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학로 원장
천안 약선당한의원<한의학당 회장>
지금까지는 주로 이론적인 부분에 대한 이야기를 했는데, 이제부터는 구체적인 방법론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서양의학의 기초가 되고 있는 해부생리학이 도대체 어떻게 한의학 속으로 들어와서 한의학을 해석하는 바탕이 될 수 있는지 의아해 하는 분들이 많으실 겁니다.
많은 한의사들은 해부생리학 = 서양의학이라는 등식으로 인식하도록 교육받았고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해부생리학은 유치원생의 교육용으로 나오는 해부생리학그림책이 있을 정도로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지극히 상식적인 학문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의사들이 해부생리학을 서양의학이라고 인식하는 것은 인체라는 실재하는 대상이 서양에서 좀 더 활발하게 연구되었고 서양의학의 입맛에 맞게 각색이 되었기 때문일 겁니다. 즉 서양의학은 그들의 의학적 필요에 따라 해부생리학을 연구하였고, 해부학과 생리학 책에 그 사실을 기록한 것입니다. 그러나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한의학 속에서도 해부학에 대한 연구가 어느 정도 되고 있었습니다. 인체라는 실제의 대상에 대한 궁금증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의학을 연구하고 질병을 치료하는 입장에서는 누구나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결코 해부생리학이 서양의학이라고 말할 수 없는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
서양에서는 해부학은 주로 외과의의 수술을 위해서, 생리학은 주로 약을 개발하기 위해서 발전을 하게 됩니다. 물론 인체를 알고 싶어 하는 학문적인 욕구가 바탕에 있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겠죠. 그러면서 해부학과 생리학은 서로 동떨어진 분야로 발전하게 되었고, 최근에 와서야 거시적인 해부학과 미시적인 생리학을 하나로 통합하여 이해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습니다.
해부학과 생리학은 학문으로는 별개의 영역이지만 인체는 이미 하나의 소우주인 것입니다. 따라서 해부학과 생리학은 인체를 이해하려는 하나의 시각일 뿐입니다. 해부학과 생리학이 인체의 전부가 아니며, 인체는 해부학과 생리학 이전에 이미 존재하는 그 무엇이었습니다. 또한 인체는 한의학 이전에도 이미 존재하는 그 무엇이었습니다.
해부학과 생리학은 인체를 해석하는 방법이며, 한의학 역시 인체를 해석하는 하나의 방법일 뿐입니다. 한의학의 방법론이나 해부생리학의 방법론은 어느 부분에서 교집합형태로 만날 수밖에 없기 때문에 한의학을 해부생리학으로 해석하는 것도 가능한 것입니다.
원래 해부학이라는 학문은 속성상 사체해부학이 기본이다 보니, 時空의 복합체인 인체에서 時가 빠져버리고 空만 다루는 반쪽짜리 학문입니다. 살아있는 인체는 4차원의 시공간에 위치하는데 해부학은 시간이 빠진 삼차원의 입체만을 다루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서양의학이 발전시킨 해부학을 한의학에서 직접 이용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어느 면에서 본다면 한의학이 가진 약점을 보완할 수도 있습니다.
한의학은 해부학적인 인체를 블랙박스로 보고 드러나는 현상(증상)만을 가지고 인체내부의 상황을 유추하는 쪽으로 발전되어 왔습니다. 그러다 보니 空이 빠진 時만을 주로 논하게 됩니다.
그러나 기능 혹은 어떤 현상(증상)이 발하기 위해서는 구조가 있어야합니다. 혀가 있기 때문에 맛을 알 수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인체에서 나타나는 기능과 그 기능을 가능하게 하는 구조는 서로 떨어질 수 없는 것이며, 따라서 인체는 기능구조복합체입니다.
예전에 한의학을 하던 선배들이 상세히 알지 못했던 구조가 현대에 와서는 거의 다 밝혀져 있는데도 불구하고, 지금도 굳이 예전처럼 반쪽을 가지고 일생동안 노력하여 겨우 전체를 알까 말까 한 길을 반복해서 갈 필요가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