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死者는 잊혀지지 않는다 다만, 意味로 남을 뿐이다”

기사입력 2006.12.15 0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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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산에서 동쪽으로 임진강을 끼고 달리다보면 전진교라는 다리가 나온다. 다리 이름에서 이미 군대 냄새가 나는 것 같다. 과연 이 다리는 허락받은 민간인이 아니면 건널 수 없는 대단한 다리다.
    일행은 오래 전에 예약을 해서 허락받고 다리를 건넜다. 허준로가 나타났다. 언덕을 넘어가 우측으로 꺽어 조금 더 가니 좌측에는 허준포대가 있고 그 맞은 편 작은 도랑 위로 구암교가 있다. 허준냄새가 갈수록 짙어진다.

    차에서 내려 비탈길을 걸었다. 정해진 길에서 한 발짝이라도 벗어나면 지뢰지대다. 선생은 안전하게 보호받고 있었다. 대한민국에서 이처럼 사람의 손을 타지 않기 위해 군대가 둘러싸 지켜주는 묘지가 얼마나 있겠는가!
    얼어붙은 낙엽이 비껴드는 햇빛에 일부 녹아 미끄럽다. 김문수 지사가 신경써주는 경기도의 가볼 만한 데라고 한다.

    391년 전, 광해 7년 음력 11월, 선생이 돌아가시고 376년이 지난 1991년 9월에 선생의 묘가 발견되었다. 일행은 그러고도 15년이 지나서 당도한 셈이다. 묘는 윗 라인에 한 기, 아랫 라인에 두 기가 있다. 위는 선생의 모친, 아래는 선생 내외의 것이다. 안동 김씨가 선생에게 시집와서 정경부인으로 묻혀 있다.

    일동 묵념하였다. 센스 부족 관계로 꽃을 준비하지 못했다.
    묵념 동안 마음이 답답하였다. 다른 무덤들(광주 망월동 같은 데) 앞에서는 슬프고 처절한 느낌을 받기도 했었다. 허나, 선생의 묘비는 반이나 잘려나가 있는 게 아닌가. 그러니 답답하다는 것이고, 그 사연(비밀)을 알고난 지금 이 글을 쓰면서 더욱 답답해지는 것이다.

    새카매진 비석은 발견 당시 두 조각이 나있었다고 하는데 그건 잘못된 표현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비석의 상반신 중 전면(前面) 절반이 두부 잘리듯이 반듯이 떨어져 나간 것이다. 비바람? 한국전쟁의 포화? 천만에 말씀이다. 인간의 의도가 개입되지 않고서는 그렇게 될 수가 없다. 전기톱도 없던 시절에 어떻게 그게 가능했을까? 망치와 정밖에는 없다.

    나는 비석을 면밀히 살펴보았다. 상반신은 물론이고 남아있는 하반신에도 파악 가능한 글자는 浚 聖 陽 功 平 5자 뿐이었다. 몇 자가 더 있었을 텐데 그 역시 멸실되어 있다. 정 맞은 냄새가 났다.
    선생은 서자 출신에다가 의관이었다. 4백여 년 전, 조선은 임진왜란으로 쑥대밭이 되었고 민심은 흉흉하였다. 의주로 몽진했다가 한양으로 돌아온 선조임금은 이렇게 탄식했다.

    “벼슬아치들은 다 구명도생하였건만, 저들이 나를 끝까지 호위하였다. 그러니 내 저들의 공을 어찌 신분을 따져 폄하하리오.” 해서, 허준을 호성공신(扈聖功臣) 3등 충근정량(忠勤貞亮)에 봉하였다. 선조뿐 아니라 세자였을 때 이미 허준의 치료를 받고 효험을 봤던 광해군도 왕이 되어서 허준을 무척 아끼고 보호하였다. 급기야 정1품에 해당하는 보국숭록대부의 작위가 내려졌으나 반대도 집요하였다. 의관이 병을 낫게 했으면 상만 내리면 그만인 것을 왜 직급까지 무리하게 높이시느냐면서 그러면 안된다고 했다. 그러나 두 왕은 윤허하지 않았다.

    조선왕조실록 중 ‘허준’이 나오는 부분을 모두 뒤져 찾아낸 사실이다.
    결과적으로, 망실된 비석의 상반신과 하반신의 하단에 있었던 글자를 복원하자면 아래 그림과 같다(나의 개인적 추정).
    참고로 비석의 뒷면을 보면 맨위에 崇자 하나만 희미하게 남아있고, 세로로 나머지 글자는 모두 멸실되어 있다. 역시 숭록대부로 시작하는 것인데 지워진 것이다.

    서자로서 살 길은 의원이 되는 것이었고, 온갖 풍상을 겪어낸 인간승리의 화신인 선생의 모든 것이 비석에 몇 글자로 남게 되었다. 그러나 그마저도 8할이 사라졌으니, 선생의 비운은 고금을 격하여 한 후학의 가슴을 아리게 하고 있다.
    死者는 잊혀지는 게 아니라 意味로 남는 것이다.

    선생이 생전에 시기와 질투를 받느라 사후에까지 모독을 당했다면 21세기의 한의학도 서자의학의 취급을 받고 있는 게 아닌가? 우리가 본디 이땅의 의업에 관한 한 서자가 아니었음에야, 이제부터라도 마음 단단히 고쳐먹고 정기존내(正氣存內) 해야 할 것이다.

    겨울날씨치고는 매우 화창한 일기 덕분에 그나마 애잔함을 줄일 수 있었다. 이 나라가 선생(한의학)을 현창(顯彰)해줄 것인가, 이 백성이 기려줄 것인가, 혹은 1만 몇 천의 한의사들이 담당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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