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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09월 27일 (일)

과학으로 보는 한약 이야기 ❷

과학으로 보는 한약 이야기 ❷

환·산제로 만드는 이유: 지용성 성분을 지키는 전통 지혜

김호철 교수님.jpg

 

김호철 교수

경희대 한의과대학 본초학교실


 

[편집자주] 

본란에서는 김호철 교수(경희대 한의대 본초학교실)의 ‘과학으로 보는 한약 이야기’를 통해 임상 현장에서 자주 제기되는 한약의 궁금증과 문제들을 하나씩 짚어가며, 최신 연구 결과와 한의학적 해석을 결합해 쉽게 설명할 계획이다. 이 과정에서 독자들이 기존의 한약 지식을 새롭게 바라보고, 실제 진료 현장에서 유용하게 활용할 만한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탕제와 환산제의 장단점


물을 이용해 약재를 끓여 추출하는 탕제(湯劑)는 전통적으로 가장 많이 사용되어 온 제형이다. 준비 시간이 길고 맛이 쓰다는 단점이 있지만, 물에 잘 녹는 성분(수용성 성분)을 효과적으로 추출해 빠른 흡수를 기대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어, 한의학적 치료의 대표적 방법으로 자리 잡아왔다.


그러나 물을 용매로 삼는 이상 비극성 물질을 충분히 용출해 내기는 쉽지 않다. 실제로 많은 한약재가 지닌 핵심 효능이 지용성·비극성 성분에 의존하는 경우가 적지 않은데, 이러한 성분들은 물과 화학적 친화성이 낮아 탕제로 끓여도 기대만큼 추출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반면 환산제(丸散劑)는 약재를 곱게 분말화한 것이어서 극성·비극성 성분을 상대적으로 고르게 섭취할 수 있다. 그래서 전통적으로는 탕제가 아닌 형태로 내려오는 처방들이 많다. 예컨대 삼령백출산이나 오령산은 그 대표적인 사례로서, 산제 상태일 때의 약효가 더욱 잘 발현된다고 알려져 있다.


비극성 성분에 주목하라


예를 들면 길초근(쥐오줌풀)은 강력한 진정·수면 작용이 있음에도 전탕하면 효과가 급감하기 쉽다. 이 약재에 함유된 주요 활성 물질이 비극성 물질이어서 물에 녹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로 길초근은 알코올 추출 방식이나 산제 형태로 복용할 때 더 뚜렷한 효과가 나타난다.


오가피 역시 술에 담가 먹는 오가피주가 예로부터 잘 알려져 있는데, 이는 특정 트리테르페노이드나 리그난(lignan) 계열 성분이 물보다 알코올에 훨씬 잘 용출되기 때문이다. 


당귀수산 같은 처방에서는 ‘주수상반(酒水相拌)’이라고 하여 술과 물을 섞어 약을 달이라는 전통적 지침이 발견되는데, 이는 알코올을 가미해 비극성 성분까지 더 많이 이끌어내고자 한 선조들의 경험적 지혜로 해석할 수 있다.


복령 또한 보통 산제나 분말 상태로 이용하는 경우가 많고, 유향(乳香)과 몰약(沒藥)은 수지성 물질이 주를 이루는데, 이들 역시 물이 아니라 술이나 기름에 푼 뒤 사용해야 지용성 성분을 온전히 섭취할 수 있다. 심지어 사향(麝香)처럼 열에 약하고 물에 녹지 않는 방향성 물질의 경우, 가루로 직접 복용하거나 환제에 소량 배합하는 식으로 사용해 왔다.


이렇듯 비극성 성분이 중요한 약재는 전탕만으로는 충분한 효과를 기대하기 어려울 수 있으므로, 자연스럽게 환산제 또는 알코올 등 유기용매 추출물 형태로 쓰는 것이 전통적으로 권장되어 왔다.

 

김호철 교수님2.jpg


탕제와 환산제의 약효 차이를 설명해 주는 화학·물리학


현대 화학·약리학의 발전으로, 각 성분의 극성 정도와 용해 특성, 열 안정성, 휘발성 등을 정량적으로 측정하고 비교할 수 있게 되면서, 전탕으로 확보되는 성분과 알코올성 혹은 기타 용매 추출에서 확보되는 성분이 서로 다르다는 사실이 더욱 분명해졌다.


탕제와 환산제의 약효 차이는 화학적·물리적 원리로도 쉽게 설명된다. 물은 극성 용매(polar solvent)로서 극성 화합물을 잘 녹이지만, ‘like dissolves like(유유상종)’ 원리에 따라 지용성 물질에 대한 용해도는 낮다. 반면 알코올이나 에테르, 기름 등의 비극성 용매는 물에 녹지 않는 성분을 잘 추출할 수 있다. 


이 때문에 약재에 따라 ‘어떤 용매가 최적의 유효 성분 추출에 적합한가?’를 분석하는 일은 현대 한약 약리 연구에서 점차 중요해지고 있다. 특히 극성 지수(polarity index), 분자량, 열 안정성, 휘발성 등에 대한 면밀한 측정을 통해 “전탕으로 추출되는 성분 vs 알코올 추출로 얻어지는 성분”을 정량적으로 파악하고, 임상적 효능이나 약력학을 비교하는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는 중이다.


다양한 제형, 추출방법의 선택과 한의학의 미래


오늘날에도 한의사는 환자의 상태와 목표로 하는 약리 작용에 맞춰 제형을 결정해야 한다. 환산제가 제시된 전통 처방을 단순히 탕제로 바꿔 쓸 때는 “속도가 더 빠르니까 문제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비극성·지용성 성분이 온전하지 않으면 기대했던 효과가 반감될 수 있다.

한의학에서는 전통적으로 “탕제가 무조건 최고”라고 단정 지은 적이 없다. 우리 선조들은 “가루로 복용하라”, “술이나 식초에 담가 쓰라”, “기름에 볶아서 쓰라” 등 각 약재에 맞춰 제형과 조제 방법을 구분해왔다. 이런 전통적 지침들은 단순 편의가 아니라, 해당 약재나 처방의 본질적 효능을 온전히 이끌어내려는 경험적·실용적 지혜의 집약이다. 


현대 과학의 분석 도구와 접목해 보면, 여러 본초학 문헌에 기록된 전통 방식이 실제로 유효 성분 추출률을 높이는 합리적인 방법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결국, 탕제와 환산제는 서로 다른 효능과 특징을 지닌 중요한 도구들이다. 물이든 알코올이든, 혹은 기타 용매이든 그 선택은 한약재의 성질과 환자의 상태, 그리고 추출하고자 하는 유효 성분의 특성에 달려 있다. 


전통과 현대 과학을 조화롭게 접목한다면, 한의학은 훨씬 풍부한 치료 스펙트럼을 확보할 수 있고, 더 나은 임상 결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무엇보다 다양한 제형 선택의 폭을 넓히고, 각 제형의 장단점을 정확히 파악하여 적재적소에 활용한다면, 한의학의 미래는 한층 더 밝아질 것이다.


▷김호철 교수는? 

 

경희대 한의대 및 대학원에서 한의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고, 이후 서울의대 약리학교실, 미국 코넬의대 분자신경생물학실, 존스홉킨스의대 응급의학과, 중국 수도의대, 산동성중의병원, 베트남전통의약대학 등에서 객원교수로 연구와 교육을 수행했다. 현재는 경희한의대 본초학교실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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