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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터와 전통의 만남…지속가능한 의료 혁신”오현민 대한한의사협회 기획이사 대한민국은 지금 건강보험 재정 고갈, 필수의료 공백, 고령화로 인한 만성질환 폭증이라는 삼중고 앞에 서 있다. 이는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선진국들도 의료비 급증과 인력 부족에 직면했지만 대응 방식은 다르다. 해외는 이미 ‘더 적은 비용으로 더 많은 국민을 효과적으로’ 치료하기 위한 전략적 전환을 실행하고 있다. 전통의학, 정밀의학, 디지털 트윈, 로봇 재활, 지역사회 돌봄 등 접근은 달라도, 공통된 목표는 저비용·고효율 모델을 국가 정책과 산업 전략의 중심에 두는 것이다. ◎ 대만: 전통의학을 전략 자원으로 코로나19 팬데믹 당시 대만은 백신과 고가 치료제 대신 전통의학 기반 치료제 ‘청관1호’를 병행 투여해 백신 비용의 10분의 1 수준으로도 임상 효과를 거두었다. 이는 곧 의료비 절감으로 이어졌다. 또한 파인애플에서 추출한 단백질 분해 효소 ‘브로멜라인’을 현대 과학과 접목해 의약품·건강식품·화장품 산업으로 확장했다. 2023년 약 9억 달러 규모였던 시장은 2033년까지 연평균 5.2% 성장할 전망이다. 이 사례들은 전통의학이 단순한 문화유산이 아니라 재정과 산업을 동시에 살리는 전략 자원임을 보여준다. 우리 역시 풍부한 자원과 임상 경험을 갖고 있지만 제도적 뒷받침 부족으로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 ◎ 미국·유럽: 데이터 기반 정밀의학 미국은 GDP 대비 의료비 지출 1위 국가이고, 유럽도 고령화로 재정 압박이 크다. 이들의 해법은 ‘데이터 기반 선택과 집중’이다. 미국 국립보건원은 ‘All of Us’ 프로젝트로 100만 명 이상의 유전체·임상 데이터를 수집해 맞춤형 치료를 설계한다. 유럽연합은 ‘European Health Data Space’를 구축해 의료 데이터를 통합, 디지털 트윈으로 가상 환자 모델을 활용한다. 불필요한 검사·치료를 줄이고 꼭 필요한 자원에 집중하는 방식이다. 한국은 전통의학과 디지털 헬스를 모두 활용할 수 있는 강점이 있으나, 제도적 지원 부족으로 양쪽을 놓칠 위험이 있다. ◎ 일본: 로봇 재활과 지역사회 돌봄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고령화가 진행된 일본은 병원 중심 체계만으로는 늘어나는 돌봄·재활 수요를 감당할 수 없었다. 이에 의료의 중심을 지역사회로 옮기고 로봇을 적극 도입했다. HAL 외골격 로봇은 뇌졸중 환자의 보행 훈련과 노인 재활에 활용되어 장기 입원과 간병 비용을 줄였다. 또한 로봇 스마트홈 프로젝트로 고령자가 가정에서 안전하게 생활할 수 있도록 AI·IoT·로봇 장비를 결합했다. 일본의 사례는 초고령화 사회에서 ‘기술과 돌봄의 결합’이 비용 절감의 핵심임을 보여준다. ◎ 중국: 전통의학의 디지털 전환 중국은 전통의학을 국가 전략 자원으로 삼았다. 맥진은 압력센서와 AI로, 설진은 영상분석으로 표준화했고, 체질 분석은 유전체 데이터와 통합했다. 레이저 치료도 경혈 연구와 접목해 대규모 임상으로 확장했다. 실제 조사에서 국민 60% 이상이 AI 결합 전통의학을 선호한다고 답했으며, 이는 디지털 전환이 국민적 수요에 기반함을 보여준다. 중국은 전통의학을 저비용 자원에서 대규모·표준화·효율화된 국가 전략으로 승격시키고 있다. ◎ “데이터와 전통의 만남, 지속가능한 의료의 해법” 우리나라가 추진해야 할 개혁 과제는 다음과 같이 분명하다. ① ‘국립대병원 설치법’ 개정으로 한의과 의무화 ② 국립중앙의료원 한방진료부 확대 통한 다학제 협진 ③보훈의료 개편 시 한의학 진료 포함 ④ 첨단재생의료법 디지털화 시 전통의학 데이터 포함 건강보험 총 진료비(2022년 약 100조 원) 중 한의학 지출은 2%에 불과하지만 불면증·난임·만성통증 등 서양의학이 해결하기 어려운 환자군을 감당하고 있다. 예컨대 수면다원검사, IVF, 투석 등 고비용 치료와 비교하면 한의학은 훨씬 낮은 비용으로 환자를 돌본다. 세계는 전통의학, 디지털, 재생의학, 로봇을 결합해 비용 효율성을 극대화하고 있다. 한국도 직역 갈등을 넘어 국민 중심, 데이터 중심의 개혁으로 나아가야 한다. 한의학은 저비용·고효율 치료 자원이자 첨단의료와 결합 가능한 핵심 축이다. 이제 우리나라는 한의학을 국민 건강과 국가 재정의 전략으로 자리매김해야 한다. -
강명자 원장 “한의학은 내게 주어진 하늘의 소명”<편집자주> 지난 1995년 3월 첫 발을 내딛은 꽃마을한의원의 명경의료재단이 올해로 창립 30주년을 맞았다. 여성 1호 한의학 박사이자 ‘서초동 삼신할미’라는 별명을 얻은 강명자 원장은 지난 30년간 수많은 환자들에게 희망을 선사하며, 한의학의 무궁한 가능성을 확장해 왔다. 이에 본란에서는 강 원장이 걸어온 발자취를 따라가 봤다. 강명자 원장(77)은 1985년 경희대 대학원에서 한의학박사를 취득한 국내 여성 1호 한의학 박사다. 꽃마을한의원과 꽃마을한방병원을 운영하면서 난임과 불임치료 분야에서 큰 명성을 얻어 ‘서초동 삼신할미’로 불리기도 했다. 당시 불임(난임)치료 성공률이 40% 수준으로 많은 임신 성공 사례를 쌓았다. 현재는 부인과 진료뿐 아닌 건강검진센터, 치과 등으로 확대 운영하면서 진료 분야의 다양성과 전문성을 제고시키고 있다. 특히 진료 활동 이외에도 대한약침학회장. 한방부인과학회장, 대한여한의사회장 등을 역임하면서 늘 한의학의 발전과 한의계 의권 신장의 중추 역할을 마다하지 않았다. Q. 재단 30주년을 맞는 소회는? : 재단 설립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30년이 지났다. 난임 연구, 의료관광, 의료봉사, 건강 강좌를 비롯 다산철학 학술대회 지원을 통해 세계적인 석학들을 모시는 등 한의원만 운영했다면 할 수 없었던 많은 것들을 직접 실행할 수 있었다. 그런 성과들이 우리 사회에 도움을 줬다는 점이 큰 보람이었고, 많은 직원들과 함께 생활하는 것 자체가 즐겁고 행복했던 날들이었다. Q. ‘서초동 삼신할미’로 불리게 된 계기는? : 당시만 해도 난임 연구와 치료에 뛰어들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같은 여성으로써 난임과 불임으로 고통 받고 있는 환자들을 외면할 수 없었다. 이후 난임 치료 성과로 많은 부부들에게 새 생명을 안겨주었다. 임신 소식을 전한 환자분이 ‘삼신할미가 따로 있나요? 원장님이 바로 삼신할미죠’라고 하셨다. 서초동에서 개업을 하고 있으니 자연스레 ‘서초동 삼신할미’가 된 거다. 수많은 가족의 웃음을 지켜보는 게 삶의 큰 기쁨이었다. Q. 30년간 쉽지 않은 일도 많았을 것 같다. : 세상만사는 음양의 파도를 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지금이 힘든 음(陰)의 시기라도 반드시 양(陽)의 기운이 일어나 밝은 내일이 온다고 믿으며 버텼다. 이 믿음이 수많은 어려움을 넘어설 수 있게 해주었다. Q. 지난 삶에서 변명하고 싶은 것은? : 한평생 의료에 몰두하다 보니 가족에게 충분히 정을 나누지 못한 것이 늘 마음에 남는다. 딸들에게 엄마로서 따뜻한 시간을 주지 못했고, 남편에게도 많은 관심을 쓰지 못했다. 모든 가정사는 시어머니께 맡기고 내 길만 달려온 것 같다. 하지만 직접 표현하지 못했을 뿐, 남편과 딸들을 누구보다 사랑한다. 이 말을 꼭 전하고 싶다. Q. 가장 큰 후회와 최고 행복했던 순간은? : 살아오면서 모든 것이 내 노력만으로 된 줄 알았는데, 보이지 않는 힘, 곧 신의 손길이 늘 함께하고 있었다. 그 깨달음이 부족했다는 것을 뒤늦게야 알게 돼 요즘은 신앙생활에 더 마음을 기울이고 있다. 최고 행복했던 순간은 나의 삶이 MBC-TV ‘성공시대’에서 방영돼 널리 알려졌다. 그때 너무 많은 사람들이 알아보니 세상이 모두 바뀌어 보였다. 그때 참 행복했다. Q. 내게 한의학이란? : 한의학은 내게 주어진 하늘의 소명이라 생각한다. 평생 노력을 많이 했어도 아직도 부족함이 많다. 다시 태어나도 한의사가 되고 싶고, 그때는 모든 병을 정복하고 싶다. Q. 후학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은? : 한의학은 선조들의 지혜가 응축된 보물이자, 시대가 변해도 그 원리는 불변한다. 다만 현대인들에게 더 쉽게 다가가려면 과학적 언어로 풀어내야 한다. 한의학의 설명을 위해서는 양자물리학이 큰 도움을 줄 수 있다고 믿는다. 후학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은 하나다. 여러분들이 선택한 한의학은 진리에 가까운 학문이다. 잘 선택하셨다. 자부심을 갖고 열심히 연구해 인류의 건강에 이바지하시길 바란다. Q. 부군께서 재단 설립과 운영에 큰 역할을 했다. :명경의료재단 설립도, 검진센터 운영도 모두 남편 황경식 교수의 선견지명 덕분이었다. 서울대 철학교수로 사회정의를 전공한 남편이 비영리 의료재단을 세워 사회에도 공헌하고 한의학도 발전시킬 수 있으니 어떻겠느냐고 제안한 것이 첫 걸음이 돼 오늘날에 이르게 됐다. 그는 재단의 이사장직을 맡아 30년간 묵묵히 헌신했다. 늘 조용히 뒤에서 도와준 남편에게 이 자리를 빌려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Q. 앞으로의 계획은? : 그동안 임상과 연구에서 얻은 깨달음을 정리해 후배 한의사들과 나누고 싶다. 그것이 내게 주어진 마지막 사명이라 생각한다. -
醫史學으로 읽는 近現代 韓醫學 (552)김남일 교수 경희대 한의대 의사학교실 1977년 이종형 교수는 노정우 교수에게 미국으로 아래와 같은 편지를 보낸다. 이 편지는 노정우 교수의 따님 故노효신 선생과 사위 윤동원 선생이 2019년 경희대 한의대 의사학교실에 기증한 자료 안에 포함돼 있다. “보내주신 惠書 반가히 읽었습니다. 新年元旦에 연하장도 못 올린 터에 이렇게 회포 넘치는 친서를 받고 보니 죄송하기 그지 없습니다. 3월 초부터 Medical Center를 개원하신다 하드니 바야흐로 東醫學의 隆興이 蛙布에서 이루어질 바탕이 될 것으로 믿고 멀리서 深甚한 慶賀를 올리는 바입니다. 개원 초에는 다소 어려운 점들도 많으시겠지만 이것이 동의학의 세계화의 한 前哨基地라 생각하시고 奮鬪精進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국내와도 긴밀한 유대를 하시여 학술적으로도 서로 교환연구를 해나가는 길이 트이기를 바라겠습니다. 恩師께서 그동안 지도해주신 高大刊 現代科學技術史는 금년 초에 출간되여 一部를 받아 보았습니다. 우리 학계에서도 못하는 일을 한 교육기관에서 성취한 것도 대견하거니와 은사께서 적극 노력하시여 그 속에 당당히 우리 학문도 한 자리를 차지하였으니 우리 학계의 광영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다만 菲才, 淺短한 執筆로서 부족한 면이 너무 많은 점 悚懼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앞으로 자료들을 더욱 수집하여 완벽한 史實이 되도록 보완해 나가겠습니다. 우리 科學技術史 1卷을 구하여 보내오니 笑覽하시고 未洽한 点 지적하여 주시기 바라오며 앞으로 종종 서신을 올리기로 하고 이만 적습니다. 健勝하시를 빌며. 3. 1. 李鍾馨 올림.” 李鍾馨 교수(1929〜2008)은 황해도 평산에서 태어난 후 한의학 연구의 뜻을 품고 1949년 晴崗 金永勳 선생(1882∼1974)의 문하생으로서 경희대 한의대를 졸업하고 한의사국가고시를 수석합격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종형 교수는 경희대 한방병원교수를 역임했고, 1975년 대한한방내과학회가 창립되었을 때 초대 회장으로 피선되었다. 盧正祐 교수(1918〜2008)는 황해도 松禾郡 豊川 출신으로 金永勳, 趙憲泳의 門下生으로서 한의학을 연구하여 한의계를 학술적으로 이끌어준 인물이다. 그는 동양의약대학 부교수, 경희대 한의대 교수, 경희대 부속한방병원 원장 등을 역임하면서 수많은 학문적 업적을 쌓아갔다. 이종형 교수의 편지는 노정우 교수가 미국 하와이에 이주한 이후 미국으로 보낸 것이다. 노정우 교수의 국외 경력에 따르면 그는 1976년 5월 미국 하와이 주정부의 초청으로 도미하여 같은 해 11월에 전문 특기자로 인정돼 미국 영주권을 취득하였고, 1977년 6월 하와이 주정부 침구사 면허 취득, 1978년 8월에는 하와이주 호누룰루 시에 Oriental Medical Clinic을 개설하여 진료를 시작한 것으로 되어 있다. 1968년 노정우 교수는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에서 출간된 『韓國文化史大系 科學技術史編』에 ‘韓國醫學史’라는 제목의 장문의 논문을 써서 한국 한의학의 역사를 정리한 바가 있었다. 이종형 교수는 1977년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에서 간행한 『한국현대문화사대계』에는 ‘韓國東醫學史’라는 제목의 논문을 써서 한국 근현대 한의학의 역사를 정리했다. 위의 이종형 교수의 편지에서 이종형 교수는 자신의 ‘韓國東醫學史’라는 제목의 연구는 1968년 노정우 교수가 작성한 ‘韓國醫學史’의 계승적 작품이라는 것을 선언한 것이다. 이 편지는 이러한 한국 한의학의 역사 연구의 미래를 열어주기 위한 노력들이 앞으로 계속 이어지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을 담고 있는 것이다. -
과학으로 보는 한약 이야기 ❽김호철 교수 경희대 한의과대학 본초학교실 [편집자주] 본란에서는 김호철 교수(경희대 한의대 본초학교실)의 ‘과학으로 보는 한약 이야기’를 통해 임상 현장에서 자주 제기되는 한약의 궁금증과 문제들을 하나씩 짚어가며, 최신 연구 결과와 한의학적 해석을 결합해 쉽게 설명할 계획이다. 이 과정에서 독자들이 기존의 한약 지식을 새롭게 바라보고, 실제 진료 현장에서 유용하게 활용할 만한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최근 한 후배 한의사가 내게 물었다. “세포나 동물실험에서 약리작용이 확인되면, 환자에게도 효과가 있을까요?” 단순한 질문 같지만, 실제 임상에서 환자를 마주하는 한의사라면 누구나 고민해 봤을 문제다. 이 물음에 대한 답은 예스도, 노도 아니다. 약리작용은 임상효과의 보장이 아니지만, 무의미한 것도 아니다. 어떤 약리작용은 임상에서 상당히 높은 개연성으로 재현될 수 있고, 어떤 것은 실험실 안에서만 의미를 가진다. 결국 임상의가 약리학적 원리, 성분의 특성, 체내 대사 과정, 그리고 동물모델의 속성을 얼마나 이해하고 있느냐에 따라, 임상 근거가 부족하더라도 효과를 추측할 수 있는 힘이 생긴다. 특히 아직 임상시험이 풍부하지 않은 한약 분야에서 이러한 지식은 과학적 한의학을 실천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토대다. 세포실험, 가능성을 보여주는 첫 단계 세포실험은 약리연구의 가장 앞단에 놓여 있다. 특정 성분을 세포에 처리했을 때 염증 매개물질이 줄거나 산화 스트레스가 완화되는 결과는 손쉽게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이런 결과가 곧 임상효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가장 큰 이유는 농도의 벽이다. 세포실험에서 사용되는 농도는 인체 내에서 결코 도달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플라보노이드, 사포닌과 같은 성분은 위장관 흡수율이 낮고 간에서 빠르게 대사되기 때문에, 시험관 속 세포에 적용된 수준의 농도를 환자에게서 유지하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또한 세포는 단순한 환경에서 특정 반응만을 보여줄 뿐, 면역·내분비·신경계가 서로 얽혀 있는 복잡한 인체의 생리학적 맥락을 반영하지 못한다. 세포에서 항산화 효과가 뚜렷했다 하더라도, 그것이 곧 노화 억제나 만성질환 개선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점은 이미 많은 임상시험에서 증명됐다. 따라서 세포실험은 기전의 가능성을 제시하는 신호일 수는 있으나, 임상효과를 보장하는 증거는 될 수 없다. 동물실험, 모델을 이해해야 하는 이유 세포실험보다 임상과 한 걸음 더 가까운 것은 동물실험이다. 그러나 동물실험 역시 결과 자체보다 어떤 모델을 사용했는지를 살펴야 한다. 모델의 타당성이 곧 임상으로 이어질 개연성을 좌우하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예가 고혈압 연구다. SHR(Spontaneously Hypertensive Rat)은 자연적으로 혈압이 상승하는 특성을 지니며, 병태가 사람의 본태성 고혈압과 매우 유사하다. 이 모델에서 혈압 강하 효과를 보인 약물은 실제 임상에서도 효과를 낼 확률이 높다. 실제로 수많은 항고혈압제가 SHR 모델을 거쳐 개발됐다. 반대로 치매 연구는 상황이 다르다. 알츠하이머 마우스 모델은 아밀로이드 단백의 축적은 재현할 수 있으나, 사람의 인지 저하와 같은 복잡한 병태는 반영하지 못한다. 이 때문에 동물실험에서 수없이 성공한 후보 물질들이 임상시험에서는 번번이 실패했다. 중풍 연구에서 쓰이는 중대뇌동맥폐쇄(MCAO) 모델도 마찬가지다. 혈관을 기계적으로 막아 뇌경색을 유발하는 방식은 일정 부분 사람의 뇌졸중을 재현하지만, 손상을 지나치게 균일하고 과격하게 일으킨다. 동물에서 뚜렷한 효과가 나타나더라도, 임상에서는 기대보다 훨씬 적게 재현될 수 있다. 대사질환 연구에서는 고지방식이를 먹인 쥐 모델이 흔히 쓰인다. 이 모델은 쉽게 비만해지고 인슐린 저항성이 생기지만, 사람의 당뇨병처럼 유전적 요인, 환경, 생활습관이 얽힌 복합적인 병태를 그대로 반영하지는 못한다. 종양 연구에서 널리 쓰이는 이식종양 모델도 비슷하다. 암세포를 동물에 주입해 단기간에 성장시키는 방식은, 수년에 걸쳐 면역과 미세환경이 변하며 발전하는 사람의 암을 충실히 재현하지 못한다. 이 때문에 동물에서 효과가 있어도 항암제의 임상 성공률은 극히 낮다. 결국 동물실험은 “효과가 있었는가”보다 “이 모델이 사람의 질환을 얼마나 닮았는가”를 따져야 의미가 있다. 임상의가 동물실험 결과를 읽을 때 가장 먼저 던져야 할 질문은 바로 이것이다. 약동학, 임상효과의 문턱 좋은 모델에서 효과가 확인되었더라도, 그것이 사람에게 그대로 재현되는 것은 아니다. 약물이 체내에서 흡수되고, 간에서 대사되며, 혈액 속에서 일정 농도로 유지되는 전 과정을 거쳐야 하기 때문이다. 동물에서는 혈중 농도가 잘 유지되지만, 사람에서는 간 대사가 지나치게 빨라 효과가 사라지는 경우가 많다. 어떤 경우에는 대사를 거쳐 오히려 더 강력한 활성 대사체로 전환되기도 한다. 약동학적 차이는 약리작용의 임상 전이를 결정하는 중요한 변수다. 특히 한약재 성분은 함량이 낮고 흡수율도 제한적이어서, 세포와 동물에서 관찰된 효과가 임상으로 이어지기 어렵다. 그러나 모든 경우가 그런 것은 아니다. 위점막에 직접 작용하는 성분은 혈중 농도가 낮더라도 국소적으로 충분히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 작약이나 선복화 추출물이 위염 모델에서 소량으로도 효과를 보이는 것이 좋은 예다. 따라서 임상가는 약리작용을 해석할 때 반드시 이 약물이 전신 농도를 필요로 하는지, 아니면 국소 작용만으로 충분한지를 구별해야 한다. 한약 연구의 특수성 양약은 대개 단일 성분 기반으로 개발된다. 따라서 성분별 약리작용과 임상효과를 비교적 일대일로 연결할 수 있다. 반면 한약은 수십 가지 성분이 동시에 존재하는 복합제제다. 이 때문에 단일 성분 연구로 전체 제제의 효과를 설명하기는 어렵다. 성분 간 상호작용, 추출 조건, 제형 특성에 따라 결과가 크게 달라지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특정 플라보노이드가 세포에서 항염 작용을 보였다 하더라도, 실제 탕약에서는 다른 성분들과의 상호작용으로 전혀 다른 양상이 나타날 수 있다. 또한 단일 성분의 함량이 극히 낮아 실험실에서 본 효과가 임상에서 나타나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바로 이러한 복잡성 때문에, 임상가는 더욱 성분의 약리작용과 체내 대사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제형 전체의 작용을 읽어낼 수 있어야 한다. 한약의 과학적 근거는 단일 성분 연구에 국한되지 않고, 제형과 임상 경험이 결합될 때 비로소 살아난다. 우리가 알고 있어야 하는 것 약리작용은 임상효과의 확증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을 올바르게 이해한다면, 임상시험이 부족한 한약 분야에서도 임상효과를 합리적으로 추측할 수 있다. 고혈압처럼 충실한 모델이 존재하는 영역에서는 연구 결과를 적극적으로 참고할 수 있고, 치매나 종양처럼 모델이 취약한 영역에서는 훨씬 더 신중해야 한다. 위점막 보호처럼 국소 작용이 가능한 경우는 낮은 용량으로도 임상적 의미를 충분히 가질 수 있다. 따라서 임상의가 반드시 알고 있어야 할 것은 세 가지다. 세포실험과 동물실험이 각각 어떤 의미와 한계를 가지는지, 약물이 체내에서 어떤 흡수·대사 과정을 거치는지, 그리고 한약이라는 복합제제가 단일 성분 연구와 어떻게 다른지를 깊이 이해하는 것이다. 임상의는 단순히 연구 데이터를 소비하는 존재가 아니다. 실험실의 결과를 환자의 몸속에서 일어날 가능성으로 해석하고, 그 개연성을 바탕으로 임상 판단을 내리는 사람이다. 과학적 근거와 임상 경험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힘, 가능성과 한계를 동시에 읽어내는 눈이 바로 임상의의 무기다. 과학적 한의학은 지식의 소비가 아니라, 해석과 성찰 위에 선다. -
“이걸 내가 왜 알아야 하지?”김은혜 가천대 한의과대학 조교수 <선생님, 이제 그만 저 좀 포기해 주세요> 저자 [편집자주] 본란에서는 한의사로서의 직분 수행과 더불어 한의약의 선한 영향력을 넓히고자 꾸준히 저술 활동을 하고 있는 김은혜 교수의 글을 소개한다. 본과 학생들 강의를 준비하면서, 내가 졸업한 이후로 많은 것이 변했다는 생각이 든다. 졸업한 지 수십 년이 지난 것도 아닌데 표준적으로 권고되고 있는 교육의 질과 방향성이 꽤 바뀐 것 같다. 우선 제일 크게 체감되는 것은 단연 진단기기에 대한 관심도다. 내가 학교 다닐 때만해도 혈액검사에 대한 관심은 가질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내가 문제였겠지만…. 그나마 정식 강의가 있었던 엑스레이(방사선과) 수업에서는 재미를 느끼면서도 ‘내가 이걸 알아서 뭐하나. 어차피 쓰지도 못하는데. 이 시간에 변증시치(辨證施治) 공부를 더 해야 국가고시 성적 잘 나오는 거 아닌가.’라는 생각을 막을 순 없었다. 물론 당시 방사선과 강의의 성적은 잘 받았지만, 관심을 가져야 할 이유조차 못 느꼈던 과목이라 그런지 기말고사 시험장에서 문 열고 나오는 길에 모든 내용들이 머릿속에서 다 저절로 휘발되었다. 교과서 위주의 이론 강의만 진행한다면? 하지만 요즘은 어떠한가. 본과 첫 강의 때, POCT( point of care testing; 임상현장즉시검사)를 활용한 혈액검사가 한의사에게 수행 권한이 풀린 지 얼마 되지 않았던 터라, 정식 교육과정에서는 아직 반영되지 않았을 거라 생각하고 “혹시 혈액검사 결과 분석할 줄 알아요? 다른 교수님들이 강의 해주셨나요?”라고 학생들에게 물었더니 돌아오는 대답은 이것이었다. “후배들은 지금 배운다고 하는데 저희는 못 배우고 올라와서요, OOO(학생이름)이 공부해서 저희한테 스터디 해주고 있어요.”, “몇 명에서 공부하고 있는데요?”, “음, 한 10명?” 첫 강의를 앞두고 선배 교수님들로부터 들었던 팁 중 하나가 ‘전체 학생 중 10%만 수업에 집중해 줘도 끌고 나가기 충분하고, 30%가 집중해 주면 그건 대박 난 강의다’라는 웃픈 이야기였는데, 이미 30%를 웃도는 인원이 어떻게든 본인들끼리 모여서 공부하려는 모습에 얼마나 기특했는지 모른다. 본인들끼리 스터디를 한다는 학생들이 한 학기가 지난 지금은, 흡인성폐렴·기흉·심비대 흉부 엑스레이 사진을 보고 진단명을 턱턱 맞추고 있다. ‘각 질환에 한의사는 어떤 검사를 할 수 있는가?’라고 물으면, ‘CRP요! 산소포화도 측정! 심근표지자!’라고 대답까지 척척 하는 친구들을 보면 괜스레 감격에 젖곤 한다(추신: 한의사가 흉부 엑스레이 및 혈액검사를 통해 상기 질환을 추정하는 행위는, 추정진단 및 응급 상황 판단에 주목적이 있음). 뿐만 아니라 교육과정 자체도 많은 시행착오를 거쳤던 것 같다. 개인적으로 교수의 입장에서 크게 느껴지는 건 CPX(clinical performance examination; 간략하게 풀이하자면, 환자-의사 역할극)과 OSCE(objective structured clinical examination; 간략하게 풀이하자면 술기 능력 평가)이다. 교과서 위주의 이론 강의만 진행하게 되면, 강의라는 지식 전달 체계 특성 상 질환명 중심의 수업이 될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만성피로증후군 환자가 비기허(脾氣虛)로 변증되면 육군자탕 처방’과 같은 흐름이다. 의료인 양성에 걸맞은 대학교육의 변화 하지만 막상 임상에 나오게 되면 환자는 “안녕하세요. 저는 만성피로증후군 환자입니다.”하고 오지 않는다. “요즘 너무 피곤해요. 왜 이런 걸까요?”라고 말하며, 질환 명을 말하는 것이 아닌 증상을 말하며 걸어 들어온다. 또한 수년 전까지만 해도 피로(증상)를 말하며 한의의료기관을 찾아온 환자는 “피곤해요. 보약 좀 주세요.”라며 ‘치료’를 물었겠지만, 요즘 환자들은 “왜 이러는 걸까요?”라고 물으며 ‘원인’을 묻고 의사 본인이 말한 원인에 적합한 치료를 전문적으로 끌고 가주길 원한다. 개인적으로 그들이 묻는 원인이 “당신 피로의 원인은 비기허입니다.”라는 대답을 바라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더군다나 한 예로 만약 그 환자의 기저질환에 당뇨가 있는데 최근에 혈당 조절이 안 되고 있어 식후 혈당 수치가 450 가까이 나오고 있는 상황이라면, 그것에 ‘비기허’라는 원인을 씌울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혹은 만약 그 환자의 혈압이 80/46이 나왔다면, 체온이 38.5가 나왔다면 이 역시도 변증시치라는 철저히 한의학적인 원인을 기반으로 환자에게 설명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러한 이론과 임상의 괴리가 있는 상황이 임상 현장에 처음 내던져졌을 때 가장 막막한 순간이었다. 하지만 지금에 이르러서, 수많은 고군분투와 희생의 결과물이자 큰 흐름의 과정으로써, 의학계 대학의 궁극적인 목표인 ‘학교 교육만으로도 임상 현장에 바로 투입될 수 있는 의료인을 양성해 내는 것’에 걸맞은 변화가 정착된 것 같다. CPX를 통해 학생들은 내가 환자에게 무엇을 물어야 하는지, 무엇을 검사하자고 해야 하는지, 또한 나의 물음과 검사가 어떤 책임이 있는지에 대한 인지가 생길 것이다. 무엇을 물어야 하는지 교육받는 과정에서 한의학의 ‘망문문절(望聞問切)’ 개념은 자연스럽게 따라올 것이고, 무엇을 검사하자고 해야 하는지 고민하는 과정에서 신체진찰의 ‘시진-촉진-타진-청진’의 과정을 자연스럽게 습득할 것이다. 그리고 이는 칠판에다가 ‘한의사는 망문문절을 해야 한다. 절진 중 하나인 맥은 많이 짚어봐야 안다.’라는 문장을 적는 교육과는 같은 목적임에도 조금 다른 방향과 결과를 가진다. OSCE를 통해서는 학생들이 면허의 종류를 떠나서 의료인이라면 기본적으로 응당 할 줄 알아야 하는 술기에 대한 인지는 생길 것이다. 더 나은 교육 현장을 만들기 위해서라면 왕년에 내가 가졌던 ‘이걸 내가 왜 알아야 하지?’라 순수 무지의 궁금증을 가지는 비율이 줄어들 것이다. 그리고 이 많은 변화들은 결국 현장에서 보이지 않는 싸움을 해온 선배님들의 노고 덕이며, 이제 나는 중간 세대로서 더 잘 만개된 현실을 후배들에게 전달할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 고작 한 명이 움직여서 뭐를 할 수 있겠냐만, 모든 변화의 시작은 한 명의 움직임에서부터 난다. 좀 더 나은 진료 현장, 좀 더 나은 교육 현장을 만들기 위해, 다른 말로 환자에게 정확한 정보와 신뢰를 줄 수 있는 진료 현장과 교육을 만들어 내기 위해 개인의 노력을 붓고 계시는 모든 분들에게 감사의 말을 전하며 글을 마친다. -
“국민들은 왜 여전히 병원 쇼핑을 하나”오현민 대한한의사협회 기획이사 [한의신문] 대한민국 보건의료체계는 지금 거대한 변곡점에 서 있다. 짧게는 5년, 길게는 10년 안에 의료환경은 지금과 전혀 다른 모습이 될 것이다. 고령화 속도가 예상을 웃돌며 치매, 심뇌혈관질환, 당뇨, 고혈압 등 만성질환이 폭발적으로 늘고 있다. 급성·감염병 중심에서 만성·복합질환 중심으로 질환 구조가 바뀌고 있는 것이다. 이 변화는 곧바로 국가 재정 위기로 이어진다. 1977년 도입된 국민건강보험은 국민의 건강권을 지켜온 제도지만, 지금과 같은 의료비 증가세라면 2030년 전후 고갈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이는 보건사회연구원, 국민건강보험공단, 국회 예산정책처 등 다수 기관의 공통된 경고다. 재정 고갈은 곧 ‘보험료를 내도 필요한 시점에 치료를 받지 못하는 현실’을 뜻한다. 이미 필수의료 영역은 인력 부족으로 위기에 처했고, 지방의료는 붕괴 직전이다. 수도권 대형병원으로의 환자 쏠림은 갈수록 심화되며 지역·계층 간 격차가 커지고 있다. 정부도 필수의료 특별법, 일차의료 강화, 통합돌봄 체계 구축 등 대책을 내놓고 있지만, 중요한 것은 환자에게 돌아오는 실질적 효과다. 병이 낫지 않고 재정만 소모된다면 제도는 실패다. 지금 대한민국은 저비용·고효율 체계를 구축할 것인지, 아니면 비효율 속에 침몰할 것인지를 선택해야 한다. 치료 대신 ‘전전(輾轉)’…쌓이는 환자 절망 의료 현장은 제도의 비효율성을 그대로 보여준다. ‘병원 쇼핑’은 과장이 아니라 환자들의 일상이다. 불면증 환자 A씨는 내과, 정신건강의학과, 이비인후과, 신경과, 대학병원까지 전전하며 수면검사까지 받았지만 여전히 잠들지 못한다. 또 난임 부부 B씨는 수천만 원을 들여 여러 차례 체외수정을 시도했지만 임신에 실패했으며, 무엇보다 시간의 손실이 두렵다. 만성 소화불량 환자 C씨는 내시경, CT, 알레르기 검사까지 받았지만 원인을 찾지 못한 채 고통을 반복한다. 치매 초기 환자 D씨는 약물 외 대안이 없고, 자녀들은 병원 동행으로 경제·시간적 생산성을 잃는다. 정신과 치료 환자 E씨는 약물 부작용과 장기 복용의 불안 속에서 “끊자니 불안, 먹자니 두렵다”는 딜레마에 빠졌다. 이들은 결국 같은 질문을 한다. “왜 치료가 안 될까요?” 해결되지 못한 환자군이 병원 쇼핑의 주요 대상이 되고, 이들의 좌절은 사회적 불안으로 확산된다. 경제에 치우친 의료 현주소 ‘병원 쇼핑’ 병원 쇼핑은 환자의 고통을 넘어 재정 낭비로 이어진다. ① 불면증 환자: 연평균 진료비는 약 83만원이지만 내시경·MRI·수면검사 등으로 비용은 불어난다. 하지만 호전도는 미미하다. ② 난임시술: 체외수정 1회 비용은 400만~1000만원, 성공률은 출산까지 고려하면 약 18%. 다섯 차례 반복하면 수천만 원이 들지만 결과는 불확실하다. 이는 개인의 좌절을 넘어 국가적 저출산 위기로 이어진다. ③ 당뇨 합병증: 혈액투석 환자 1인당 연간 진료비는 2200만~2900만원. 조기 관리로 막을 수 있었던 비용이지만 현 체계는 고비용 치료에 재정을 투입한다. 반면 한의진료는 국민건강보험 총진료비의 2%대에 불과함에도 불면·난임·만성 소화기질환 등 대형병원이 풀지 못한 환자군을 담당한다. 저비용으로 환자의 삶의 질을 개선하는 역할을 하고 있지만 제도 안에서 충분히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법과 제도에도 드리운 ‘현장 불균형’의 그림자 현재 국회에서 의료체계 개선을 위한 법안들이 활발히 논의되고 있으나 이러한 현장의 문제는 그대로 제도 불균형으로 이어진다. 먼저 ‘필수의료 특별법’은 특정 직역 중심으로 설계돼 다양한 인력이 참여하지 못하는 한계점이 있다. ‘국립대병원 설치법’은 한의과 설치 의무 조항이 없어 국민의 선택권을 제한하며, 국립중앙의료원 또한 고비용 환자군을 다루는 한방진료부를 충분히 활용하지 못한다. 첨단의료·디지털 헬스 관련 법제는 한의진료와 데이터를 반영하지 않아 소외 위험이 크다. 아울러 보훈의료에서도 한의진료는 거의 배제돼 형평성과 효율성이 저해된다. 이처럼 국민이 실제로 필요로 하는 저비용·고효율 자원은 제도 논의에서 구조적으로 배제돼 있다. 이는 단순한 직역 갈등이 아닌 국가 재정과 국민 건강권을 위협하는 근본 원인이다. 국민에게 가장 이득이 되는 구조라면 어떤 직역이든 제도에 반영돼야 한다. -
‘감(感)’에서 ‘객관’으로....맥진기, 한의진단의 미래유준상 상지대 한의대 교수 [한의신문] 한의진료에서 맥진은 매우 중요한 진단 수단이다. 내과 질환을 볼 때는 물론이고, 침 치료 시에도 활용된다. 그러나 임상 현장에서 보면 젊은 한의사들 가운데 맥진을 아예 포기하고 복모혈 진단이나 배수혈 진단만 하는 경우도 있다. 이는 아마도 ‘이건 활맥인데 몰라?’ ‘이건 삽맥이잖아’라는 식으로 28맥 중 하나를 정확히 짚어야 한다는 부담감 때문이 아닐까 한다. 사실 맥진의 요령은 복잡하지 않다. 흔히 말하는 8요맥인 부침(浮沈)과 지삭(遲數), 활삽(滑澁), 대소(허실)의 구분만으로도 상당 부분을 설명할 수 있다. 이제마 선생이 “맥의 이치는 부침과 지삭에 있다”고 한 것처럼 병의 표리와 한열을 구분하는 핵심은 부침과 지삭이다. (유준상, 사상체질 맥진의 연구동향, 사상체질의학회지, 2024). 필자가 인턴 시절 처음 맡은 업무는 예진실에서 쏘드맥진기와 양도락 측정을 하고 환자의 진료과를 배정하는 일이었다. 졸업 후에도 자연스럽게 쏘드맥진기를 접하게 되었는데, 금속봉 세 개가 내려와 척맥을 중심으로 압력을 감지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센서가 둔탁해 환자가 아프기도 했고, 출력된 결과는 혈관 노화도를 보는 수준의 2차 미분파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환자에게 파형을 보여주고 설명할 수 있다는 점에서 ‘객관적 맥진’에 대한 갈증을 느꼈다. 이후 학생 실습에서는 촌관척의 위치와 손가락 모양을 설명하고, 서로 맥을 잡아본 뒤 부중침에 따른 변화를 그림으로 기록하도록 했다. 일본 기도 마사오의 『맥진습득법』을 번역하면서 얻은 내용을 바탕으로, 다시 대요맥진기 DMP-LIFE plus를 활용해 맥파형을 측정하고 학생들에게 보여주는 수업도 진행했다. 다만 이 기기는 우측 관맥만 측정한다는 한계가 있어, 양쪽 촌관척을 모두 측정할 수 있는 기기를 찾던 중 중국 남경의 대경맥진기를 접하게 되었다. 대경맥진기는 약 10년간의 기술 축적 끝에 현재 중국 내 의료기관에서만 약 2만 대가 사용되고 있다고 한다. 3개의 금속봉 센서를 통해 좌측 촌관척을 1분 30초간 측정하고, 다시 우측을 측정하는 방식이다. 센서가 매우 민감하여 각기 다른 압력을 자연스럽게 가하며 측정할 수 있었다. 결과지는 상단에 활·유력·삭맥과 같은 기본 형태를 제시하고, 이후 방사형 그래프를 통해 부침·지삭·활삽·유력/무력·현(弦)·연(軟)을 표시한다. 좌우 손목 각각의 촌관척 결과에 따른 병증 예측도 함께 제공한다. 중국에서는 여전히 9체질 이론이 유행하는데, 체질별로 침구치료 경혈, 추나(안마) 경혈, 기공 체조법, 추천 음악, 약선 요리 재료까지 안내해 준다. 사용자가 원하지 않는 항목은 설정에서 제외할 수 있다는 점도 흥미로웠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것은 본사를 방문했을 때다. 전국에서 측정된 데이터가 중앙 서버에 집적·분석되고 있었고, 위장병과 만성피로가 가장 많이 보고된다는 점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기기는 남경중의약대학, 상해중의약대학 등과 협업하고 원로 중의들의 자문을 받아 개발되었다. 현재는 중국어 버전이며, 중국 내에서 의료기기 2등급을 획득했다. 일본 동양의학회 전시회에서는 ISO 인증 사실도 홍보 자료에 포함되어 있었다. 향후 계획은 식약처의 수입 의료기기 등록을 마친 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의 보험 등재를 추진하는 것이다. 이미 대요맥진기가 보험 등재된 만큼 큰 어려움은 없을 것으로 보인다. 선의의 경쟁을 통해 더 정밀하고 신뢰성 높은 맥진기가 개발되길 기대한다. 끝으로 강조하고 싶은 점은 손끝으로 느끼는 맥진 못지않게 환자에게 ‘보여주는 맥진’도 중요하다는 것이다. 한 동료 한의사는 “손끝 감각이 예민하지 않아 맥진을 포기하고 살았는데, 이 기기를 하루빨리 사용해 보고 싶다”고 말했다. 이러한 목소리는 맥진의 객관화와 시각화가 단순히 진단 도구의 진보를 넘어, 환자와의 소통을 강화하는 길임을 시사한다. 손끝의 전통과 첨단 기기의 만남은 한의학이 환자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는 계기가 될 것이다. -
“약침, 일차의료와 함께 간다” AJ탕전원, 평가 인증 2주기 달성안병수 AJ탕전원장(대한약침학회장) [한의신문] 학술, 임상, 제도 개선을 아우르며 한의학 현대화를 선도하고 있는 AJ탕전원이 정부의 ‘원외탕전실 평가 인증(약침 조제)’ 2주기를 달성했다. 본란에선 안병수 원장을 통해 초고령사회 속 일차의료와 함께 발전해야 할 약침의 역할과 이를 제도적으로 뒷받침할 근거 마련을 위한 국제 학술 활동의 노력에 대해 들어봤다. [편집자주] Q. AJ탕전원만의 강점은? AJ탕전원은 대한약침학회를 기반으로 설립된 원외탕전원으로, 약침학 교과서를 근거로 다양한 약침을 조제하고 있으며, 현재 인증 원외탕전 중 가장 많은 종류의 약침을 조제하고 있다. 각 약침은 이론적 토대에 맞춰 개발돼 한의사들의 접근성이 높고, 학회를 근간으로 한 학술적 기반 속에서 활발한 연구 활동이 이어지고 있다는 점도 강점이다. 특히 실험 데이터와 임상 근거를 지속적으로 보강하며 단계적으로 발전해왔으며, 관련 논문 역시 함께 참고할 수 있다. 또한 AJ탕전원은 GMP급 설비를 가장 먼저 도입해 운영해 온 곳으로, 반자동화 설비를 일찍부터 적용하고, 이물질 자동 검사기 등 안정화된 장비를 활용해 조제 공정 전반을 인증 기준에 맞춰 관리하고 있다. 학회를 통한 이론적 근거 위에 구축된 설비와 현대적 관리체계를 갖춘 덕분에 약침을 보다 안전하게 공급할 수 있다는 점이 차별성이다. Q. 약침 인증 원외탕전원으로서 2주기를 맞은 소회는? 약침 인증 원외탕전은 한의사가 환자에게 안전하게 약침을 시술할 수 있도록 한약재의 입고 단계부터 조제·관리 전 과정에 걸쳐 엄격한 안전 기준을 준수하고, 정부의 인증을 받은 조제시설이다. 이 과정에는 탕전시설과 운영 절차까지 포함된다. 보건복지부와 한의약진흥원을 통해 진행되는 인증평가를 2주기까지 무사히 마친 것은 감사한 일이다. 인증평가는 단순한 절차가 아니라 평상시에도 항상 지켜야 할 안전 기준이자 허들이다. 현재 2주기 인증을 받은 약침 원외탕전원은 6곳으로, 모두가 각자의 자리에서 안전한 약침을 조제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음을 잘 알고 있다. 이에 각 기관의 노력에 깊이 감사드린다. Q. 인증 절차는 어떻게 진행되는가? 약침 인증은 통상 3년 주기로 이뤄지며, 매년 중간 점검을 통해 관리 체계를 재검증받는다. 사실상 해마다 새롭게 인증을 받는 것과 다름없는 수준이다. 평가 과정은 9개 영역, 168개 조사항목에 걸쳐 진행되며, 모든 항목을 충족해야만 한다. 긍정적인 요소가 있더라도 단 한 항목이라도 미흡하면 인증을 받을 수 없기에 결코 쉽지 않은 절차다. 인증 통과는 단순히 좋은 설비만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다. 철저한 관리와 운영이 반드시 뒷받침돼야 하는 만큼 AJ탕전원은 이 까다로운 과정을 지속적으로 보완하고, 강화하며 성실히 대응해 오고 있다. Q. 현행 인증 제도에서 개선이 필요한 부분은? 현재 인증평가 제도는 점차 보완되며 최선의 기준을 적용하고 있다고 본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어려움도 많다. 예를 들어 GMP의 경우 외국에선 일부 미비점이 있더라도 가승인을 통해 개선 기회를 부여하지만 국내 제도는 사실상 100점 만점을 받아야만 통과가 가능하다. 모든 기관이 한 번에 완벽한 세팅을 갖추기는 쉽지 않다는 점에서 제도적 유연성이 필요하다. 또한 인증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인력과 재원이 투입되지만 정부 지원은 여전히 부족하다. 더 나아가 의료 현장에서 보험 적용 확대와 제도적 지원이 뒷받침된다면 원외탕전원과 약침 산업은 한층 더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 아직은 제도적 기반이 미흡하지만 AJ탕전원은 변화에 발맞춰 꾸준히 노력을 이어가고 있다. Q. 약침 활성화 방안이 있다면? 현재 자동차보험에선 약침이 적용되지만 건강보험에서는 과거 급여에서 비급여로 전환된 상태이며, 산업재해보상보험에서도 해당되지 않는다. 하지만 향후 단계적으로 일부 약침부터 일정 기준을 충족해 보험 적용이 가능해진다면 국민들의 치료 접근성이 높아지고, 환자들에게 더 양질의 의료서비스가 제공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관련해 정책적으로도 단계별 진전이 있기를 기대한다. 특히 내년부터 시행되는 ‘제5차 한의약 육성발전 종합계획’에는 약침의 산업적·전략적 활성화 방안이 반드시 포함되길 바라며, 협회 차원에서도 복지부와 함께 미래를 설계해 나가기를 희망한다. 또한 현재 공중보건한의사들 역시 약침 활용을 원하고 있으나 행정적 제약으로 인해 실제 현장에서는 사용하지 못하고 있다. 도서·산간 등 의료취약지의 어르신들에게 약침은 매우 필요한 치료법인 만큼 제도적 개선이 절실하다. AJ탕전원은 대한약침학회를 중심으로 해외와 학술 교류를 이어가고 있으며, 이에 따라 외국에서 약침 사용 요청도 종종 들어온다. 하지만 현행 제도상 국내에서 조제된 약침을 외국에서 사용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최소한 해외에 나가 있는 한의사들이 활용할 수 있도록 행정적으로 개선해야 한다. Q. 학술 활동에 주력하고 있다. SAR, ICMART, ICCMR 등 세계적 국제학술대회와 지속적으로 교류해 온 대한약침학회와 ㈔약침학회는 오는 24일부터 부산에서 국제학술대회 ‘ISAMS(International Scientific Acupuncture & Medicine Symposium)’를 개최한다. 이는 한의학의 현대화, 임상 활성화, 글로벌화를 통해 한국 한의학의 위상을 한 차원 높이는 세계 최고 수준의 학술대회다. ISAMS에선 한국한의학연구원, 한국한의약진흥원뿐만 아니라 MRC와 BRL을 수행하는 각 대학과 공중보건한의사도 함께 해 연구 성과를 발표할 예정이다. 이러한 연구 발표는 천연물, 한약, 약침의 효과와 향후 정책 수립의 중요한 밑거름이 될 것이다. 또한 대한약침학회의 ESCI 등재 저널인 ‘JoP(Journal of Pharmacopuncture)’와 ㈔약침학회 발간 학술지 ‘IAM(Innovations in Acupuncture and Medicine)’를 통해 관련 논문을 지속적으로 발표 중이다. 앞으로는 단순한 임상 사례 보고보다 근거를 축적한 논문이 더 많이 나와야 하는 만큼 연구와 임상 적용이 긴밀히 연결되도록 준비하고 있다. ▲지역 어르신들께 약침 치료를 실시하고 있는 안병수 원장 Q. 이외 강조하고 싶은 말은? 초고령사회에서 한의사의 전인적 대응 능력은 일차의료의 중요한 강점이며, 이 과정에서 한의사들의 술기에서 약침이 중요한 수단으로 활용이 충분하다. 실제로 한의방문진료 시범사업에서도 약침은 돌봄을 구현하는 주요 수단으로 활용되고 있다. 이를 국민이 체감하려면 건강보험·실손보험 적용 확대가 필요하며, 이는 환자 부담을 줄이고, 의료 접근성을 제고하는 기반이 될 것이다. 더욱이 미국 ‘Memorial Sloan Kettering 암센터’에서 한약이 암 치료의 부작용 완화에 활용하는 사례처럼 국내에서도 제도적 지원과 인식 개선이 뒤따라야 한다. 연구와 임상적 시도에 더해 제도적 뒷받침이 이뤄질 때 약침은 국민 건강을 지키는 중요한 도구로 자리매김할 것이다. -
“한의난임사업, 익산시보건소의 대표적인 민관 협력사업으로 자리잡아”이진윤 익산시보건소장 <편집자주> 이달 12일 서울 프레지던트호텔에서 개최된 ‘2025 한의난임사업 성과대회’에서 전북특별자치도 익산시가 사업부문 대상(보건복지부장관상)을 수상했다. 익산시는 지역 의료기관과 연계한 맞춤형 치료로 임신 성공률을 높이고, 한의사회와의 긴밀한 협력을 통해 안정적인 사업 운영 기반을 마련한 점을 높이 평가받았다. 본란에서는 이진윤 익산시보건소장(공직한의사협의회 회장)에게 수상 소감 및 익산시 한의난임사업의 성과 등을 들어봤다. Q. 대상을 수상한 소감은? 그동안 보건소에 근무하면서 많은 보건사업 관련 우수기관상을 받은 경험이 있지만, 이번에 처음으로 한의난임사업 관련 보건복지부장관상(대상)을 수상하게 돼 큰 영광으로 생각한다. 많은 협력과 도움을 주신 익산시한의사회 임태형 회장님과 한의난임사업단 엄재연 단장님께 감사드리며, 또한 뒤에서 많은 후원을 해주신 익산시장님, 보건사업과장님과 전국 기초지자체 중 유일한 조직인 한방사업계 직원분(6명)들께도 감사드린다는 말씀을 전하고 싶다. Q. 익산시 한의난임사업의 성과는? 익산시는 2013년부터 현재까지 13년간 한의난임사업을 꾸준히 운영하고 있다. 2013년 익산시와 익산시한의사회가 업무협약을 맺고 난임 여성 30명을 지원한 것을 시작으로 2019년에는 한의난임사업의 예산을 전액 시비 부담으로 전환했다. 또한 2021년에는 남성까지 대상자를 확대해 부부 30쌍(60명)에게 지원했으며, 올해에는 전북특별자치도의 사업(도비 지원)으로 확대돼 추진되고 있다. 한의난임사업은 익산시보건소의 대표적인 민관 협력사업으로 자리잡아 평균 임신 성공률 29.4%(2013~2024년), 참여자 만족도 93.6%(최근 3년)를 기록하는 등 저출산사회 대응에 큰 기여를 하고 있다. Q. 난임치료에 있어 한의약의 역할 및 강점은? 난임의 주요 원인은 다양한데 남성 요인, 난소 기능 저하, 배란 장애, 난관 손상, 자궁경관 등의 원인이 있다. 특히 나이가 많은 여성의 경우 자연 임신을 시도하는 동안 난소의 기능이 점차 저하돼 임신이 더욱 어려워지고 있다. 뚜렷한 난임의 원인이 있는 경우뿐만 아니라 원인불명의 난임에서도 효과적인 한의난임치료를 통해 임신의 확률을 높일 수 있다. 예비 산모의 건강을 진단해 개개인의 몸상태에 맞게 임신이 잘 이뤄질 수 있도록 치료할 수 있는 것이 한의난임치료의 강점이라고 생각한다. Q. 한의난임사업 확대를 위해 필요한 점은? 모자보건법 개정(2024년 2월6일 시행)으로 한의난임치료에 대한 국가적 지원의 법적 근거가 마련됐으며, 이를 바탕으로 보건복지부는 여성난임 한의표준임상진료지침을 개발한 바 있다. 많은 지자체가 한의난임치료 지원사업을 확대하고 있으며, 향후 국가가 건강보험 및 보건사업에서 한의약 난임치료비를 지원할 수 있도록 관계자분들이 함께 노력해 주시길 바란다. Q. 사업 진행 시 느낀 애로사항은? 수년간 조례에 의해 사업비를 지자체에서만 충당하다보니 예산과 확장성에 한계가 있었다. 그런데 이제는 모자보건법에 한의난임치료 지원이 포함된 만큼 앞으로 국가예산이 추가되고, 저출산 극복을 위한 사업이 확대되기를 기대하고 있다. Q. 함께 사업을 진행한 관계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은? 사업에 참여하는 모두가 만족하는 사업이어야 좋은 사업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한의난임사업은 난임 대상자의 경우에 지자체에서 지원하는 예산으로 경제적 부담 없이 한의사회에서 양질의 건강관리서비스를 받아서 좋고, 보건소는 적절한 예산으로 대상자에게 맞춤형으로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하고 실적을 홍보할 수 있어서 좋으며, 한의사회는 지자체 예산을 지원받아 저출산 대응 공공보건사업에 참여하고 기여할 수 있어서 좋은, 참여한 모두가 좋은 사업이라 생각된다. 앞으로도 더 많은 난임 가정이 건강한 아이를 만날 수 있도록 함께 노력해 나갈 수 있기를 바라며, 모두에게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린다. -
몸과 마음을 연결 짓는 한의학, 성소수자를 진료소로 초대하다[한의신문] 홍진단(성소수자와 함께하는 한의사, 한의대생 모임)은 행성인(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단체)과 공동주최로 성소수자 한의진료소 사업을 2024년 6월 30일, 7월 28일 양 일간 진행했다. <신재하 한의사> 홍진단 회원 8명(한의사 5명, 한의대생 3명)이 진료 및 진료보조 업무를 맡았고, 행성인 회원 2명이 실무 업무를 맡았다. 외부의 10개의 한의원에서는 첩약 후원에 참여하며 성소수자 진료 사업을 응원하는 마음을 보내왔다. 한 달 간격으로 두 차례 진행된 한의진료에 각각 12명, 11명의 성소수자 환자가 내원했다. 내원한 성소수자 환자의 성별 정체성은 트랜스젠더(2명)·젠더퀴어(2명)·논바이너리(2명)·시스젠더(13명), 성적 지향은 레즈비언(8명)·게이(6명)·바이섹슈얼(3명)·팬섹슈얼(1명)·에이섹슈얼(1명)으로 다양한 분포를 보였다. 성소수자 진료 왜 필요한가? “작년 어머니께 커밍아웃한 후 마음고생 하면서 습진이 생겼어요.”, “애인을 만나게 되면서 관계에서의 불안감이 더해졌어요.”, “혈액검사 상 남성호르몬 수치에는 문제가 없으나 음성, 안면 남성화가 더딘듯한데 체질 문제일지 걱정돼요.”, “6~7세 때부터 젠더 디스포리아로 우울했어요.” 행성인X홍진단 한의진료소에서는 일반적인 임상 환경에서 들을 수 없었던 그들의 일상적인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커밍아웃, 연애 고민, 트랜지션, 젠더 디스포리아는 그들의 일상적이면서도 중요한 문제였다. 성정체성이나 성지향성 자체는 치료 대상이 아님에도 성소수자 한의진료가 필요한 이유는 여기에 있다. 성소수자에 대한 일상적인 차별과 혐오적 시선은 성소수자를 병들게 한다. 있는 그대로의 나로 인정받지 못하는 억울함, 일상적으로 정체성을 숨겨야만 하는 답답함, 정체성을 들킬까 봐 조마조마한 마음, 혐오적 시선에 대한 두려움, 커밍아웃 과정 중 겪는 갈등과 분노 등의 감정이 성소수자의 다양한 고통을 야기한다. 한의학적 음양관과 젠더 스펙트럼 한의학에서는 흔히 음양의 예시로 남자와 여자를 든다. 하지만 남자가 양이고 여자가 음이라 고정하는 것은 본래 한의학이 존재를 바라보는 방식에서 벗어난다. 음양은 둘로 나뉘거나 고정되는 개념이 아니라, 매 순간 새로운 균형을 찾아 변화하고 연결되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음양은 하나 혹은 둘의 개념이 아니며 존재 또한 본래 양이나 음 중 하나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 <무한히 분화하는 음양> 음중지양, 양중지음, 양중지양중지음, 음중지양중지음···. 음양은 수없이 분화할 수 있으며 이는 젠더 스펙트럼과 유사한 구조를 가진다. 이러한 한의학의 음양관은 기존 성별 이분법적 사고를 넘어서 성소수자를 편견 없이 이해할 수 있게 한다. <젠더 스펙트럼> 환자의 일상이 진단과 치료에 연결 한국 사회에서 성소수자는 일상적인 차별과 혐오에 노출되어 있으며 사회로부터 그들의 정체성이나 지향성을 숨길 것을 (암묵적으로) 요구받는다. 그들이 마땅히 안심하고 치료받아야 할 공간인 의료기관에서조차 그 요구는 지속된다. 하지만 한의학은 연결성을 중시한다는 점에서 치료의 강점이 있다. 몸과 마음을 나누지 않으며 환자의 일상이 곧 진단과 치료에 연결된다. 평소에 무얼 자주 먹는지, 어떤 환경에서 일을 하는지, 인간관계로 인한 스트레스를 받는 일은 없는지를 묻는다. 그렇기에 성소수자에게 한의의료기관은 안심할 수 있는 공간이어야 한다. 성소수자들의 일상에 가닿기 위해서는 성소수자에 대한 충분한 이해와 공감이 바탕이 되어야한다. 그들이 겪는 일상적 차별이 몸과 마음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성소수자 친화적 공간 본 진료소에서는 환자 한 명당 하나의 진료실 공간을 확보했다. 진료실에는 무지개 깃발을 꽂아두고 운영진들은 무지개 스티커, 뱃지 등을 착용하여 성소수자 친화적 공간임을 가시화해 참가자들이 안전감을 느낄 수 있도록 했다. 문진표에는 성별 정체성을 묻는 항목을 추가하여 환자들이 스스로 느끼는 성별 정체성에 맞춰 상담했다. 예를 들어 테스토스테론 치료로 트랜지션 중인 FTM 환자의 경우 월경 대신 출혈이라는 용어 사용으로 젠더 디스포리아로 인한 고통을 최소화할 수 있도록 했다. 또한 치료에 필요한 노출 부위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으로 환자가 원치 않는 노출을 피할 수 있도록 하고, 필요시 성별 구분 없는 환자복을 제공했다. 치료는 침, 한약, 정신과 상담기법 등을 활용했으며 담당 한의사가 한 달 치 한약을 처방하기도 하고, 진료 후 한 달이 지난 시점에 복용 상황을 체크해 건강관리를 지속할 수 있도록 도왔다. 한의진료가 도움이 되었나요? 참가자 대상 설문조사 결과 ‘한의 진료가 건강에 도움이 되었나요?’라는 질문에 20명 중 18명이 ‘매우 그렇다(5점)’라고 답변하였고, ‘한의 진료에 대한 전반적인 만족도는 어떠신가요?’라는 질문에 20명 중 17명이 ‘매우 그렇다(5점)’라고 답변했다. 진료소에서 좋았다고 밝힌 점 중 1순위는 성소수자 친화적 분위기로 꼽았다. 성소수자 당사자는 “상담 시 퀴어임을 어렵게 밝히지 않아도 되어 마음이 편하다”,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 표현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어서 좋았다”, “직업과 성생활에 대해 편하게 말할 수 있었다.” 등과 같은 의견을 남겼다. 이 외에도 독립된 진료 공간과 탈의실, 몸에 대한 충분한 고려, 충분한 상담시간과 자세한 설명 등에 대한 긍정적인 피드백을 남겼다. 개선되면 좋을 점으로는 지역 확대, 치료의 연속성 등을 꼽았다. 이는 많은 성소수자들이 성소수자 친화적 진료를 필요로 함을 시사한다. 성소수자 대상 집담회 개최 이에 홍진단은 후속사업으로 2024년 8월 9일 참가자 대상 집담회를 개최했다. 행성인X홍진단 진료사업 보고, 진료 참여 한의사 소개 및 후기, 참가자 소개 및 진료소 참가 후기 등에 대해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참가자 중 한 명은 “나는 시스젠더 레즈비언으로서 특별히 질환도 없고 체질 문제로 상담하는 것인데 성소수자 친화적 한의원이 필요한가? 고민했었다. 하지만 진료를 받은 후 나에 대해 굳이 속이거나 할 필요 없다는 점에 따뜻함이 느껴졌다.”라고 밝혔다. <홍진단X행성인 한의진료소 집담회> 다른 참가자는 “기존 정신과나 한의원에서는 커밍아웃을 했는데도 ‘딸’로 계속 지칭하는 등 힘들었지만 약을 타는 목적으로 (어쩔 수 없이) 다니고 있었다. 홍진단에서는 편견 없이 환자의 건강에 도움이 되는 진료를 해줬다.”고 밝혔다. 그 밖에도 호르몬 치료 중인 트랜스젠더 분들이 한약 교차 복용에 어려움을 겪는 점, 기존 정신과의 약물 의존적 치료의 한계점 등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10월19일, 11월16일 한의진료소 운영 홍진단은 작년에 이어 오는 10월 19일(일), 11월 16일(일) 양 일간 한의진료소를 운영할 예정이다. 진료소 사업을 바탕으로 한의진료에 필요한 점은 무엇일지를 고민하고, 성소수자 친화적 한의의료기관을 만들기 위한 한의사·한의대생 대상 교육 사업 등을 이어갈 예정이다. <2025 홍진단X행성인 한의진료소 참가자 모집 포스터> 더 나아가 성소수자 전문의료를 위해 호르몬 치료 중인 트랜스젠더 환자, HIV 감염인 등의 치료에 필요한 의료적 지식을 함양하며, 이를 위해 한의계의 활발한 논의와 연구를 이끌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