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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12월 06일 (토)

弔辭/문준전 명예회장님 별세, “교수님, 편히 쉬세요”

弔辭/문준전 명예회장님 별세, “교수님, 편히 쉬세요”

문준전00 (1)10월 13일이 필자에게는 중요한 날이다. 1961년 군사쿠데타가 일어났던 그해 가을, 그 날은 금요일이었다. 오산비행장에서 제주도로 가기 위해 이륙했던 군 수송기가 엔진과열로 인한 고장으로 추락하면서 출장차 탑승했던 십여 명의 군 장병들이 모두 사망하고 유일하게 필자의 부친이 살아남으셨다.

주변에서는 조부모님의 독실한 신앙의 기도가 살렸다고 하였다. 물론 심각한 전신 부상으로 그 후로 수년간 병원 신세와 함께 날만 궂으면 정확한 일기예보를 하셨다. 그 후유증을 치료하기 위해 한약을 드시면서 결국 필자의 운명은 한의사로 정해졌다. 아버님은 작년에 회혼례도 하셨다. 한약 덕분이라 생각한다.

이번 10월 13일이 금요일은 아니었으나, 은사이신 문준전 교수님께서 심근경색으로 갑자기 돌아가셨다는 부고를 들었다. 교수님은 필자의 인생을 구체적으로 결정하신 분이다.



깔끔한 신사와 강직한 분위기, 논리적인 말씀이 인상적



필자는 한의대에 들어와 처음부터 학업은 뒷전이었다. 신입생 때는 학생 데모로 휴업도 많았지만 ‘경희극장’이라는 학교 연극부에서 활동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러는 가운데 참여했던 모임은 그해 결성된 ‘二五律’이라는 동아리였다. 봉사나 취미 목적이 아닌 음양과 오행을 조율한다는 취지로 만들어진 지하 학술동아리였다. 지하라 지도교수가 없던 상태로 출발했지만, 그 후로 언젠가 선배들이 교수님을 모셔와 동아리 모임에서 처음 뵀었다.

당시 교수님께서는 한의대 교수 가운데 최고 엘리트로 존경받던 터이다. 깔끔한 신사와 강직한 분위기 그리고 논리적인 말씀이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필자는 또 예과 2학년부터 ALA (AFKN Listening Association) 라는 영어공부 동아리에 빠져들었다. 스스로 경희대 ALA를 만들고 본1 때는 급기야 ALA 전국연합회장으로 선출되어 학교 공부와는 먼 생활을 했었다. 그러다 보니 겨우 진급에 본과 2학년까지 A+는 유일하게 교수님의 한방병리학 과목이었다.

본2 겨울방학이 시작되었는데, 당시 조교이던 안규석 선배로부터 전화 한 통을 받았다. “문 교수님께서 박사학위 논문을 마무리하시는데 네가 영어를 잘하니까 학교에 나와 논문 작업을 좀 도와달라”는 것이었다. 뜻밖의 전화였지만 그다음 날 바로 학교로 달려갔다. 교수님과의 본격적인 인연의 시작이다. 처음에는 영문 초록을 손보고, 몇 군데 의대 도서관에 가서 참고문헌 몇 개 찾는 것으로 며칠이면 끝나는 것이었다. 그러나 열심히 성실하게 하다 보니 교수님의 주문이 점점 늘어나서 겨울방학 내내 병리학교실에서 지내다시피 했다. 매일 밤 열 시 넘어 교문을 나오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그러는 가운데 점차 학문 연구라는 새로운 세계에 매력을 느끼게 되었고, 본3에 올라와서는 매년 열리는 행림제에서 교수님 지도로 “뉵혈의 병리에 관한 문헌적 고찰”이라는 논문을 발표하여 우수상을 받기도 하였다. 그 후로 청파동 교수님 댁을 수시로 방문하여 밤늦게까지 말씀을 듣곤 하였다. 사랑채로 항상 정갈하게 상을 봐주시던 단아한 모습의 사모님이 떠오른다. 그때 비로소 한의학에 대한 안목과 비전을 가지게 되었다.

교수님 덕에 한의대 졸업과 병리학교실 조교 생활 시작



명예회장협 (7)기억나는 말씀으로 “노랑 머리 파랑 눈동자들에게 우리도 뭔가 주어야하지 않겠나?” 점차 마음속으로 병리학교실 조교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교수님께서는 별말씀이 없으셨다. 본4에 올라가면서 제대로 공부하기 위해서는 한의대 대학원보다 KAIST의 전신인 KAIS에 진학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한의사 국시 대신 생화학 미생물학 등 시험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던 가을 어느 날 교수님을 뵈었는데, “요즘 어떻게 지내느냐”고 묻으셔서 근황을 말씀드렸다. 놀라시면서 “나는 자네가 학문 연구보다는 사회 활동을 더 잘 할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정 그러면 우리 교실에 조교로 들어오라”고 하셨다. 당시 선임 조교가 있었기 때문에 주저하시다가 필자의 굳은 의지에 결단하셨다. 당시 본관을 왕래하시면서 어렵사리 유급 조교 자리를 하나 만들어주셨다. 그 덕에 졸업하고 바로 병리학교실 조교 생활을 시작하였다.

81년이다. 그해 교수님은 졸업생들의 자발적인 출연으로 기금 1억 원의 교내 한의학연구소를 만드셨다. 한의학 분야의 연구비가 거의 없던 시절이었다. 그 취지와 규모에 대해 학교에서는 대대적으로 축하 격려하였다. 그러나 뜻밖에 동아일보에 투서가 들어가 사회면에 졸업생 강제 모금이라는 식으로 기사가 나갔다. 사회문제화되고 연구소 설립이 무산되었다.

결국, 그 책임을 지고 당시 고 이문재 부속한방병원장과 학과장인 교수님께서 사직하셨다. 두 분은 서울고 동문이다. 그러자 이에 분개한 학생들이 학생회 중심으로 장기간 수업 거부와 시험 백지 동맹 등 학내 데모를 지속하였다. 그러던 중 후배 한 명이 학교 측에 조교가 배후 조종하고 있다는 제보를 함으로써 필자는 그다음 날로 사유서 한 장 쓰고 조교직에서 쫓겨났다. 무엇보다 그 연구소가 정식 출범하고 교수님께서 그 연구소를 주도하셨다면 우리 한의계가 지금처럼 힘들게 가지는 않았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 후 교수님께서는 강남에서 개원하시다가 동국대학교 한의대학장으로 부임하여 몇 년간 교수로 봉직하셨다.

여전히 필자와 교수님과의 관계는 계속되었다. 87년 겨울, 필자를 경희대 교수로 들여보내기 위해 교수님께서는 도올 김용옥 선생님과 함께 강남의 카페에서 안규석 교수를 만나 설득했었다. 필자가 경희대로 돌아오면 교수님의 복귀가 어려워진다는 주장이 있었기 때문이다. 교수님께서는 직접 그 해명을 하시면서 필자에게 길을 내주셨다. 그래서 이듬해 필자는 모교로 돌아올 수 있었다.



한의학 발전을 위한 깊고 크신 뜻을 받드는 것이 도리



94년이다. 한약 분쟁의 성과로 보건사회부 산하에 한국한의학연구소가 설립되면서 소장 공모가 났었다. 필자는 당연히 교수님께서 최적임자라 생각하고 면접하는 날, 과천의 보사부에 직접 차를 운전하여 모시고 갔었다. 그러나 당시 동국대 학장 신분이시라 한의학연구소 이사장이던 고 조영식 경희대 총장께서는 경희대 출신이어야 한다는 주변의 강권에 밀려 다른 결정을 하셨다. 조 총장님께서는 교수님의 주례를 서셨고 또 연구소 설립 추진 등 평소 그 능력과 인품을 잘 알고 계셨지만 경희한의대 보직자들의 요구가 워낙 거셌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2011년 필자가 한국한의학연구원 원장으로 결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교수님을 찾아뵈었다. 인사드리면서 “이제서야 恨을 풀어드린다”고 하였더니 “잘 되었다”고 하시면서 너무 기뻐하셨다. 그 후 한의연에 방문하셔서 체질 진단도 하시고 여러 번 감격해 하셨다. 만약에 교수님께서 초대 소장으로 부임하셨다면 오늘의 한의연이 더 발전하지 않았을까하는 아쉬움을 갖는다.

96년이다. 교수님은 제자들의 간청과 추대로 제30대 대한한의사협회장이 되셨다. 당시 고려대학교가 홍일식 총장 주도로 한의과대학 설립을 추진했었다. 교수님을 중심으로 하는 협회 측과 고려대 측이 긴밀하게 교류하면서 상당히 진척되었는데, 마지막에 의과대학 교수들의 집단 반발로 무산되고 말았다. 안타까운 일이다. 그때 고려대학교에서 한의대를 만들었다면 한국 한의대의 위상과 수준이 지금과는 꽤 달라졌을 것으로 생각한다.

최근에는 필자가 단국대로 옮기고 나서 교수로 모시려 하였는데, 학교 측의 사정으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교수님께서는 수십 년간 양도락을 이용하여 진단하고 약 하나하나를 정밀하게 처방하면서 진료하셨다. 학교로 모셔 교수님의 임상 기록과 내용을 정리하려 하였는데 아쉽다.

10월 13일, 육신의 부친은 죽음에서 생환하셨지만, 정신적인 부친은 아주 먼 길을 떠나셨다. 교수님을 떠나 보내드리면서 더불어 크게 아쉬운 지나간 일들이 오늘의 한의계에 미치는 영향이 적지 않음을 실감한다. 가셨지만 한의학 발전을 위한 깊고 크신 뜻을 받드는 것이 제자의 도리라 생각한다. 교수님, 편히 쉬세요. 이제 저희 후학들이 남기신 뜻과 노력을 이어 다하겠습니다.



최승훈

(단국대학교 교수/한약진흥재단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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