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의사의 의료기기 사용 특별기고 - 下
한의사의 의료기기 사용, 임상 현장에서 국민에게 최선의 의료서비스 제공
의료기기 사용 통해 정량화된 증거 확보, 한의학 새롭게 빠르게 외연 확장될 것
이렇듯 의료기기 사용은 분명 한의학과 한의사에 날개를 달아줄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큰 힘에는 책임이 따르듯 우리 한의사들도 이러한 변화 속에서 다양한 준비를 통해 책임에 합당한 철저한 준비와 함께 기존에 해왔던 것을 좀더 강화시킬 필요가 있을 것이다. 앞으로 한의사와 한의계가 해야할 일들에 대해 조심스럽게, 그리고 진심으로 제안해 보고자 한다.
①의료기기 연구·교육·임상 강화 및 주체에 관한 명시적 확인
2년 전 의사협회의 결정사항으로, 전국 한의과대학의 (속칭)양방과목을 담당했던 의대 교수들이 더 이상 출강을 하지 않겠다는 통보를 한 적이 있었다. 당시 양방과목으로 알려져 있는 기초의생명 과목들의 대부분은 이미 한의대 교수들에 의해 자체적으로 운영되고 있어 실질적인 대책을 마련해야 할 과목은 ‘영상의학’과 ‘진단검사의학(임상병리학)’ 정도였고, 이후 각 대학들은 각자의 재량 하에 해당 과목들을 운영하면서 지속적으로 질적 향상을 도모해 왔다. 교육이 정치논리에 희생된 것은 안타깝지만, 이 사건을 통해 한의대 자체적으로도 이 과목을 운영할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계기가 됐다. 실제 경희대의 경우에는 진단생기능의학교실에서 진단검사의학을 담당, 한의대 내부 자체 교육 범주로 이를 가져와 운영하고 있다.
이처럼 이번 경우 역시 한의사에게 허용될 의료기기가 어디까지인지는 발표가 돼봐야 알 수 있겠지만, 분명히 전환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한의사가 일선에서 의료기기를 사용하는데 있어 학문적·교육적 지원을 충분히 하기 위해서는 해당 과목의 연구·교육·임상 강화와 함께 그 주체와 전문가에 대한 명시적인 확인이 반드시 필요하다. 이와 함께 의료기기 사용권을 정상화하는 것에서 멈추지 말고, 앞으로도 교육과 학술의 체계, 그리고 나아가 임상과의 연계성도 재정비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
②의료기기 사용 목적에 관한 분명한 자세
인간의 인식은 취약하기 때문에 목적과 수단이 혼동되는 경우가 많다. 한의사로서 어떠한 목적으로 이 검사를 시행하는지를 확고히 한 뒤 의료기기를 사용하고 검사를 시행해야 하며, 그러한 원칙 아래 환자에게 설명을 하고 제안 및 조언을 해야 한다. 이는 앞서 언급한 임상적 당위성과 맥을 같이 하는 부분으로, 이렇게 해야만 환자 친화적인 한의학의 특성을 잃지 않으면서도 한의학에 대한 신뢰와 이미지를 긍정적으로 쌓아나갈 수 있을 것이다.
③한국의 이원화된 의료체계 대한 정확한 인지 필요
그동안 한의사들은 환자를 정확하게 측정할 수단이 박탈당해 더 나은 의료를 제공하는 것이 원천적으로 봉쇄당했다. 이러한 환경 속에 일부 한의사들은 개인의 능력과 한의학의 능력을 상회하는 질병 상태가 분명히 존재함에도 이를 인정하지 않고 무리한 치료를 시도해 사회문제가 된 적도 분명히 존재한다. 물론 일부이지만 더 이상 이러한 일들이 발생해서는 안된다.
우리 한의사에게 허용된 도구를 충분히 활용해 그 안에서 합리적·전문적인 결정을 내리고, 필요한 경우에는 상급의료기관 또는 양방의사의 도움을 반드시 받아야 함을 알고 있고, 도움을 청해야 한다. 이것이 이원화된 의료체계 안에서 상호간 시너지를 일으킬 수 있는 길이고, 한의학이 현재 의료체계에서 가치를 지켜나갈 수 있는 일이며, 무엇보다도 국민의 건강을 지키는 일임을 명심해야 한다.
④사이비 창궐을 제재하는 자체 자정능력 갖춰야
한의사의 의료기기 사용에 있어 가장 우려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사이비(비과학)의 창궐이다. 즉 물리적·한의학적으로 틀렸음에도 불구하고 혈액 한 방울로 기혈 혹은 인체의 파동을 측정하겠다거나, 혹은 소변검사를 통해 체질을 판단하겠다 등의 사이비들이 등장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또한 일부 몰지각한 사람들은 전문가의 양심을 버리고 경제적 이득만을 취하기 위해 기상천외한 사적 강의들이 범람할 것 역시 우려스러운 부분이다.
특히 휴리스틱을 이용한 주관적 판단 단계를 거칠 수밖에 없는 진단·변증 행위와는 달리, 의료기기를 이용한 측정 그 자체는 변하지 않는 증거가 남기 때문에 이러한 비과학의 유행은 빠른 시간 안에 한의계에 독이 되어 돌아올 것이라는 분명하게 인지해야 한다. 따라서 이러한 과학의 영역을 악용해 한의사의 열정에 기생하는 사이비를 자체적으로 정화할 수 있는 능력과 의지, 그리고 대책 마련은 반드시 필요할 것이다.
⑤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는 말 명심해야
의료기기를 이용한 객관적 측정은 ‘숫자의 신뢰성과 설득력’이라는 큰 힘을 얻게 될 것이며, 한의사는 이를 통해 이를 통해 진단과 판단의 정밀성을 높이고, 의료소비자의 신뢰를 획득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한의의료행위의 가치를 높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큰 힘에는 반드시 큰 책임 따르는 법이다. 의료기기 사용이라는 권리가 부여됨과 동시에 한의사들에게는 해석과 판독의 책임, 합리적 설명과 설득의 책임, 치료 목표로 삼은 지표의 개선 책임 등 무한책임이 동시에 주어지게 된다.
숫자는 매우 강력하면서도 위험한 도구이기 때문에 물리량을 합법적으로 측정하고 치료의 대상으로 삼는 순간부터 한의사들은 그 물리량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즉 당뇨 치료시에는 혈당 수치에 대한 책임을, 고지혈증 치료시에는 지질 농도에 대한 책임을, 부정맥·협심증을 치료하는 경우에는 심전도와 심장효소수치에 관한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이다. 이제 더 이상은 전신 상태가 호전되었다는 모호한 말로는 변호할 수 없다는 얘기다.
앞으로 한의사의 의료기기 사용은 한의학과 한의사를 곤란하게 만들 수 있는 가능성은 더 많아질 것인 만큼 복잡한 인체에 대해 우리 한의사들은 더욱 세밀하게 보수적으로 그리고 조심스럽게 다가야 한다.
⑥진단생기능의학 전문의 등 전문인력 양성 시급
앞에서 제기했던 우려에 대한 해법은 아마도 전문인력 양성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양의계의 경우에는 수련 없이 일반의로서 영상을 보고, 혈액검사를 해석하며, 초음파를 시행할 수 있음은 당연한 일이지만, 양방의학 체계에는 전문의로 대표되는 그 분야의 전문가가 존재한다. 전문가들이 검사에 대해 모두 책임질 수도, 또 책임질 필요도 없겠지만, 최종적 위치에 전문가 집단이 존재한다는 것은 분명 든든한 일이며, 학술적인 부분에 있어서도 학문의 발전과 외연 확장을 위해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한의계에는 임상 각과의 전문가 입장인 전문의들은 있지만, 한의학에서 의료기기 및 진단을 다루는 한의진단학과 생기능의학에 대해서는 교육과 연구, 임상과 감독의 책임을 가지는 전문의가 없다. 또한 경희대학교만 한방병원에 진단생기능의학과가 설치돼 의료기기와 진단에 관련한 분야를 연구하고 교육하고 있지만, 독립된 전문과목이 아니어서 대외적으로 국민정서를 획득하거나 양의계와의 구조적 동등성에 대한 한계가 있어 매우 안타까운 현실이다.
앞으로 다가올 양의학계와의 각종 갈등과 크고 작은 싸움은 나중에 생각하더라도, 한의학의 임상적 저변 확장과 교육체계의 개선을 위해서 이 부분은 반드시 해결돼야 할 문제다. 이번 의료기기를 둘러싼 한·양의학계의 논란에서도 볼 수 있듯이 법령을 정하고 행정을 행하는 이들이 중요하게 생각하고, 명분을 세우는 것은 의사나 한의사의 의견이 아닌 바로 국민의 의견이다.
따라서 최선의 의료를 원하는 국민의 정서에 부합하고, 명문화 되어 집행되는 법의 정서를 모두 아우를 수 있는 책임 있는 진단생기능의학 전문의 양성은 하루 빨리 해결돼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한의사의 의료기기 사용은 한의약 재도약 계기
한의사의 자유로운 의료기기 사용은 임상 현장에서 국민들에게 최선의 의료서비스를 제공한다는 측면 외에도 한의학 연구에도 엄청난 변화의 바람을 일으킬 것으로 예상된다. 실제 의료기기가 자유롭게 활용되고 있는 중국이나 일본의 경우에는 이를 바탕으로 한 전통의학의 증상·증후·변증 개념과 의료기기를 활용한 측정치 및 질병과의 상관성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으며, 출판된 논문 역시 셀 수 없이 많다. 또한 빅데이터와 데이터 사이언스로 대표되는 현대 의료정보의 헤게모니 이동을 살펴보았을 때도 의료기기 사용을 통해 정량화된 증거를 확보해 나간다면 한의학이 새롭게, 그리고 매우 빠른 속도로 외연을 확장해 실생활에 적용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와 함께 한의학계 내에서도 데이터와 사실에 기반한 선택과 집중을 통해 연구와 교육 부분에 있어 자원 분배의 효율을 증대시키는 것은 물론 한의학의 우수성을 증명하고자 하는 외국학자들과의 소통을 통해 방법론과 기저 철학이 구축될 수 있을 것이다.
과학의 기반이 되는 사유와 인식의 철학은 숫자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철학에서 출발해 구체화되어 인류에 공헌하는 과학의 면모를 갖추기 위해서는 숫자가 반드시 필요하다. 그것이 바로 숫자의 힘이며, 정량화의 힘이다. 앞으로 한의사의 의료기기 사용에 대한 정상화를 통해, 임상에서의 한의치료와 학문으로서의 한의학이 국민건강 속으로, 세계 속으로 스며들고 뻗어나갈 수 있는 재도약의 기회가 다시 오기를 진심으로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