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운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수
‘Oriental medicine’은 그 기원에서 한의학(韓醫學)의 영문용어로 시작한 것이 아니라 한국, 중국, 일본 등이 새로운 서양의 의학을 접하면서 서양의학(western medicine)과 대비되는 개념으로 중국의 한의학(漢醫學)과 맥을 같이 하는 한국, 중국, 일본 등의 전통적 의학을 아울러 부른 ‘동양의학’의 영문용어로 시작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동양화(oriental painting)’ 대 ‘서양화(western painting)’ 등의 분류 및 명칭에서 볼 수 있듯이 의학 분야에만 국한된 현상이 아니다(회화 분야에서도 1970~1980년대에 유사한 논의가 있었고 교육부 공청회 등을 거쳐 기존의 ‘동양화(Oriental painting)’를 ‘한국화’로 대체하면서 그에 상응하는 영문용어 ‘Korean painting’을 사용하고 있다).
orient 또는 oriental이라는 단어는 지중해 연안의 국가들에서 ‘해가 뜨는 지역’이란 의미로 사용되어 자연스럽게 동쪽 지역을 지칭하게 되고 시대에 따라 그 단어들이 실질적으로 지칭하는 지역이 달라져 왔다.
현대 영어에서 orient 또는 oriental은 지역적으로는 주로 중국과 일본을 지칭한다. 따라서 ‘oriental medicine’이란 영어 표현은 일반적으로 ‘서양의학’과 대비되는 ‘동양의학’ 또는 ‘중국에서 발전된 의학’이란 의미로 인식되지, 중국의학 또는 일본의학 등과 구분되는 독자적 정체성을 지닌 ‘한의학(韓醫學)’이란 의미로는 인식될 가능성이 매우 희박하다.
또한 중국, 일본, 티베트의 전통의학들이 Chinese medicine, Gapmo medicine, Tibetan medicine과 같은 영문용어를 사용하여 각각의 정체성을 표명하고 있는 시점에서, 우리의 한의학(韓醫學)만이 일반적으로 한의학(韓醫學)을 지칭하지도 않는 oriental medicine이라는 영문명칭을 고집할 이유가 없다.
더욱이 oriental이란 단어는 서양 중심의 세계관을 반영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최근 들어서는 일부 명사들과 함께 쓰여 ‘불가해한(unfathomable)’, ‘종속적인(submissive)’, ‘신비주의적인(mysterious)’과 같은 비하적 또는 부정적 의미를 나타내기도 하기 때문에, 공식명칭에서 oriental이란 단어를 중립적인 Asian 또는 East Asian과 같은 단어들로 대체하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세계 최고 수준의 한의사 및 관련 법규 그리고 제도를 지니고 있는 현대 한의학(韓醫學)이 세계적으로 그 정체성을 확립하고 브랜드 가치를 높이기 위해서는 한의학(韓醫學)에 대한 적절한 영문용어를 선택하여 사용할 필요가 있겠다.
‘Oriental medicine’의 대안은
‘Oriental medicine’의 대안적 영문용어로 ‘Korean medicine, traditional Korean medicine, Korean traditional medicine, Han Medicine’ 등이 제시되고 있는데 이들 각각에 대한 의미론적 특성을 살펴보고 그러한 대안들 중 Korean medicine이 한의학(韓醫學)에 대한 가장 적절한 영문용어임 밝히고자 한다.
한국의 의학전통에 기반한 의학이란 의미로는 Korean medicine보다는 traditional Korean medicine이 기술(記述)적으로 좀더 정확하고 따라서 영어 사용자들에게 좀더 정확한 의미를 전달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Indian medicine이나 Chinese medicine 등에서 볼 수 있듯이 medicine에 국가명 등의 수식어와 함께 사용되면 이는 그러한 국가나 민족의 전통적인 의학을 의미하는 것으로 통용되고 있기 때문에 traditional이란 말은 잉여적 특성을 띄고 있다.
따라서 Korean medicine이 traditional Korean medicine이란 의미로 사용될 수 있기 때문에 공식명칭에서는 간편한 Korean medicine을 사용하는 것이 좋을 듯 하다. 다만 문맥 속에서는 필요에 따라 traditional Korean medicine이라고 해도 무방할 듯 하다(실제로 Chinese medicine과 traditional Chinese medicine이 둘 다 통용되고 있는데 공식명칭에서는 Chinese medicine이 더 많이 사용되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앞으로 한의학이 독자적 정체성을 지닌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의학으로 발전해 갈 것이라는 미래지향적 시각에서 본다면 ‘전통적 한의학’이란 뉘앙스를 지닌 traditional Korean medicine보다는 Korean medicine이 더 적절하다고 생각된다(굳이 traditional이란 수식어를 병기하고자 할 경우, 약간의 뉘앙스의 차이는 있지만 traditional Korean medicine과 Korean traditional medicine이 둘 다 허용될 수 있으나 전자가 후자보다 더 일반적로 사용되고 영어 원어민 화자에게 문의한 결과 traditional Korean medicine이 약간 더 자연스럽다고 하기 때문에 Korean traditional medicine보다는 traditional Korean medicine 형태로 사용하는 것이 좋을 듯 하다).
Han medicine의 경우 한의학(韓醫學)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될 수 있겠으나 그러한 의미로 정착되어 일반적으로 통용되기 전까지는 영어 사용자들이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기 어렵다. Korean medicine 또는 traditional Korean medicine의 경우 적어도 한국과 관련된 의학이라는 것까지는 추정할 수 있으나 Han medicine의 경우 Han이 한국과 관련된 것이라는 것을 인식시키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또한 영어 단어 Han은 중국의 한(漢) 나라를 지칭하고 있기 때문에 Han medicine의 경우 Chinese medicine의 이칭으로 인식될 수 있어 한의학(韓醫學)의 의미로 인식시키기가 더욱 어려울 듯 하다. 따라서 한의학(韓醫學)의 영문용어로는 Korean medicine이 가장 적절한 것으로 판단된다.
한의학 관련 용어 정립 뒷따라야
한의학 관련 용어들의 영문용어는 ‘한의학’의 영문용어가 무엇으로 결정되느냐에 따라 영어 표현의 자연스러움이나 약어 등을 고려하여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는 ‘한의학’에 대한 영문용어로 ‘Korean medicine’을 상정하고 한의학 관련 용어들에 대한 영문용어를 제안하고자 한다.
첫째, ‘한의사’의 경우 박종배 교수(1999)가 ‘Korean medicine doctor’라고 하고 있는데 그 자체가 매우 어색한 영어 표현이기 때문에 부적절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medical doctor에 유추하여 Korean medical doctor를 생각해 볼 수 있는데 이는 ‘한의사’란 의미보다 ‘한국인 의사’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질 가능성이 매우 높다. 따라서 doctor of Korean medicine이라는 용어가 가장 적절할 듯 하다.
그리고 직함으로서의 Doctor of Korean Medicine의 경우 약어로는 KMD와 DKM 둘 다 허용되지만 KMD가 더 적절할 듯 하다. 그리고 한의학 철학박사의 경우는 Doctor of Philosophy in Korean Medicine(Ph.D. in Korean Medicine)이 적절하다고 판단된다.
둘째, ‘한의대’는 ‘College of Korean Medicine’으로 그리고 ‘한의학과’는 ‘Department of Korean Medicine’ 또는 ‘Korean Medicine Department’ 둘 다 사용될 수 있다.
셋째, ‘대한한의사협회’는 ‘Korean Association of Korean Medicine(KAKM)’으로 하는 것이 적절할 듯 하다. 이러한 패턴은 가칭 ‘국제한의사협회’나 ‘미국한의사협회’ 등에 대한 ‘International Association of Korean Medicine(IAKM)’이나 ‘American Association of Korean Medicine(AAKM)’ 등의 영문 명칭을 만드는데 유용하게 활용될 수 있을 것이다.
넷째, ‘한방병원’은 ‘Korean medicine hospital’로 ‘한의원’은 ‘Korean medicine clinic’으로 그리고 ‘한약’은 ‘Korean herbal medicine’으로 하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일부 한의원들이 영문명칭을 ‘Oriental medical clinic’으로 하고 있는데 영어 원어민 교수에게 물어보니 매우 어색하다고 함).
기존에 사용되던 용어를 변경하여 새로운 용어를 사용하는 데는 관련 분야의 기관·단체·구성원들의 적극적인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특히 영향력이 큰 기관이나 단체 또는 구성원들의 적극적인 노력이 요구된다.
예를 들어, 미술 분야에서 ‘동양화’를 ‘한국화’라고 공식적으로 개칭을 하고도 서울대나 홍익대 등 미술 분야에서 영향력이 큰 기관들이 여전히 학과명칭으로 ‘동양화과’를 계속 사용하고 있는데 그 파장은 크리라 생각되며 이는 한의학 분야에서 반면교사가 될 수 있다.
한의학이 독자적 정체성을 지닌 세계속의 선도적 의학으로 자리매김하기 위해서는 한의학 분야에서 영향력이 큰 기관이나 단체 또는 구성원들이 앞장서서 적극적으로 새로운 영문용어를 수용하여 사용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