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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09월 23일 (수)

법과 사람 사이②

법과 사람 사이②

“설명하지 않으면 법적 책임이 된다”
충분한 설명은 환자가 자신의 몸과 삶에 대해 스스로 선택할 수 있도록 돕는 과정…설명은 누군가의 존엄과 선택을 존중하는 일

배용원 변호사님.jpg


배용원 대표변호사

•법률사무소 동촌(東村) 

•前 청주지검장

•대한한의사협회 자문변호사


 

“변호사님, 솔직히 말씀해 주세요. 이 사건 이길 수 있을까요?” 상담 중에 의뢰인이 조심스럽게 묻습니다. 시원하게 “이깁니다”라고 말해 주고 싶지만, 세상일이 그렇게 단순하진 않습니다. 분쟁에는 늘 상대방이 있고, 사건의 흐름은 언제든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변호사는 즉답 대신 사건의 쟁점, 전체적인 진행 과정, 수사나 재판 절차, 변호인의 역할 등에 대해 차분히 설명합니다. 사실 이런 설명은 단순한 친절이 아니라 직업적 의무입니다. 변호사 윤리장전은 변호사가 사건을 수임할 때 의뢰인에게 필요한 사항을 설명하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변호사뿐만 아니라 한의사와 같은 전문직 종사자들에게 설명의무(duty to inform)가 부과되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전문가와 고객 사이에는 지식의 비대칭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사안의 구조나 위험을 전문가만 알고 있다면, 고객은 자신의 선택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제대로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설명의무 입증책임 의료인에게 있어”


게다가 사람은 누구나 자신에게 유리한 정보는 받아들이고 불편한 정보는 외면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선택적 지각(selective perception)이나 확증편향(confirmation bias)이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전문가의 설명은 단순히 정보 전달을 넘어, 고객이 상황을 균형 있게 이해하도록 돕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전문직에게 설명의무가 강조되는 이유는 결국 여기에 있습니다. 충분한 설명을 통해 고객이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지요. 금융상품 판매 과정에서 요구되는 고지의무도 비슷한 맥락입니다.


이 원칙이 가장 분명하게 발전한 분야가 바로 의료 영역입니다. 의료법 제24조의2는 의사·치과의사 또는 한의사가 수술, 수혈, 전신마취 등 신체에 중대한 위해가 발생할 우려가 있는 의료행위를 할 때 환자에게 법에서 정한 사항을 설명하고 서면 동의를 받도록 하고 있습니다. 한의사 윤리지침에도 환자에 대한 설명의무가 명시되어 있습니다.


대법원도 의료인의 설명의무를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판례는 질병의 증상, 치료 방법, 예상되는 위험 등을 설명하여 환자가 자기결정권에 따라 치료 여부를 선택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판시하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설명의무를 다했는지에 대한 입증책임도 의료인에게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배용원 변호사님2.jpg


합리적 판단 내릴 수 있게 필요한 정보 제공


과거에는 의사가 환자에게 설명하는 행위를 일종의 시혜처럼 여기던 시대가 있었습니다. 무엇이 환자에게 최선인지는 의사가 더 잘 안다는 가부장적 온정주의(paternalism)의 관점이었습니다.


그러나 20세기 이후 환자의 자기결정권이 중요한 가치로 자리 잡기 시작했습니다. 1914년 미국의 슐렌도르프 사건(Schloendorff case)은 환자의 동의 없이 시행된 수술을 폭행(Battery)으로 간주하고, 환자의 신체적 자율성을 법적으로 인정했습니다. 이후 1957년 Salgo 사건에서는 의사가 환자에게 단순히 수술 내용을 알리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환자가 합리적인 판단을 할 수 있도록 필요한 정보를 제공해야 한다는 법리가 제시되었습니다. ‘충분한 설명에 근거한 동의(Informed Consent)’ 개념이 등장했습니다.


최근 판례의 흐름은 설명의 기준을 ‘의료계의 관행’이 아니라 ‘합리적인 환자(reasonable patient)’의 관점에서 판단하는 방향으로 발전했습니다.


문제는 설명의무를 다하지 않으면 법적 책임이 돌아온다는 것입니다. 설명 없이 이루어진 의료행위로 환자에게 손해가 발생하면 민사상 손해배상 책임이 인정될 수 있습니다. 설명의무 위반과 상해의 결과 사이에 상당인과관계가 인정되는 경우에는 업무상 과실치상의 형사책임이 문제될 수도 있습니다. 위험성을 충분히 설명 받았다면 환자가 그 시술을 거부했을 것이라고 증명되는 경우에도 형사책임이 인정될 수 있습니다.


“인공지능의 시대, 설명의무 더 중요해져”


요즘은 분야를 막론하고 전문가의 권위가 예전 같지 않습니다. 인공지능의 발전은 이러한 변화를 더욱 빠르게 할지도 모릅니다.

역설적으로 전문가의 설명의무는 더 중요해지고 있습니다. 설명하지 않으면 법적 책임이 됩니다. 그러나 설명이 단순히 책임을 피하기 위한 절차에 그치는 것은 아닙니다. 


충분한 설명은 환자가 자신의 몸과 삶에 대해 스스로 선택할 수 있도록 돕는 과정입니다. 설명은 누군가의 존엄과 선택을 존중하는 일입니다.

 

진료실에서 건네는 차분한 설명 한마디가 환자와 가족들의 불안을 덜어줄 때 그것은 법적 의무를 넘어 의사만이 가질 수 있는 따뜻한 직업윤리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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