023년 11월 28일 제자 정종길 올림
◈ 신민교 교수님 약력
-1942년 경기도 여주군 대신면 후포리 661번지에서 출생
-경희대학교 한의과대학 졸업
-경기도 구리시에 서울한의원 개원
-사단법인 한국청년회의소 구리청년회의소 창립(초대, 2대 회장)
-관인 구리태권도장 관장
-제2대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원광대학교 한의과대학 교수
-대한본초학회회장(1986∼1989)
-원광대학교 한의과대학 학장
-원광대학교 한의과대학 명예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