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3년 『대한한의학회지』 제1권 제2호에는 韓東錫 先生의 「醫林落穗」라는 제목의 글이 게재되어 있다.
韓東錫(1911〜1968)은 함경남도 함주 출신으로서 李濟馬의 再傳弟子인 金弘濟를 선생으로 모시고 한의학을 학습하였고, 1950년 한국전쟁이 나면서 남한으로 월남하여 1953년 韓長庚 先生의 지도를 받았다. 한의사 검정고시가 있었던 1953년 한의사면허를 취득한 이후로 1960년대부터 동양의약대학(경희대 한의대의 전신)에서 黃帝內經, 運氣篇, 周易 등 과목들을 강의했다.
韓東錫 先生의 「醫林落穗」는 다음과 같은 글을 서두에 써놓았다. ‘醫林落穗’란 “한의사들이 떨어뜨린 이삭”이란 뜻으로 “한의사들 자신이 축적해온 경험”을 의미한다.
“誰知盤中飧이 粒粒皆辛苦랴 하는 말이 있다. 이것은 古人들의 節米思想에 對한 아낌없는 述懷이다. 이러한 心境을 가진 詩人의 눈에 萬一 벼이삭 한 개만 눈에 띠었다면 보다 더 感情에 찬 詩句가 또 흘러 나왔을 것이다.
世態人情의 不均性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것이 없다. 旬日一食도 못하여 集團自殺을 企圖하는 사람에게는 恨없이 貴中한 金粒落穗도 쌀밥이 싱거워서 못먹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발아래 흙과 함께 부서져버릴 것이 아닌가?
이것은 우리 醫學徒들에게도 吟味할만한 가치가 있다.
古人의 名著나 名醫의 秘方이라면 血眼이 되어 돌아다니지만 臨床周邊에 흩어져 있는 우리 醫林의 落穗는 疎忽히하는 傾向이 없지 않다. 筆者는 這間 어떠한 患者를 治療하다가 落穗 한 개를 發見하고 過去의 나의 學究生活이 적은데 注意를 기울일즐 몰랐던 形式的인 惰性을 慨嘆한 적이 있다.
그래서 筆者는 이 글을 쓰면서 또 이렇게 생각하여 본다. 萬若 三千會員들이 一人一穗運動을 일으킨다면 - 臨床周邊에서 주을 수 있는 – 또한 自己自身을 充分히 가르쳤다고 생각하는 餘滴들에다가 生理學的인 뼈와 病理學的인 살을 붙여서 學界에 내놓는다면 이것이 바로 생생한 臨床敎科書가 될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여 본다.”
위의 글은 당시 3000명의 한의사 회원들이 한사람마다 가지고 있었던 치료 경험을 모아서 대한한의학회지를 통해서 공유해보자는 것으로 학술적 공통분모를 만들어나가자는 운동을 제안한 것이다. 이후로 그는 구체적으로 醫案의 형식으로 치료경험을 공유하는 장을 꾸준히 만들어나가고 있다.
그의 제안은 많은 한의사들의 공감을 받아 이후로 대한한의학회지의 호마다 수많은 치료 경험이 醫案의 형식으로 게재되기 시작한다. 그 대열에 참여한 사람은 1963년 권도원, 권영준, 김갑철, 맹화섭, 이구협, 이현수, 장재남, 조충희, 차돌생, 허재숙, 홍성초 등이 있고, 1964년 국명웅, 권영식, 김동필, 김동희, 김문성, 김승기, 김장범, 박영덕, 박인빈, 반창균, 김문성, 이구협, 이기순, 이문봉, 이상흡, 이재원, 임영재, 장경옥, 장태눌, 전만식, 전봉화, 정성락, 조세형, 조충희, 차상현, 허재숙, 홍순백, 홍순용, 황계선 등이 그 대열에 참여한다. 1965년에는 권영식, 맹화섭, 신길구, 오흥근, 이주련, 채차출, 황창순 등이 치료경험을 학회지를 통해 공개하고 있다. 이러한 노력의 전통은 지금까지 계속 이어지고 있다.
한동석 선생의 醫林落穗運動은 이후 경험방 수집 의서의 간행으로 결실을 맺게 된다. 1965년 杏林書院에서 간행한 『經驗方三百選集』, 1971년 漢城出版社에서 간행한 『實效特方 驗方集』, 1972년 『漢藥鍼灸 特殊秘方集』 등이 그것이다.
1963년 ‘대한한의학회지’ 제1권 제2호에 나오는 한동석 선생의 ‘의림낙수’라는 제목의 글.