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論으로 풀어보는 한국 한의학 (166)尹淮(1380∼1436)는 조선 초기의 문신으로서 1401년(태종 1)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한 뒤 좌정언, 이조·병조 좌랑 등을 역임하고, 1417년에는 승정원의 대언(代言)이 되어 왕을 보좌했다. 저서로는 『청경집』이 있다. 1478년 서거정에 의해 간행된 『東文選』 93권에서 銅人鍼灸圖小序라는 尹淮의 서문을 발견했다.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신(臣)이 삼가 살펴보니, 《명당정경(明堂正經)》은 황제(黃帝)와 기백(岐伯)이 천하 사람을 살리던 것인데, 그 뒤에 동인(銅人)에다 침(鍼) 구멍을 만들어 놓은 것은 그 뜻을 근본으로 하여 만든 것이다. 대개 백성이란 나라의 원기(元氣)이니, 원기가 병들면 몸도 위태롭게 되기 때문이다. 상고 시대에 성인이 예의(禮義)로 가르쳐서 그 마음을 기르고, 의식을 마련하여 그 몸을 기르며, 또 의약을 가지고 피와 기운을 길러서 원기를 보호하고, 국맥을 오래 가게 하던 것이니, 그렇다면 침놓고 뜸뜨는 법은 또한 어진 정사의 한 가지 일이다. 삼가 생각해 보니, 금상 전하께서 살리기를 좋아하는 어진 덕은 옛 성인과 똑같고, 백성을 교양하는 도(道)는 이미 지극한 곳에 이르렀는데도 오히려 부족하게 여겨 백성이 병으로 고생하는 것을 보면 자기 몸의 병과 같이 애처롭게 여겨 밤낮으로 마음을 놓지 못하였다. 우리나라가 바다 한 모퉁이에 끼어 있어, 용한 의원을 쉽사리 만나기 어렵고 도(圖)와 경(經)은 혹 진본과 틀리며, 침놓는 법은 완전한 것을 보기 어렵다. 그래서 영락(永樂) 을미년 여름에, 〈동인침구도(銅人針灸圖)〉를 내려 줄 것을 청하였더니 천자가 옳게 여기고 태의원(太醫院)에 명하여 향도(向圖)와 배도(背圖) 두 폭을 그려 보내게 하였으니, 그 그림의 정밀함은 털끝 하나 틀림이 없어 마치 의화(醫和)와 편작(扁鵲)을 면대하여 직접 가르침을 듣는 것 같으니, 참으로 사람을 살리는 지침이었다. 전하가 즉시 명하여 그 그림을 떠서 목판에 새겨 내외에 반포하여 자손만대에 혜택을 주게 하였으니, 그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과 국맥(國脈)을 안보하려는 생각이 구비하여, 장차 이 세상을 오랜 태평성대의 지역으로 끌어올리게 되었다. 아, 참 거룩한 일이다.(臣謹按明堂正經。 黃帝歧伯。 所以活天下也。 後之爲銅人腧穴者。 祖其意而述之。 夫民者。國之元氣也。 元氣病則身且危矣。 上古聖神。敎之禮義。 以養其心志。 爲之衣食。 以養其口體。 申之醫藥。 以調其榮衛。 于以保元氣而壽國脉。 然則鍼灸之術。 斯亦仁政之一端也。 恭惟主上殿下好生之德。 同符前聖。 敎養之道。 旣臻其極。 猶且嫌然。 視民之疾痛痾痒。 擧切吾身。 而夙夜于懷。 以吾東方介居海隅。 良醫之不易得也。 圖經之或失其眞也。 鍼砭之罕見其全也。 永樂乙未夏。 奏請給降銅人。 天子是之。 勑大醫院。 繪畫仰伏二軸以賜。 圖之精密。 毫髮不差。 若目見和扁而耳承師授。 誠活人之指南也。 殿下卽命模本鏤板。 頒布中外。 以惠萬世。 其仁民濟衆之念。 調保國脉之慮。 本末備具。 固將擧斯世而躋之仁壽之域。 吁盛矣哉。)”(번역은 한국고전번역원의 것을 따옴) 안타깝게도 서문이 『東文選』에만 남아 있고 두 폭의 銅人鍼灸圖는 남아 있지 않기에 그림 자체에 대한 평가는 불가능하다. 아마도 向圖, 背圖의 두 폭의 그림을 담고 앞에 서문을 붙인 畫帖의 형식을 띤 책이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이 화첩의 간행에 대한 기사를 『太宗實錄』에서 네 군데나 발견되는 것을 보면(1415년 4월, 10월, 11월, 12월) 당시 銅人鍼灸圖의 간행은 국가적 관심사였던 것으로 판단된다. -
KOMSTA 2019 미얀마 의료봉사많은 봉사를 다녀봤지만 아무런 소회가 들지 않는 봉사에 관해서는 글을 쓰기가 꺼려진다. 감상에 취한 기록을 숙제처럼 남기는 것은 나 자신에게도 거짓말을 하는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희한하게도 미얀마를 다녀올 때는 나도 모르게 스르르 펜을 들게 됐다. 하지만 진심으로, 내가 지금부터 전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연휴를 반납하고 사람을 돕고 왔더니 보람찼다거나 초심을 되찾았다는 등의 발에 채는 이야기로 들리지 않길 바란다. 이 글은 반성문에 보다 가깝기 때문이다.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들에 대하여 미얀마와 나의 인연은 5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마음에 드는 집을 골라 이사를 왔더니 바로 옆 건물이 미얀마대사관이었다. 그 전까지 나는 이 나라가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으며, 어떤 음식을 먹는지, 국기는 어떻게 생겼는지 아는 바가 전혀 없었다. 그러다 어느 날 새벽, 홀린 사람마냥 컴퓨터를 켜고 참가할 수 있는 의료봉사가 있는지 검색했고, 마침 그 날이 미얀마 해외의료봉사의 접수마감일이었다. 2017년 여름 미얀마에서의 첫 봉사 이후 같은 계절, 같은 장소에 돌아왔으니 정확히 2년만인 셈이다. 오랜만에 맞이하는 미얀마는 많은 것들이 달라져 있었다. 신한은행이 생겼고, 백인 관광객이 늘었으며, 소비 수준도 조금 더 높아진 것 같았다. 봉사 첫 날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함부로 이 나라가 ‘변했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했다. 나에게 합장을 하며 고마워하는 환자가 점점 줄어든 듯한 기분에 못내 서운했던 건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내, 내가 오랫동안 이 나라를 오해하며 짝사랑해온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순수한 불교의 나라라는 딱지를 붙이고, 이 곳이 언제까지나 변하지 않기만을 바랐던 나의 생각은 얼마나 일방향적이고 오만하기 짝이 없는가. 왜 사람은 항상 보고 싶은 것만 보려고 하는 것일까? 연애도 서로를 잘 모르는 상태에서 대개 콩깍지가 씌는 법이다. 사랑이 아니라 열병이다. 늦은 오후, 내 진료실에 젊은 미얀마 여자가 허리 통증을 치료받으러 왔다. 당연히 말이 안 통하겠거니 생각하고 루틴 실시 후 말없이 발침하려는데, 악센트도 없는 매우 유창한 영어로 나에게 도리어 묻는다. “비영리 단체인가요? 너무 깊은 인상을 받아서 그러는데 페이스북이라도 좀 알려주세요. 저는 전통의학이 좀 더 신뢰가 가거든요.” 그 순간 나는 머리를 한 대 맞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 이유는 첫 번째로, 우리의 선진 의료기술을 전파하겠다는 생각에는 우리가 그들보다 우위에 있다는 전제이자 착각이 깔려있음을 깨달았고, 두 번째로는 그들이 보기에도 우리의 치료 프로토콜이 여전히 전통 의학의 범주에 속한다는 사실이었다. 사실 모든 봉사는 그 자체로도 보고 싶은 것만 보려는 이기적인 측면이 있다. ‘왜 언어도 통하지 않는 곳에서 봉사를 해야 하는가’에 대한 답으로 우리는 흔히 ‘한의학의 세계화’를 꼽는다. 미얀마를 이해했을 때, 비로소 의료봉사의 진정한 의미를 찾아 하지만 과연 ‘세계화’가 무엇인가? 우리가 직접 세계로 찾아가 고인 우물같은 전통의학이 아님을 알리는 것일까? 그도 아니면 세계가 전통의학 그 자체로서 우리의 진가를 알아봐주는 것일까? 아젠다를 모호하게 설정했다가는 큰 일 날지도 모른다는 각성이 들었다. 더불어 내가 전통의학이라는 타이틀이 싫은 것처럼 그들도 순수의 나라, 도움이 필요한 나라라는 타이틀을 썩 달가워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까지 미치자 역설적으로 내가 이 나라를 드디어 알아가고 있다는 생각에 한편으로 안도감이 들었다. 한편, 그대로 있어주기를 기대하지 않았던 것들이 그 자리에 그대로 있어주었을 때, 우리는 놀랍고도 반가운 감정을 느낌과 동시에 비로소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다시 찾은 양곤 전통의학병원에는 새로운 병원장이 부임해있었고, 의욕넘치는 그녀는 병원 곳곳을 우리에게 소개해주기도 했다. 그러다 2년 전, 나와 함께 일했던 미얀마 의사를 우연히 마주쳤다. 우리는 그 당시에 그렇게 친하고 애틋한 사이도 아니었지만은 우습게도 서로의 얼굴을 보자마자 마음이 먼저 동했고 손을 잡고나서 아무 말 없이 꼬옥 부둥켜 안았다. 그녀는 이전보다 훨씬 여유 넘치는 모습이었다. 의국장으로 승진하기까지는 2년 간 무수한 노력이 있었을 것이다. 좋은 의미에서 그 기품은 참으로 변함이 없었다. 문득 나는 그들에게 어떤 모습으로 비쳐질지 궁금해졌다. 사실 콤스타에서의 첫 봉사 이후 나에게는 놀라운 일들이 일어났다. 좀 더 겸허해졌고, 쾌락과 진짜 행복을 구분하게 됐으며, 무엇보다 해낼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개원을 해냈다. ‘인연의 나라’에서 찾은 삶의 여러 가지 의미들 솔직히 말해 다시 그들 앞에 선 내 자신이, 내 표정이 자랑스러웠다. 확실히 이전보다 웃음이 늘었다. 공부한 것도 늘어 어떤 환자가 와도 겁내지 않고 진료했다. 구안와사 전문 한의원을 하게 된 것이 신의 한 수였는지 안면마비 환자가 유난히 많이 왔고, 시간가는 줄도 모르고 신나게 진료했다. 통역 담당인 한나선생님의 말로는 미얀마가 원래 중풍 환자가 그리 많다고 한다. 그때는 왜 몰랐을까? 심하게 진전을 보이던 중풍 후유증 환자가 치료 직후 눈에 띄게 떨림이 줄어 싱글벙글 돌아가는 모습을 보고 있는데 사무국 대리가 다가와 한 마디 한다. “원장님, 2년 전에 요기 앞에 있던 구멍가게엘 갔는데 거기 아줌마도 똑같고, 애기도 똑같고, 모든 게 다 똑같아요!” “뭘 그렇게 놀라!”라고 핀잔을 주면서도, 시간이 지나도 변함이 없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대해 생각했다. 정말로 변하지 않았다면 그 자리를 지키고 있을 리 없기 때문이다. 그 가게의 아주머니는 어렸던 우리 대리가 그 동안 법대에 입학해 곧 졸업을 앞두고 있다는 사실을 아마 영영 모를 것이다. 우리는 어떤 사람을 평생 알고 지낸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죽을 때까지 보고 살지 않는 경우가 많다. 한편 인연이 닿는 사람은 파도에 떠밀려 온 편지처럼 어느 날 갑자기 만나기도 한다. 이 나라에 발을 들인 첫 순간부터, 다시 이 곳을 찾기까지의 여정이 빙글빙글 돌아온 하나의 길처럼 느껴졌다. 나중에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미얀마에는 ‘인연의 나라’라는 별명이 있다고 한다. 괜히 불교의 나라가 아니라고 생각하며 혼자 웃었다. 한국에 돌아와서 한의원에 출근하니 매일 보던 환자가 넌지시 묻는다. “원장님, 선교 다녀오셨어요?” 그리고 나는 대답한다. “네, 뭐 그 비슷한 거 갔다왔어요.” -
고전에서 느껴보는 醫藥文化 -16안상우 박사 한국한의학연구원 동의보감사업단 한의학 분야 명의 활약상 여러가지 양태로 전해져 異鄕見聞錄, 壺山外記, 逸史有事 등 구전 名醫談 구전 명의 발굴, 후대에 소개…현재 의학도의 소임 한가위 명절이 지나갔다. 요즘에야 세태가 달라져 많이 퇴색되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명절만큼은 만사를 제쳐 두고 고향에 있는 산소와 일가친척들을 찾아보는 것이 우리 민족의 최대 풍속임에는 틀림이 없다. 성묘나 제사는 이미 오래 전에 유명을 달리한 선조의 죽음을 상기시키는 행위가 아니다. 집안어른들과 함께하는 성묘 길에 항상 존장자의 해설이 뒤따르기 마련인데, 적어도 무덤 앞에서 우리는 숙연한 마음가짐으로 돌아가신 선조의 명예와 살아생전에 힘써 지키고자 애썼던 삶의 가치에 대해서 되새겨 보는 시간을 갖게 된다. 특히 우리 주변에는 조상들의 훌륭한 삶에 대한 이야기가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오는데, 전해지는 내용의 진위나 역사적 사실여부가 확인되지 않아도 우리가 삶의 가치를 인식하는데 많은 귀감이 되고 과거의 역사를 상징적으로 표현해 주기 때문에 문학이나 민속학에서는 매우 중요한 연구대상으로 삼고 있다. 한의학 분야에 있어서도 이러한 구전설화가 여러 가지 양태로 전해져 오는데, 이를테면 허준이나 양예수와 같은 이름난 명의들의 활약상이나 우리가 몰랐던 이면사를 그린 명의설화(名醫說話), 약초의 기원이나 효능을 빗대어 표현한 약초설화, 또 주체나 지역이 분명하게 전해지지는 않지만 의원들의 치료행적이나 기이한 사연을 담아 전하는 이적설화(異蹟說話) 등에 명의들의 행적이 전해지고 있다. 때로 그들의 활약상이 다소 과장되거나 때론 화자(話者)의 개성에 따라 묘하게 변형된 채로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게 된다. 현전 구전설화나 문헌설화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지고 유포된 의약설화로 대표적인 명의설화의 주인공으로는 허준이나 양예수 이외에도 이석간이나 유상, 유이태, 초객초삼 형제 명의 등과 같은 실존인물들이 주류를 이룬다. 그러나 과거 역사시대에 대부분의 명의들이 신분제약에 놓여 있었기에 매우 극소수의 인물을 제외하곤 사전(史傳)은 물론이요 가계 기록이나 성명 삼자도 제대로 전해지지 않는 경우가 흔하다. 그래서 오늘날 단편적으로 전해지는 명의들의 사적이나 구전하는 명의담(名醫談)들은 대개 인근 지역에서 그들과 가까이서 접촉했던 문인 사대부들의 귀에 들어가 그들의 손에 의해서 채록된 것들이 잔존해 오는 것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18세기 여항문인들에 의해서 채집된 것들인데, 유재건(劉在建)의 『이향견문록(異鄕見聞錄)』, 조희룡(趙熙龍)의 『호산외기(壺山外記)』, 장지연(張志淵)의 『일사유사(逸史有事)』 같은 것들을 꼽을 수 있다. 이들 문헌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대개 의원이나 역관 같은 중인신분이거나 화가, 승려, 몰락한 양반층이 주를 이루며, 때로는 이름을 밝히기 어려운 천민들에 대한 행적도 기재되어 있다. 예컨대, 18세기에 활약했던 누항의 인물들에 대해 자신의 보고 겪은 이야기를 수집하여 의인전(醫人傳)을 남긴 책으로 이규상(李奎象, 1727~1799)이 쓴 『병세재언록(幷世才彦錄)』을 들 수 있다. 여기에는 종기를 잘 다스려 숙종대 신의로 이름을 떨쳤던 백광현을 비롯하여 사대부로서 정승의 지위에 올랐지만 의약동참으로 유명한 김석주(金錫冑), 그리고 서자보다도 더 천한 대접을 받은 얼자로 태어났지만 태의지사(太醫知事)에 올라 정승판서도 부럽지 않은 지위를 얻었던 유상(柳瑺), 병자호란에 어머니와 부인을 잃고 낙심하여 평생을 은거하며 의약활인에 자족하며 지냈던 주촌(舟村) 신만(申曼) 등에 얽힌 사연과 기병(奇病)을 다스린 치료담이 실려 있다. 또 허준과 양예수와 같이 당대에 이미 명성이 자자했던 인물도 실려 있지만 전혀 예상 밖의 이름이나 처음 들어보는 이야기도 실려 있다. 예를 들면 온양 사람 조한숙(趙漢淑)이란 분은 진위현령까지 지낸 선비였지만 명의로 이름을 날렸던 것뿐 만 아니라 특별한 용약법으로 유명하였다. 매일 환자의 증세를 살핀 다음에 몇 첩만을 주었는데, 만일 증세에 적합하면 그대로 쓰고 맞지 않으면 다시 증세를 파악하여 새로 약을 주었다. 그는 스스로 이것을 문안약(問安藥)이라고 불렀는데, “고방에는 약량은 많지만 약재의 가지 수는 적게 하였는데, 나는 고방에 따라 서너 가지 처방약을 합해서 쓰되, 약량을 적게 만든다. 시속의 의원들이 이런 묘리를 깨닫지 못하고 번번이 내 약방을 보고 잡탕이라고 비웃는다”고 하였다. 그는 포저 조익의 후손으로 대대로 의약을 전습하였고 부인과 아들도 또한 의약에 밝았다고 적혀 있으니 가히 유의의 전형이자 조선에서 보기 드문 상한고방파를 지향하는 인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이런 부류의 문헌 속에 등장하는 의원들은 피재길, 백광현 같이 정사에 기록되고 사전이 전해지는 명의도 있지만은 이동(李同)이나 노침의(老鍼醫), 조신선(趙神仙), 정노인과 같이 실명을 확인할 수 없는 분들도 다수를 이룬다. 이른바 누항에 묻힌 의인들로 앞서 문인 사대부의 글이나 문집에 채집된 극소수의 사례 말고는 기나긴 세월 속에 사적들이 모두 인멸되고 말았던 것이다. 필자는 수년 전부터 기회가 닿을 때마다 노경에 이른 선배 한의사나 명의의 후손들을 만나 잊혀가는 명인이나 의학자들의 사적을 조사하고 채록하는 작업을 지속해오고 있다. 오늘 우리 주변에서 수많은 인명을 구해냈던 의인들도 수십 년 후에 흔적 없이 잊혀지고 말 것이다. 우리가 기억하고 들은 명의들의 사적을 채집하고 기록하여 후대에 전해주는 것도 오늘을 사는 의학도가 해야 할 소임가운데 하나이리라. -
中 악양병원 중서의결합 종양과 방문기2019년 8월 17일부터 1주일간 대전대학교 서울한방병원 개원을 앞두고 중국 상해중의약대학 악양병원에서 함께 근무하게 된 박지혜, 강휘중 교수님과 함께 일주일간의 연수 기회를 얻게 되었다. 필자 일행이 방문한 상해중의약대학 부속 악양병원 종양과는 중서의 결합을 기본 원칙으로 하는 곳으로 50여년의 중서의결합 방식의 통합암치료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연간 5만명 정도의 외래 환자들이 내원하고 있었다. 중서의 결합이라는 방식답게 하나의 병원 안에서 수술, 방사선 치료, 표적치료와 같은 최신 표준치료와 한약 복용 병용을 핵심으로 하는 중국식 통합암치료를 시행 중이었다. 악양병원 종양과의 주임 쉬링(许玲)교수는 중의약 최고 명의 칭호를 받은 국의대사 류가상(刘嘉湘) 교수의 제자로 전통적 방식의 중의학 이론을 활용해 치료하면서도 동시에 최신 과학적 치료 방식을 함께 도입하여 임상연구와 진료를 이끌어나가고 있었다. 이 악양병원 중서의결합 종양과의 모토는 ‘암환자를 살되 잘 살게 하고, 살되 오래 살게 하자’는 것이다. 종양 환자의 심신을 전체적으로 관리한다는 이념을 통해 전통적인 방식과 현대과학적인 방식을 결합해 치료하고 있었고, 그러한 목적을 위해 중의학과 최신 표준치료를 병행하는 것이며 결과적으로 환자에게 도움이 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상해악양병원 종양과의 통합암치료 프로그램은 수술, 방사선 치료, 화학 요법 및 표적치료와 같은 표준치료에 더해 개인별 맞춤형 한약 복용을 중심으로, 그 외 한약재 황련의 주요성분인 베르베린(Berberine) 주사제, 폐암 환자의 인후통과 인후소양감을 완화하는 한약재 원료 첩부 요법, 약침요법과 침구요법 등 전반적인 중의약 치료를 병행하는 식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무엇보다 이러한 프로그램의 중점은 기존의 최신 표준치료를 빠짐없이 받도록 끊임없이 권유하는 데에 있다. 중의약이 끊임없이 진보해오며 아직까지 중국에서 암 치료의 중심부에 남아있을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최신 표준치료는 어느 하나의 특정성분 및 물질을 이용해 특정 타겟을 목표로 하는 날카로운 치료이기 때문에, 여기에 암의 미세환경을 다경로로 조절하며 인체 전반적인 면역수준을 제고하는 맞춤형 한약 복용 중심의 전반적인 증상 완화 치료가 도입되는 것이다. 최근에는 비소세포성 폐암 환자를 대상으로 1세대 표적치료약인 얼로티닙, 제피티닙 또는 아이코티닙과 맞춤형 한약 복용을 병행하는 통합암치료에 대한 임상시험을 진행하고 그 결과를 발표하기도 했는데, 한약은 중의학의 변증진단법에 의거한 기허형, 음허형 및 기음양허형 처방 한약을 사용했다. 결과적으로 표적치료제를 1차 약, 2차 약으로 사용한 경우 모두에서 맞춤형 진단 한약 복용을 병행한 통합암치료군이 더 긴 무진행 생존 기간을 나타내었다. 많은 인력과 노력으로 이루어진 최신의 과학적 성과는 고민할 필요 없이 이용하거나 권유해야 하며, 그에 더해 더 많은 이익을 제공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이 또한 고민할 필요가 없는 문제일 것이다. 기존 표준치료와 다른 한의 치료의 장점을 꼽으라면 다성분, 다경로 치료라는 말도 맞지만, 우선은 기본적 진단 및 치료 이론의 방향이 ‘개인별 맞춤’으로 향해있다는 것이다. 필자 일행이 쉬링 교수의 병동 회진 시간의 환자별 분석 토의에서 보았던 환자 맞춤형 현장진료는 기존 표준요법이 해결해주지 못하는 가려운 부분을 긁어주기에 충분해 보였다. 대전대학교 서울한방병원 동서암센터·통합면역센터의 모토는 ‘덜 고통스럽게, 더 오래 살게끔 하자’는 것으로 악양병원 중서의결합 종양과의 모토와 크게 다르지 않다. 서울한방병원·동서암센터·통합면역센터의 첫째 치료 원칙도 환자에게 이익이 된다면 검증을 거쳐 도입할 수 있다는 것이다. 기존의 검증된 표준치료요법을 적극 권장해 환자가 안정된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하고, 여기에 과학적으로 검증된 한의치료로 부족한 부분을 보강하는 한국형 통합암치료법을 기본으로 한다. 이 한국형 통합암치료는 암 생존자들이 한의암치료의 효과에 관해 과학적 연구 데이터를 바탕으로 표준화된 통합암치료를 시행하는 것이다. -
“새로운 한의진단학 교재 ‘완결’… 표준화된 한의학 전하는데 도움 기대”[편집자 주] 최근 한의진단학 편찬위원회는 ‘한의진단학-진단편’을 출간하고, 한의진단학 교재의 출판을 완결됐다. 본란에서는 김기왕 한의진단학 편찬위원회 편집책임자로부터 이번 출판을 진행하게 된 계기와 의미, 향후 계획 등을 들어본다. 환자를 위한 최선의 진료 수행키 위해 한의사의 의료기기 사용은 꼭 필요한 일 향후 한국표준질병사인분류 개정판에서도 증명·병명 병행기록 허용돼야 Q. 이번에 출간된 ‘한의진단학-진단편’은 어떤 책인가? “대한한의진단학회에서 오래도록 새 교과서 편찬 작업을 진행해 왔다. 그 성과로 지난 2018년 3월 ‘한의진단학-진찰편’이 발간된 바 있으며, 이번에 ‘한의진단학-진단편’을 발간하게 됐다. 두 책은 한의진단학 교재의 상권과 하권에 해당하는 책으로, 진단편이 발간됨으로써 새로운 한의진단학 교재의 출판이 완결됐다는 의미가 있다. 특히 이번에 출간된 ‘한의진단학-진단편’은 최근 발효된 국제표준질병인분류 11판(ICD-11)의 전통의학 증명(證名)을 온전하게 수록한 최초의 교재라는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Q. 출간을 진행하면서 중점을 둔 부분과 강조하고 싶은 부분이 있다면? “기획 단계에서 지향했던 것은 첫째 표준에 근거한 교과서를 만든다는 것이었고, 둘째로는 국제적 호환성을 갖춘 교과서를 만든다는 것, 셋째로는 역량중심교육에 친화적인 교과를 만든다는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 최신 지견을 갖춘 교과서를 만든다는 것이었다. 이 가운데 집필 과정에서 비교적 큰 노력이 할애된 것은 첫번째와 두번째 원칙이었다. 국내외의 전통의학 교육 과정과 내용에 관한 공인된 지침을 참고해 내용을 구성했고, 이에 따라 본 교재로 교육받은 학생이 국외에서도 교육 이수 인정을 받는데 도움을 주도록 했다.” Q. 책이 나오기까지 어려운 점은? “초기에는 집필 방향에 대한 혼선이 반복되었다. 즉 기존 교재의 개정판 성격을 갖는 교재를 만들 것인지, 아니면 국외에서 출판된 교재를 번역할 것인지, 또는 전면적으로 새롭게 집필을 할 것인지에 관해 학회 내부에서 다양한 의견이 있었고 일부 작업이 진행되다가 결실을 보지 못한 채 집필 방향이 전환되기도 하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소규모 학회의 사정상 선뜻 편집 실무를 맡을 사람이 없었고 집필진 사이의 합의를 도출할 뚜렷한 지향점의 제시가 미흡했던 데서 기인한 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2015년 이러한 혼란을 마무리하고 새로운 체계와 기준에 맞추어 새 교재를 만드는 작업이 시작됐지만, 이 과정에서도 출간까지 여러 차례 지체가 있었다. 이는 전적으로 편집 실무를 맡았던 제 자신의 역량 부족에 기인한 일이었다는 반성이 드는 부분이기도 하다.” Q. 앞으로 ‘한의진단학-진단편’은 어떻게 활용될 예정인가? “중국에서는 중의진단학 과목이 전통의학 기초 교육에서 작지 않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반면 국내에서는 아직 한의진단학의 위상이 그에 못 미치지만 향후에는 전통의학 교육의 세계적 표준화 추세와 정확한 진단의 중요성이 강조되는 추세에 따라 한의학 교육에서 지금보다 높은 비중을 갖는 과목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처럼 점차 강화되는 한의진단학의 위상에 걸맞게 이번 교재가 한의학의 표준화된 지식을 전하는 요긴한 매체가 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Q. 진단의 중요성 및 이에 따른 한의사의 의료기기 사용에 대한 견해는? “정확한 진단은 최선의 치료를 보장하는 전제일 뿐 아니라 의료소비자의 불편과 비용 지출을 최소화할 수 있는 전제가 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환자를 위해 최선의 진료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한의사의 의료기기 사용은 꼭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Q. 한의사의 의료기기 사용과 관련 항상 지적되는 부분이 바로 교육과 근거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진행되거나 추진할 부분이 있다면? “국내에서 80년대 이후로 오래도록 현대 변증론치 체계를 교육해 왔으나 임상 현장에서는 같은 환자에 대해서도 한의사에 따라 다양한 체계에 근거한 다양한 진단명이 제시되는 일이 많았다. 이는 임상 정보를 공유하는 데도 지장을 줄 뿐 아니라 한의학의 신뢰도를 떨어뜨리는 요인으로 작용한 부분도 있는 것 같다. 이러한 문제의 해결에 일조하고자 대한한의진단학회에서는 표준화·규범화된 변증체계를 학교 교육에 정착시키기 위해 노력해 왔다. 이제는 전통의학 진단명이 국제표준질병사인분류(ICD)를 통해 전세계에 확산되고 있는 만큼 그동안 주력했던 학회의 표준화 작업이 더욱 탄력을 얻게 되리라 생각한다. 이러한 노력은 한의학의 임상적 근거 확보에도 필수적인 기반을 제공할 것이며, 한편으로는 소위 현대 진단 수단을 통해 확인된 정보를 그대로 활용하기 위한 소위 ‘미관변증’(微觀辨證) 연구 성과도 면밀한 검토를 통해 지속적으로 교재에 반영해 나갈 생각이다.” Q. 꼭 하고 싶은 말은? “과거 한의 진단명이 한국표준질병사인분류(KCD)의 소위 U코드 영역에 통합되면서 한의 진단명과 서의 진단명 중 어느 한쪽만을 주상병명으로 기록하게 됐다. 즉 변증에 의료자원이 많이 소모되는 증례는 증명(證名)을, 변병(辨病)에 의료자원이 많이 소모는 증례는 병명(病名)을 기록하도록 했다. 이는 변병과 변증을 병행해야 하는 한의학의 특성을 무시한 불합한 처사였다고 생각된다. 이번에 출간된 교재의 근간을 이루는 국제표준질병사인분류 11판(ICD-11)을 만들며 세계보건기구(WHO)는 이러한 문제를 깊이 헤아려 전통의학 진단명의 병행 기입을 허용하기로 했다고 한다. 향후 한국표준질병사인분류 개정판에서도 증명, 병명의 병행 기록을 허용해 한의학의 임상 정보 축적과 학문적 도약이 이뤄지도록 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Q. 향후 계획은? “이번 교재의 기획 단계에서는 이 교재가 최신 지견을 충실히 반영한 ‘현재로서 최선인’ 지식의 집합체가 되기를 희망했지만, 집필 과정에서 이 점이 제대로 구현되지 못한 부분은 다소 아쉽다. 향후 지속적인 개정 작업을 통해 한의진단에 관한 한 현 시점에서 가장 믿을 만한 근거를 수록한 책으로 본 교재를 변모시켜 나갈 계획이다.” -
論으로 풀어보는 한국 한의학 (165)1965년 金相孝 敎授는 『대한한의학회지』 제3권 제3호(통권 17호)에 「진찰방법에 대한 소고」(부제: 경락과 경혈을 이용하여)라는 논문을 발표한다. 이 논문에서 자신의 이력을 ‘盧聖漢方科醫院副院長’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金相孝 敎授(1927∼1981)는 1959년 한의사가 된 후 1971년부터 경희대 한의대에 교수로 있으면서 한의학 교육과 연구에 전념하게 되는데, 특별히 한방신경정신과 분야에 있어서는 독자적인 영역을 개척한 인물로 평가된다. 이 논문은 一. 서론, 二. 經絡經穴의 의의(1. 經絡의 작용, 2. 經絡의 流注), 三. 經絡 및 經穴診察要, 四. 經絡 및 經穴上의 反應과 原因臟腑와의 關係, 五. 臨床例, 六. 結語의 순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는 內臟器의 異變은 반드시 經絡이나 經穴上에 어떤 반응이 나타난다는 기정사실을 인정하고 있음으로 經絡이나 經穴上에서 異常反應을 찾음으로서 所屬臟腑의 正常度를 탐지해볼 수 있다고 하였다. 어떤 經穴上에 壓痛, 知覺鈍痲, 知覺過敏, 硬結, 陷下 등의 異常이 생겨 이곳에 指壓을 가하면 심한 刺痛을 느끼거나 快感을 느끼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은 鍼灸治療에서 이미 實證된 바라는 것이다. 그는 이를 ‘經穴診察部位 및 所屬臟腑’라는 제목으로 도시하였다. 지면 관계상 이를 그림이 아닌 형식으로 經絡名, 診察要穴名, 診察臟腑의 순으로 다음에 나열한다. (足陽明胃經, 三里, 胃腑), (足太陰脾經, 地機, 脾臟), (足少陰腎經, 涌泉, 腎臟), (足少陽膽經, 坵墟, 膽囊), ( 足厥陰肝經, 太衝, 肝臟), (足太陽膀胱經, 志室, 膀胱), (足太陽膀胱經, 腎兪, 腎臟), (足太陽膀胱經, 三焦兪, 三焦), (足太陽膀胱經, 胃兪, 胃腑), (足太陽膀胱經, 脾兪, 脾臟), (足太陽膀胱經, 肝兪, 肝臟), (足太陽膀胱經, 天柱, 腦神經), (足太陽膀胱經, 崑崙, 膀胱) 그리고 그는 두 가지 중요한 유의점을 제시했다. ①신체배부에 배열된 經穴보다는 四肢末端에 있는 經穴에 病的反應이 더 빠르게 나타난다. 그러므로 급성적인 질환일수록 末端部의 經穴에 반응이 급속적이면서도 강력하게 나타난다. 만성적인 질환이나 선천적인 부족에서 오는 것은 背部에 있는 經穴에 현저히 나타난다. 즉 급작스런 단순 食滯인 경우에는 胃經과 脾經의 末端穴인 三里穴, 地機穴 등에 반응이 나타나며 오랜 胃腸病 患者로서 단순히 脾胃經이 虛弱해서 오는 것은 背部의 胃兪, 脾兪 등에도 뚜렷한 반응이 나타난다. ② 이 反應도 역시 男左女右의 原則에 의하여 男子는 左側에 女子는 右側에 심히 나타난다. 때로 氣虛가 심한 즉 右側에 血虛가 左側에 나타나는 경우도 있다. 아울러 그는 臨床例를 몇 개 들어 자신의 논거의 근거로 제시하고 있다. ① 28세 남자. 飮酒 後 食傷 끝에 오는 딸꾹질 환자. 始病한지 10여일 됐으며 그 사이 주로 양방치료에 의존하였지만 딸꾹질이 依然히 멎지 않는다고 함. 診脈上으로도 脾胃經의 虛證으로 나타나나 특히 三里穴과 地機穴에 심한 壓痛을 느낌에 脾虛證으로 확진하고 五行鍼法에 의한 補脾鍼法을 사용하였든바 즉시 십여일간에 걸친 頑强한 딸꾹질이 치료되었음. ② 40세 남자. 주소는 消化不良, 食後膨滿感, 小食, 疲勞 등. 진찰결과는 湧泉穴, 三焦兪 등에 반응이 있을 뿐 오히려 脾胃經에는 반응이 없음으로 이는 단순한 胃腸障碍가 아니고 根源이 腎氣不足 즉 內分泌係의 홀몬分泌不足으로 오는 虛證으로 보고 그러한 방향으로 鍼治 및 指導를 하였던바 단기간에 좋은 효과를 거두었다. -
趙憲泳(1900~1988)의 醫學思想(1)趙憲泳의 의학사상을 종합적으로 파악하기 위하여 그의 대표 저작인 『通俗漢醫學原論』에 나오는 ‘本著의 主眼’(凡例)를 중심으로 설명해 보고자 한다. 이 범례에서 趙憲泳은 漢醫學의 근본 원리 이해, 과학적 태도의 설명 방식, 상식적이며 흥미를 유발하는 간명한 해설, 漢醫 각파의 학설을 비교 비판, 논리는 실제 경험을 토대로, 漢醫學과 洋醫學을 비교 조화, 民衆醫術化에 노력 등의 7가지 추구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우선 趙憲泳은 범례의 서두에서 漢醫學의 근본 원리를 이해하고 나서 과학적 태도로서 이를 설명해 나가야 한다고 하였다. 비교적 늦은 나이에 한의학을 전문적으로 공부하기 시작한 趙憲泳은 짧은 시간에도 불구하고 한의학의 핵심적인 내용들을 충실히 이해하고 실천하였다고 평가된다. 1934년에 간행된 『通俗漢醫學原論』은 陰陽, 臟腑學, 證候學, 經絡學, 脈學, 藥理學(本草學 原理), 處方學 등의 7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책의 제목에서 ‘原論’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과 같이 한의학의 기본적인 주요 지식들이 모두 망라되어 있으면서 체계적으로 정리되어 있다. 즉, 저술의 목적을 한의학 교육에 둔 교과서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 음양을 한의학 이론 및 실천의 대강으로 삼아 조선말기와 대한제국의 한의학 교육기관에서 사용한 교재는 주로 『素問』, 『醫學入門』, 『東醫寶鑑』 등의 기본 의서들이었다. 일제강점기 초기 朝鮮醫師硏鑽會의 新舊醫學講習所(1911년) 교재도 이러한 틀을 벗어나지 못하다가 洪鍾哲의 公認醫學講習所(1913년)에서 비로소 臟腑 및 經絡學, 傷寒學, 雜病學, 小兒科學, 四象學, 外科學, 婦人 및 産科學, 藥物學 등의 근대식 교과목이 설치되고 강의가 이루어졌다. 『通俗漢醫學原論』은 이와 같은 근대식 교육체계를 종합한 통합교재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고 평가된다. 『通俗漢醫學原論』 체계의 특징을 간단히 언급해보면, 우선 陰陽의 개념을 한의학 전반의 지식을 운용하는 큰 대강을 삼고 있으며 五行은 五主와 五臟 등 인체의 구조와 기타 부분에서 언급하고 있다. 趙憲泳은 1935년 3월 東亞日報에 기고한 『陰陽五行說에 對하여』에서, 고루한 음양오행설을 한의계에서 다루고 있다는 일부의 비판에 대하여 당시 일본생리학회에서 음양오행설의 학술적 근거를 발표한 것 등을 제시하면서 음양오행설을 단순한 신비주의로 보는 것을 배척하였으며, 정반합의 변증법 및 현대의학의 생물, 화학, 물리학, 생리학 등 지식들을 특히 음양설과 연결시켜 서로 부합됨을 설명하였다. 이와 같이 음양오행설을 인류 사회와 우주 만유 현상의 통제적 법칙으로 보면서도 그 가운데 음양을 한의학 이론 및 실천의 대강으로 삼은 것이다. 또한 證候學 부분에서는 한의학은 그 전체가 證候學이므로 따로 내세울 필요가 없으나 초학자들의 편의와 臨證의 참고를 위하여 편을 설정한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證候學篇에서 특히 味, 色, 감정 등을 중시한 것은 실제 임상 현장에서 손쉽게 실천할 수 있는 실용성을 염두에 둔 것이다. 그리고 脈學을 별도의 항목으로 분리하여 설명한 것은 脈診을 진단의 가장 중요한 방법으로 인식한 것으로 기본 진단 원리에 충실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눈이 마음의 창이라면 맥은 생명의 관건이라고 하여 질병의 유무만을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심리적, 생리적 변화도 모두 맥으로 드러나게 된다고 하였다. 藥理學 부분에서는 유기화학을 바탕으로 유효성분을 유출하는 것은 불합리하며 氣, 味, 色을 통하여 종합적으로 약물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았으며, 處方學 부분에서는 틀에 맞추어진 기성방과 祕方의 형식을 비판하고 진단을 통하여 증후에 따라 방제를 조합하여 사용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한의학 내용 정확히 파악하고 합리적으로 분석 四象醫學에 대해서는 1935년 1월 『東洋醫藥』에 실린 『李濟馬四象醫論抄錄』의 해제에서 자신이 사상의학을 잘 모른다는 전제 하에서 李濟馬가 중국의학에서 벗어나 자기의 독자적인 신학설을 주창한 것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체질이 반드시 네 가지만 있는 것인지에 대해서 의문을 표시하였다. 역시 동년 10월에 『新東亞』에 게재된 『四象醫學에 對하야』에서는 四象 유형이 배타적으로 분류되어 성립될 수 있는지, 유형별 성격의 변동과 변화가 심하여 이를 확정할 수 있는지 등등에 대한 구체적인 의문점들을 제기하고 간단히 그에 대한 해답을 탐색하였다. 四象醫學에 대한 이러한 입장은 무조건 어떠한 학설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가지고 있는 의문점에서 출발하여 근본적인 원리를 찾아내려고 하는 탐구심에서 나온 것이라 할 수 있다. 종합해 보면, 趙憲泳은 특정 학파에 심취하여 치우진 것이 아니라 한의학 전반의 주요 내용을 골고루 다루면서 기본적인 원칙에 충실하려고 한 점이 특징이다. 이는 독학으로 한의학 공부를 시작하여 특정 학파에 소속되지 않은 점, 그리고 어려서부터 배운 한학의 소양을 바탕으로 직접 한의학의 내용을 정확히 파악하고 합리적으로 분석한 것 등에서 이유를 찾을 수 있다. 한의학 열정은 민중을 위한 의료계몽에 바탕 또한 임상 치료 부분을 주로 다루고 있는 『東洋醫學叢書 : 五種』을 살펴보면, 『東醫寶鑑』, 『景岳全書』 등의 처방을 주로 사용하면서 『中醫學辭典』에 수록된 처방 및 자신이 개발한 처방들을 추가하였다. 이미 趙憲泳은 1935년 『東洋醫藥』에 실린 『景岳全書演義』에서 張景岳의 이론이 精簡明確하여 현대의 과학적 관점으로 이해하기 쉽다고 평가하고 있는데, 예를 들어 八陳法 등 명확한 이론과 분류에 기반 한 처방 운용을 높게 평가한 것으로 추정된다. 참고로 『景岳全書』의 처방들은 『東醫寶鑑』의 간행 이후 우리나라에 잘 알려지지 않다가 조선 말기부터 黃度淵의 『方藥合編』, 李濟馬의 『東醫壽世保元』, 李圭晙의 처방집 등에서 나타나기 시작하며, 근세의 의가인 洪鍾哲은 몇 안 되는 景岳學派의 인물이었다. 또한 『中醫學辭典』이란 1921년에 간행된 謝觀의 『東洋醫學大辭典』을 말하며 1938년에 杏林書院에서 간행하여 국내에 소개되었다. 趙憲泳은 1920년대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한의학 연구를 시작한지 얼마 안 되어 1934년에 『通俗漢醫學原論』을 저술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집안에 내려오던 한의학 전통과 어려서부터 공부한 한학을 바탕으로 한의학의 원서 공부에 충실하여 原論을 중시하였던 점에서 찾을 수 있다. 또한 특정 학파에 속하지는 않으면서 새로운 지식을 받아들이고, 철저하게 자신의 임상 경험을 토대로 실용적인 의학을 추구하였다. 이러한 趙憲泳의 한의학에 대한 열정은 민중을 위한 의료계몽을 바탕으로 하는 이른바 民衆醫術化와 관련이 있으며 그가 추구했던 정치적 신념과 활동의 방향과도 일맥상통하다. -
한의임상과 혈액 검사 ❹올해 추석은 꽤나 빨리 왔다. 추석 연휴 전후를 기점으로 한의원이나 한방병원에 외래로 내원하여 본인, 부모님 혹은 자녀들의 체력 보강을 위한 보약을 처방 받기 위해 내원하는 환자들이 꽤 많다. 대개의 경우는 피로나 과로 또는 여름철 체력 소진으로 인한 무기력감 등이 원인이지만, 때로는 중대한 원인이 있는 경우가 있다. 병동 주치의 시절, 40대 초반의 여성 환자가 내원했다. 주소증은 단순 무기력증이었다. 식욕도 없고, 너무 힘이 없어서 입원하여 치료 받고 싶다는 것이었다. 다소 왜소한 체구(150cm 정도의 키와 40kg대의 몸무게)였으나, 무기력증 외에는 다른 호소 증상은 없었다. “식욕부진, 전신소력감… 등이 주소증이고, 얼굴도 창백하니, 氣血雙補하는 十全大補湯이나 補中益氣湯으로 처방을 해야겠군.” 나름 치료의 플랜을 세웠다. 처방을 내리고, 입원 환자이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혈액검사와 소변검사를 실시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헤모글로빈(Hb) 수치가 7이었다. 기본적으로 여성 특히 가임기 여성들은 월경 때문에 Hb 수치가 11~10정도를 유지하는 선이다.(정상치는 검사 키트 마다 약간의 차이가 있겠지만 12정도 이다) 근데 7이라… 내부 출혈이 의심되는 상황이었다. 이 환자 역시 수혈이 먼저 필요한 상황이었고, 수혈을 위해 인근 수혈이 가능한 종합병원으로 전원하여 수혈 치료를 받게했다. 대부분 환자들이 오해하고 있는 것 중의 하나가 빈혈의 증상이 어지러움이라는 것이다. 환자들은 이렇게 이야기 한다. “제가 빈혈이 있어서 자주 어지러워요.” 또는 “제가 빈혈이 있어요.”(이때 이 말의 의미는 제가 어지럼증이 있는데, 이 어지럼증 자체를 빈혈로 이해하고 말씀하는 경우다. 대부분 이렇게 이야기한다). 하지만 이러한 환자들의 생각과 달리 빈혈 증상은 어지럼증보다는 숨이 찬 게 대표적이다. 이는 산소가 부족한 상황에 부닥쳤을 때 어지럽기보다는 숨이 차는 증상이 먼저 나타나는 것을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마찬가지로 빈혈도 심하지 않을 때는 계단을 올라가거나 달리기, 등산 같은 운동을 할 때만 숨이 차다가 점점 심해지면 움직이지 않을 때도 숨이 차게 된다. 이외에 피로감, 식욕저하, 소화불량 등도 빈혈의 주요 증상이다. 빈혈의 원인은 여러 가지다. 영양분 부족, 골수 생성 부족, 용혈, 출혈(위장관 출혈 등) 그리고 암(위암, 대장암 등) 등이다. 노인에게서는 암의 가능 성을 의심해 보아야 하고, 다른 백혈구나 혈소판 등의 수치 이상이 없다면 출혈 등을 의심해 보아야 할 것이다. 상기 환자는 위장관 출혈(위출혈이나 소화관 출혈 등)이 의심되는 상황이었다(물론 가임기 여성 중 월경 과다나 부정기 출혈로 인한 빈혈도 예상할 수 있다). 실제로 철 결핍성 빈혈은 임상에서 가장 흔히 부딪히는 빈혈로1 대략적으로 전체 빈혈환자의 50%가 철 결핍에 기인한 것으로 예측하고 있으며2 , 성장기나 임신 등의 철 수요량 증가와 과도한 다이어트, 위 절제 등의 흡수부족, 월경과다, 위 장관 출혈 등으로 생체 요구량과식이 공급간의 불균형으로 야기된다3 . 이미 발생한 철분 결핍성 빈혈은 식사만으로 치료할 수 없어1 , 빈혈의 정도와 원인에 따라 적혈구수혈, 경구 철분 보충요법, 철분 주사 요법의 치료방법 중 적절한 치법을 선택하게 된다4 . 한의학에서는 철결핍성 빈혈을 血虛, 萎黃, 虛勞의 범주로 보고 脾陽不振, 氣血兩虛, 脾腎陽虛, 心脾陽虛, 蟲積內阻로 변증하여 치료한다3 . 철결핍성 빈혈에 대한 증례보고는 사물탕, 가미귀비탕, 보중익기탕가미방 등 그 보고가 많아 이를 참고하여 치료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드물지만 한의사가 아닌 무면허 의료 시술을 받거나, 환자 본인이 무분별하게 사혈요법이나 사혈 부항 요법을 시행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로 인한 빈혈이 나타나는 경우도 있다5 . 최근 내원한 환자 중 체력 보강을 위한 한약 처방을 원해 맥진을 시행했는데, 맥박수가 110회가 나왔다. 다른 임상 증상이 있었는지 물어보았지만, 피로감 외엔 딱히 다른 원인이 없었다. 혹시나 하여 심박변이도 검사했는데, 그 때는 맥박수가 100회 이상 체크됐다. 일상 습관을 물어보니, 지난 1년간 2일에 한 번씩 사혈요법으로 사혈 부항을 자가로 등에 실시한다는 이야기 했다. 환자가 혈액 검사를 거절하여 확인할 수 없었지만, 2일에 한번꼴로 과다한 사혈 부항 용법을 시행하여 이로 인한 지속적인 실혈로 발생한 빈혈이 의심되는 상황이었다. 빈맥은 빈혈로 인해 나타나며, 만성적인 실혈로 인하여 인체가 적응되어 환자가 느낄만한 자각 증상이 없었던 것으로 생각된다.(수영선수인 펠프스도 사랑한 부항요법…) 부항요법은 반드시 의료인인 한의사에게 시술 받아야 하며, 자가로 시술하거나 무면허 시술자에게 시술 받는다면, 이와 같은 만성 실혈이나 감염과 같은 부작용이 일어날 수 있음을 환자에게 교육시켜야 할 것이다. 빈혈은 가장 잘 알고 있는 질환인 것 같지만, 가장 잘 모르는 증상을 보이는 질환이다. 이를 감별할 수 있는 검사와 질환과 증상에 대한 이해가 필요할 것으로 생각된다. 출처 1. 대한가정의학회. 가정의학 임상편. 서울: 계축문화사; 2002, p. 207-13. 2. World Health Organization(WHO), United Nations Childrens Fund(UNICEF). Focusing on anaemia towards an integrated approach for effective anaemia control. WHO. 2004. 3. 전국한의과대학 간계내과학교실 교수 공저. 간계내과학. 4판. 서울: 동양의학연구소; 2001, p. 50-2,148-50. 4. 대한내과학회 해리슨내과학 편집위원회. 해리슨 내과학. Vol 1. 서울: 도서출판 MIP; 2003, p.349-54, 672-7. 5. 무면허 습부항 시술로 악화된 빈혈 치험 1례. 대한한방내과학회 창립 30주년 기념학술대회. -
한의학 체험 유튜브 컨텐츠 234만 조회최근 SNS 상에서 ‘한의학’ 관련 해쉬태그를 달면 재생되는 영상들이 화제다. 여러 가지 증상, 질환들이 생기는 원인과 증상을 통한 자가 진단법, 이를 해결할 수 있는 치료법, 운동법, 예방법 등을 마치 병원에서 진료하듯 설명해주는 유트브 동영상. 통인한의원의 이승환, 신상훈, 이지연 원장이 그 주인공들이다. 영상을 통해 ‘한의학’을 소개하게 된 계기는? 이승환: 글과 사진으로만 설명하는 것보다 더 효과적인 방법을 탐색하다 영상을 만들게 됐는데, 예상보다 반응이 좋다. 영상을 보고 찾아오는 환자들도 늘어나고 있다. 정보 전달의 효과가 글보다 영상의 효과가 뛰어나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평소 환자들이 궁금해하는 부분들을 주제로 선정하고 있다. 진료 중, 생각지 못한 질문을 받을 때면 그 내용 역시 반영하곤 한다. 신상훈, 이지연 원장과 함께 진행하면서 서로에게 많은 피드백을 주고, 받고 있다. 신상훈: 유튜브가 소위 ‘대세’이니 네이버 블로그 등의 다른 홍보방법과 함께 시도해봤다. 대중들에게 편하고 쉽게 정보를 공급할 수 있는 것이 영상이라 생각했고, 늘 아이디어 회의를 열어 일반적인 질환과 증상을 소개하는 짧은 영상들을 찍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로부터 큰 호응을 얻고 있다. 자연스럽게 영상을 찍는 노하우는? 이승환: 학창시절 동국대 한의대 연극동아리인 ‘애오라지’에서 활동했었다. 배우로서 연기를 했을 뿐 아니라 조연출, 조명, 무대설치 등 다양한 역할을 맡아봤기에 카메라 앞에 서는 것이 즐겁다. 극 중에서 다른 사람이 돼보는 경험은 타인을 이해하고, 특히 환자들과 함께 공감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이런 경험 덕분에 어떤 주제를 놓고 촬영을 할 때, 따로 대본을 준비하기보다는 흐름대로 편하게 이야기하려고 한다. 이지연: 저 역시 학창시절 연극부, 밴드부 등 다양한 공연 동아리 경험이 있어 카메라 앞에서는 비교적 긴장을 덜 하는 것 같다. 더불어 새로운 일에 도전하는 것을 좋아하는 성격 덕에 치료와 질병을 소개하는 영상을 찍는 것에 즐겁게 참여할 수 있었다. 영상을 계획할 때는 길이를 1분 이내로 올리기 위해 미리 어떤 내용을 전달하지 대략적으로 선정하지만, 따로 대본을 만들거나 특별히 연습을 하지는 않는다. 실제 환자들께 설명하듯 평소 진료처럼 말하고자 한다. 신상훈: 음악을 좋아해서 여러 가지 무대에 서본 경험이 있다. 학교 축제 무대와 클럽 공연, 교회 찬양팀 등의 경험이 있기에 영상을 찍는 것에 큰 두려움이 없다. 영상을 찍을 때엔 실제 진료 현장에 있다는 느낌으로 접근한다. 환자를 진료하듯이 편하게 해야 어색하지가 않고 자연스럽게 이야기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영상을 제작할 때 주의해야할 점이 있다면? 신상훈: 가장 중요한 것은 쉽고, 짧아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주제를 선정하고 이해하기 쉬운 내용을 담는 것이 중요하다. 이승환: 사실 우리 모두 방송 전문가가 아니다 보니 영상이 길어지면 부담스럽기도 하다. 영상을 보시는 분들 역시 짧은 시간에 핵심 정보만을 얻는 것을 선호한다. 이러한 분석을 통해 1분 이내로 영상을 제작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이라는 것을 인식하게 됐다. 파워 유튜버 ‘영국남자’와 함께 촬영해 화제다. 이승환: 운이 좋았다. 평소와 같이 토요일에 진료를 하고 있었는데 친한 한의사 친구가 유튜브 촬영 제의를 받았는데 촬영할 여건이 되지 못 해 대신해 볼 생각이 있냐고 물어보더라. 평소 아내와 유튜브를 즐겨 보고, 영상 제작에도 관심이 많아 흥미를 갖고 이야기를 들었다. 그런데 그 채널이 평소 즐겨보던 ‘영국남자’라니! 망설일 필요 없이 바로 진행하게 됐다. 물론 어떤 내용을 담아야할지 많은 고민을 했다. 짧은 동영상 한 편이지만 전 세계 340만 명의 구독자를 보유한 ‘영국남자’ 채널의 파급력을 생각했을 때 개인 한의원 홍보가 아닌, ‘현재의 한의학’을 전 세계에 소개할 수 있는 내용들을 담고 싶었다. 영문으로 만든 사상체질 설문지와 분석 프로그램을 구하고, 체형측정 프로그램 폼체커의 도움을 받아 환자를 진단하고, 필요한 한의학적 치료를 통해 전후 변화를 시각적으로 보여주자는 것이 1차적 목표였다. 해당 영상은 유튜브에 ‘영국남자’를 검색 후, 체질검사 썸네일을 클릭하면 볼 수 있다. 조회수 230만 돌파와 약 4000여 개의 댓글이 달렸다. 이승환: 편집을 재밌게 해줘서인지 보는 내내 기분 좋은 에너지가 가득했다. 영상이 끝나자 조회수와 댓글 수가 눈에 들어왔다. 외국인들은 “한의학이 전 세계에 알려지길 기대한다”, “한의학에 대한 관심이 생기게 됐다”, “그래서 거북목은 치료 됐는가”, “한국말을 못 하는데 한의원에서 치료 받을 수 있는가?” 등의 코멘트를 해주었다. 기획의도에 맞는 반응들을 얻어 기분이 좋았다. 신상훈: 동영상이 업로드 된 후 외국인 환자 수가 확실히 늘었다. 의외로 한국어를 할 줄 아는 분들이 많은데, 어떤 분은 “저도 거북목 증상이 있어서 왔는데요”라고 한국말을 구수하게 구사하시더라. 이번 주에만 6명의 외국인 환자가 내원했는데 한의 치료를 받고 매우 만족스러워해 뿌듯했다. 이지연: 이전에도 외국인 환자들이 종종 내원을 했지만 콘텐츠가 방영된 이후 초진 환자가 많이 늘었다. 이번 영상이 외국인 환자들에게 한의학을 소개하는데 좋은 반응을 끌어낸 계기가 되어 기쁘다. 특히 기억에 남는 환자가 있다. 한국 생활 중 생긴 통증으로 고생했던 외국인 환자가 출국을 앞두고 한의원을 방문했다. 치료 후 통증이 경감돼 출국 전날까지 치료를 받았었다. 타지에 서 온 아픈 환자들을 마주하면 마음이 좋지 않지만 이내 치료를 받고 웃는 모습을 볼 때면 그것만큼 뿌듯한 일도 없다. 시청자들 사이에서 ‘거북목’이 유행어가 됐다. 이승환: 진료받은 신부께서 심한 거북목 증상을 보여 ‘turtle neck’ 이라고 설명했는데, 본의 아니게 별명을 지어준 것 같아 미안하다. 짧은 시간이지만 ‘거북목’이라는 증상이 몸에 어떻게 영향을 주고 있으며, 이에 따른 부항 및 추나 등 한의약 치료법을 소개하고, 치료 후 호전된 결과를 확인하는 하나의 스토리를 구상했다. ‘영국남자’ 유트버들은 우리의 설명을 경청했고 새로운 경험에 두려워하기보다는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영상을 시청하는 입장에서는 단순히 ‘거북목’이 뭘까하는 의문으로 끝날 수도 있는데 베테랑들은 다르더라. 단어 하나, 치료의 한 포인트에도 수차례 재밌는 반응을 이끌어 냈다. 몇 가지 아쉬운 점이 있었지만, 당초 의도했던 한의학 홍보 목표에 약 80% 정도는 도달한 것 같아 만족스럽다. 정보 전달 목적으로 영상을 촬영하는 한의원 유튜브와는 결은 달라도 여러 면에서 배울 점이 많았다. 촬영했던 모든 시간들이 소중한 경험이었다. 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시청해왔던 유튜버가 나와 함께 촬영하고 있다는 사실이 신기하고 재미있었다. 유쾌한 영국남자들의 다채로운 제스쳐와 긍정적인 반응들 덕분에 2시간이 넘는 촬영동안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 향후 목표는? 이승환: 세계적인 인기 강연회 ‘TED’에 출연해 우리가 현대사회에 살아가면서 부지불식간에 하고 있는 생활습관들의 문제점을 시각적으로 보여주고, 이에 대한 해결방안을 알려주고 싶다. 지금 업로드하고 있는 영상들도 목표에 도달하기 위한 연습이라 생각하고 꾸준히 제작할 예정이다. 꿈을 실현하기 위해 영어 공부도 열심히 병행하고 있다. Michael Elliott, 라이브 아카데미 등 유용한 유튜브의 무료강의들을 통해 듣고, 말하며 ‘TED’에서 강연하는 모습을 꿈꾼다. 머지않은 미래에, 그 무대에 서서 한의학의 우수성을 쉽고, 재미있게 이야기하고 싶다. -
趙憲泳(1900-1988)의 생애(4)해방 직후 趙憲泳은 임시정부 및 연합군 환영준비위원회 사무차장을 맡고 원세훈과 함께 조선민족당을 조직하였다가 韓國民主黨 결성에 참여한 후 지방부 부장 등을 맡게 된다. 1946년 2월에는 大韓民國非常國民會議 후생위원, 동년 11월에는 韓國民主黨 상임위원, 1947년 1월에는 반탁독립투쟁회 중앙집행위원, 동년 10월에는 韓國民主黨의 중책인 조직부장이 되었다. 대체적으로 중도우익의 진영에서 활동하면서 1948년 5월 10일 총선에서 단일 후보로 경북 영양군에서 무투표 당선되었다. 당선 이후에는 헌법기초위원 등을 맡았으며, 특히 반민족행위처벌법을 추진하고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의 조사위원으로 활동하였다. 이 과정에서 이승만의 반민족행위처단법을 견제하는 담화 등에 대하여 반대하는 발언을 하였으며, 국가보안법의 제정에 대해서 반대 입장을 내기도 하였다. 1948년 10월 韓國民主黨을 탈당한 이후 우익과 더욱 등을 돌리게 되어, 1948년 12월에는 친일경찰 노덕술 등에 의한 반민특위 위원들과 정부요인의 암살계획이 폭로되기도 하였고, 1949년 6월에는 폭도들이 경북 영양군의 趙憲泳 본가에 침입하여 가옥을 전소시키고 금품을 탈취하는 일이 벌어져 이 과정에 경찰 및 주민 등 2명이 사망하기도 하였다. 이후 趙憲泳은 韓國民主黨을 탈당하고 잠시 民主國民黨에 소속되어 있었으나 다시 탈당한 후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1950년 5월 30일 2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다. 그러나 국회를 개원한지 일주일도 못되어 한국전쟁이 일어났으며, 전쟁 동안 趙憲泳은 납북되어 이후로 남한에서는 더 이상 활동을 하지 못하게 된다. 한의사제도 배제한 洋醫단일법안 강력히 반대 趙憲泳은 제헌국회 활동 기간 동안 국회의원 중에서 368회로 가장 발언을 많이 한 의원이었으며 헌법제정을 위한 헌법기초의원으로 활동하면서 민주주의 헌법 수립에 중요한 기여를 하였고, 남녀동등의 기본권에 대해서도 여성의 권한 신장을 주장하였다. 또한 趙憲泳은 국민의료법 제정 과정에서 1950년 2월에 한의사제도를 배제한 洋醫단일법안이 제출되었을 때 강력한 반대를 표명하여 무산시키기도 하였다. 1944년 일제강점기에 공포된 朝鮮醫療令이 해방 후 여전히 효력을 가진 상황에서 당시 보건부는 한의사가 배제된 保健醫療行政法安을 文敎社會委員會에 제출하였는데 전국적으로 11만명이 서명한, 漢方醫 보호를 위한 법안을 만들라는 진정서가 위원회에 쇄도하였고, 趙憲泳의원도 강력히 반대함으로써 이 안은 국회 본회의에 상정되지 못하고 폐기되었다. 趙憲泳이 납북된 이후 1951년에 비로소 한의사제도를 포함한 국민의료법이 공포되었다. 해방 후 趙憲泳이 남한에서 활동한 시간은 짧으나 그의 저서는 널리 유행되었다. 가장 유명한 『通俗漢醫學原論』은 해방 후 1950년에 乙酉文化社에서 重刊되었으며 지금까지 醫門社, 眞玄, 學林社, 學園社 등의 출판사를 거치면서 간행되어 현재까지 애독되고 있다. 또한 윤구병이 『通俗漢醫學原論』에 주해를 달고 『한방이야기』로 서명을 바꾸어 1987년에 간행하였다. 일제강점기 동안 간행되었던 『民衆醫術理療法』, 『肺病漢方治療法(肺癆證治)』, 『神經衰弱症治療法(心氣證治)』, 『胃膓病治療法(脾胃證治)』, 『婦人病治療法(女科證治)』 등은 각각 1955년에 杏林書院에서 한정판으로 重刊되었고, 이를 다시 합본하여 1963년에 『東洋醫學叢書:五種』이 간행되었다. 『漢醫學의 批判과 解說』, 1957년 杏林書院서 重刊 또한 1942년에 한의학 부흥 논쟁의 글들을 모아 간행되었던 『漢醫學의 批判과 解說』은 1957년 杏林書院에서 重刊되었고, 정근식의 해설과 박석준, 최종덕의 보론을 덧붙여서 1997년에 『漢醫學의 批判과 解說』로 다시 출간되었다. 『海山隨筆集』, 『議會演說集』 등은 아직 미간 상태이다. 趙憲泳이 남한에서 한의계에 몸담았던 시기가 대략 1930년대 초반부터 1950년까지의 20년 미만의 기간인데 그의 학문이 후학들에게 계승된 기록은 확실하지 않다. 단, 李鍾馨의 『韓國東醫學史』에서는 京城醫學專門學校 출신의 姜弼模가 趙憲泳을 계승하였고, 盧正祐가 師事하여 계보를 이었다고 하였다. 姜弼模는 학교 졸업 후 한의학을 공부할 때에 趙憲泳의 『通俗漢醫學原論』을 읽었다고 회고하여 어느 정도 영향을 받을 것으로 보이고, 반면에 盧正祐는 자신의 저서인 『韓國醫學史』에서 趙憲泳을 언급하고 있지 않아 師承관계에 대해서는 추가 연구가 필요해 보인다. 또한 해방 후 한의과대학에서 韓方生理學을 연구하였던 尹吉榮도 젊은 시절에 『通俗漢醫學原論』을 읽고 한의학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고 하였으며, 이후 그가 한의학의 현대화에 노력한 점도 趙憲泳의 입장과 유사한 점이 있다. 한의학 분야 이외의 저작물 중 茶山 丁若鏞에 대한 논설이 다시 학술잡지에 수록되기도 하였는데, 1974년 12월에 「醫學 上으로 본 茶山先生」이 『韓國學』에, 1979년 12월에 「漢醫學上으로 본 茶山醫學의 特色」, 「醫學上으로 본 茶山先生」 등이 『茶山學報』에 부록으로 수록되었다. 趙憲泳은 광복 이후 주로 정치 활동에 주력하여 언론 및 잡지에 기고한 글들도 대부분 정치적 이슈에 대한 것들이었다. 1947년 1월부터 5월까지 『再建』에 「嶺南騷擾의 眞相·原因·對策」, 「國立서울大學校案과 學生盟休에 對하여」, 「右翼陣營의 行動統一을 强調함」 등을 연달아 발표하였고, 제헌국회의원으로 당선된 이후에는 1948년 6월과 9월 京鄕新聞에 각각 「憲法制定에 臨한 私案」, 「國際聯合과 韓國獨立-大西洋憲章의 精神을 想起하라」 등을 발표하였으며 동년 9월에도 『海東公論』에 「新國家憲法論」을 발표하였다. 1949년 5월과 10월에는 東亞日報에 각각 「議政壇上의 一年回顧」, 「國民會運營엔 愼重(上)」을, 동년 5월 『새한민보』에 「美國撤退와 國內輿論」, 8월 『民聲』에 「얄타協定과 極東暗雲」, 8월과 11월 서울신문에 각각 「건국1년의 업적(정계편)」, 「和戰 兩樣의 態勢」, 9월 『新天地』에 「北大西洋同盟과 太平洋同盟」, 11월 『國會報』에 「國會와 政府」 등을 각각 발표하였다. 1950년에는 1월에 『民聲』에 「歸屬財産은 어떻게 處理되나」, 『新天地』에 「現政府에 對한 나의 要望」 등을 각각 발표하였고, 2월 『民族文化』에 「國內政界의 回顧와 展望」, 4월 東亞日報에 「民族的 重大危機」를 발표하였다. 정치적 주제 이외의 기고로는 1949년 10월 『民族文化』에 「民族精神理念과 그 昻揚方法論」의 좌담 내용이 실렸고, 1950년 漢城日報에 당시 文壇을 비판한 「權力에 屈從阿附 淸廉한 節操 없다」가 게재되었다. 납북 후 趙憲泳 활동 관련한 공개 자료는 제한적 북한으로 납북된 이후에 趙憲泳은 정치 활동보다는 주로 한의학 연구 및 임상 활동을 진행하였는데 평양의과대학 동의학부 교수를 지냈으며 동의학연구소 소장으로 연구를 주도한 것으로 전해진다. 1965년에 동의학박사학위를 취득하였고, 과학연구와 임상 치료에 힘썼으며 특히 심장병에 대한 뜸 치료법 등 가치 있는 치료법들을 개발하였다. 『동의처방학』, 『동의용어사전』 등을 집필하였고 『醫方類聚』, 『醫林撮要』, 『東醫寶鑑』 등 고전 의서들을 번역하는 데에 크게 기여하였다. 국내에서 『醫方類聚』 국역본은 1991년에 간행되었고, 趙憲泳이 金東日 등과 번역한 『東醫寶鑑』은 1994년에, 조선시대 楊禮壽의 『醫林撮要』 번역서도 1999년에 간행되었다. 1956년에 북한에서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집행위원이 된 이후 1988년 사망 직전엔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의 서기장까지 맡아서 일하였으며, 1971년 1월부터 1972년 2월까지는 북조선 국가원수 겸 국무원수상 예하 朝鮮東洋醫科學特報秘書官으로 활동하였다. 1988년 5월 23일 사망 때에는 북한으로부터 적십자사를 통하여 소식을 알려왔으며, 평양시 삼석구역에 있는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의 특설묘지에 안장되었고 2004년경 평양시 용성구역의 재북인사들의 묘역으로 이장되었다. 납북 이후 趙憲泳의 활동에 대해서는 공개된 자료가 제한적이므로, 향후 남북교류를 통하여 정보를 수집한 이후 보다 정확한 평가가 이루어질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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