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거짓말 대회가 열렸다. 온갖 그럴듯한 거짓말이 난무했지만 ‘나는 거짓말을 할 줄 모릅니다’라고 한 사람이 일등을 했다. 인류를 죄악의 수렁으로 몰아넣었던 사건의 단초도 작은 거짓말이었다. 아담과 하와의 그럴듯한 말바꾸기가 인류를 도매금으로 거짓에 넘겼다는 기록이 성경의 창세기에 있다. 결국 거짓의 역사는 인류의 역사와 함께 했다.
얼마 전 유명 작가의 이름을 딴 문학상 수상작에 대한 표절시비가 있었다. 이렇게 해석하면 표절이고 저렇게 해석하면 창작의 자유다. 결국 구설수에 오른 심사위원들이 자신의 발등을 찍기보다는 비판의 손가락질을 잘라 버렸다. 가장 순수해야 할 예술영역에도 표절이라는 거짓의 역사가 심심찮게 오르내리고 있다. 그만큼 우리 모두는 거짓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그럴듯한 예복을 입고 사는 성직자이든 남의 죄를 시시콜콜 따질 수 있는 권좌에 있다 하더라도 거짓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게 인간의 연약함이다. 최근 대통령까지 나서서 확실히 밀겠다던 황우석 사단의 몰락을 지켜보면서 아직도 거짓이 힘을 발휘하는 우리 사회의 한 단면을 보는 것 같아서 씁쓸하기만 하다.
사실을 사실대로 말하고 받아들이는게 과학이라면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처럼 과대 포장하는 것은 미신이요 사이비 종교의 행태에 다름 아니다. 그럼에도 실험논문을 단 한 편이라도 써 본 사람이라면 안다. 기대에 못미치는 실험결과를 받아들었을 때 이것을 어떻게 한번 해볼까 라는 유혹이 없지 않다. 마치 거짓말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이 없듯이 가장 사실적인 실험실의 현미경을 들여다보면서도 내게 거짓말을 해봐 라고 속삭이는 소리가 들린다.
엄청난 연구비의 수혜를 입은 과학자는 그 보답을 빼어난 논문의 결과로 말을 해야 하는데 기대에 못미치는 실험결과를 받아들고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일약 대한민국의 희망으로 떠오른 황 교수의 경우 얼마든지 유혹을 받을 만 했고 그럴 수도 있었겠다라는 연민도 없지 않다.
우리나라의 경우 정부가 지원하는 연구비만 한해 6조원대에 이른다. 그러나 연구 결과물인 논문이나 연구성과에 대한 진실성 검증은 전무한 상태다. 좀 지나친 이야기지만 국내외 학계에서 매달 수천편씩 발표되고 있는 모든 연구 논문의 결과에 따르면 여태 정복되지 못할 질병도 없어야 하며 만병통치약이 나오지 않는 이유가 오히려 이상한 것이다. 그러므로 아무리 저명한 학술지에 실린 빼어난 논문이라 할지라도 논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사실을 다시금 직시해야 한다.
이번 사태의 단초는 황우석 교수의 논문 조작에 있었지만 그러한 논문을 걸러내지 못한 사이언스의 잘못도 있다. 특히 논문 그 이상으로 황우석 띄우기에 일조를 했던 언론과 정부의 과오도 짚고 가야 한다. 젊은 과학자들에게 돌아가야 할 연구비조차 싹쓸이해서 황우석 사단을 확실하게 밀어준 시스템도 점검을 받아야 하며 연구비조차 인맥과 로비력이 좌우한다는 학계의 자탄에도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러나 따먹어서는 안될 거짓의 선악과에 누가 손을 대었든 그 댓가는 치명적이며 모두에게 돌아간다. 안타깝게도 이번 사태를 지켜보면서 어느 누구 하나 책임을 지려는 사람이 없는 것도 그렇고 서로에게 손가락질만 해대며 책임 공방을 벌이는 추태가 우리를 더욱 슬프게 했다.
그래도 우리 모두는 너무 흥분하거나 좌절할 필요는 없다. 거짓없는 사회는 이 세상 어느 곳에도 없다. 다만 거짓을 어떻게 다루느냐가 성숙한 사회의 기준이다.
온갖 손가락질에 의해 그 전모를 드러내기 전에 스스로의 자성에 의해 정화될 수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이번 황우석 교수의 논문 사태보다 훨씬 악랄한 거짓도 용서하며 살아온 민족의 한 구성원으로 일말의 자긍심이 아직은 남아있기에 더욱 그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